독일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f0f0f0> 이름 | 알프레드 켈바사 Alfred Kelbassa | |
출생 | 1925년 4월 21일 | |
바이마르 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겔젠키르헨 | ||
사망 | 1988년 8월 11일(향년 63세)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 |
소속 | <colbgcolor=#f0f0f0> 유스 | SW 뷜세 (1933~1944) |
프로 | 슈와츠-바이스 뷜세 (1933~1940/ 유스) SC 겔젠키르헨-부에르 (1940~1946) → 홀슈타인 킬 → 포르투나 글뤼크슈타트 STV 호르스트-엠셔 (1946~1952) SC 프로이센 뮌스터 (1952~1953) STV 호르스트-엠셔 (1953~195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54~1963) | |
국가대표 | 6경기 2골 (독일 / 1956~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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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어려서부터 운동에 재능이 있어서 축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근대 5종에서 이미 독일 유스 챔피언으로 이름을 날렸다. 때문에 피지컬적으로 큰 장점을 가졌던 그는 1933년 들어 SC 겔젠키르헨-부에르에서 축구를 시작하게 된다.이후 전쟁 기간 동안 홀슈타인 킬과 포르투나 글뤼크슈타트에서 임시 선수로 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47/48시즌 부터 오버리가 베스트 팀인 STV 호르스트-엠셔에 입단했다. 1947년 11월 14일 SC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와의 경기에서 데뷔하며 선제골을 넣는 등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넣었지만, 팀은 5:2로 패했다. 그래도 개인적인 활약상이 좋아서 47/48시즌 리그 24경기 20골을 기록했다. 이어 48/49시즌에도 24경기 16골을 득점하며 팀을 리가 2위로 이끌었고, 49/50 시즌에는 28경기 18골을 넣는 활약으로 팀을 전국 대회인 독일 챔피언십에 진출시켰다. 이어 50/51시즌 29경기 12골을 기록해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51/52시즌 10경기 3골에 그치며 부진했고 팀도 강등권에서 겨우 살아났다. 이 시즌 이후 당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던 SC 프로이센 뮌스터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뮌스터에서는 오래 있지 못했다. 시즌 25경기 10골을 기록했으나 한 시즌 만에 고향 팀인 STV 호르스트-엠셔로 복귀했고, 복귀 시즌 28경기 21골로 분투했으나 팀의 하위리그 강등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같은 지역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한다.
도르트문트에서는 알프레드 프라이슬러, 알프레드 니피클로와 함께 일명 알프레드 삼총사로 불리며 구단의 간판 선수가 되었고 56/57시즌과 57/58시즌 연이어 오버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 또한 팀 성적도 좋아서 55/56, 56/57, 62/63 시즌까지 도르트문트에서 오버리가 우승만 세 차례 차지했다. 61/62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에서 은퇴했으나, 도르트문트의 스트라이커 위르겐 쉬츠가 62/63시즌 부상으로 이탈하자, 후반기에 전격 복귀해 팀의 62/63시즌 우승에 기여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이 시기에 독일 국가대표팀에도 소집되어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도 출전했다. 다만 A매치 경력은 6경기 2골로 클럽 활약상에 비해 일천한 편이다.3. 여담
- 그의 아들은 동료 알프레드 니피클로의 딸과 결혼했다.
- 도르트문트 훈련장 근처의 길이 알프레드 켈바사 거리로 명명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