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7:05:12

압박 전투

Trận Ấp Bắc(戰閘北)
Battle of Ấp Bắc / Battle of Ap Bac
압박 전투
파일:apbac-21.jpg
베트남 전쟁
날짜
1963년 1월 2일
장소
띠엔장 성 압박 촌
교전 국가 및 세력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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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남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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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남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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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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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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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부이 딘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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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후인 반 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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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존 폴 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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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하이 호앙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
병력 보병 1,500~2,000명
장갑차 13대
헬리콥터 15대
경비행기 1대[1]
보병 200~350명
피해 남베트남군 83명 전사, 100명 이상 부상[2]
미군 3명 전사, 8명 부상
헬리콥터 5대 격추
장갑차 3대 파괴[3]
18명 전사, 39명 부상

1. 배경2. 전개3. 결과
3.1. 왜 이렇게 못 싸웠나?
4. 기타

1. 배경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4]의 종결 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양분된다.북부에는 호치민의 공산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남부에는 응오딘지엠의 자본주의 베트남 공화국이 건설된다.그러나 베트남 남부에도 베트민 병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다. 총선거를 통한 통일에 기대를 걸고 있기도 했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중국식 토지개혁을 강행하여 어느정도 후유증 시달리던 북베트남은 이들을 사실상 방치했다.[5] 남베트남에게 있어 베트민 잔존병력은 안보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했다지만 주도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인 이상 베트민 잔당들과 베트남 공화국 정부는 물과 기름일수밖엔 없었다.[6] 탄압과 진압이 뒤따랐고,미국이 제공한 각종 무기들과 차량들[7]을 앞세워 남베트남군은 성공적으로 베트민 잔당들을 쓸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1960년 남베트남에서 베트민 잔당들과 현지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창설된 이후, 해방전선측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남베트남군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통령 응오딘지엠이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것보다는 정권 유지에 관심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응오딘지엠은 군 장교들을 친구와 가톨릭교도로만 채우고, 작전이 성공적이었어도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으면 책임자들을 구박하거나 강등시켰다. 이는 그럭저럭 싸우던 남베트남군이 무능해지는데 일조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65km 정도 떨어진 전략촌 마을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다.

2. 전개

압박 전투가 일어나기 한 달 전, 남베트남 정보국은 압박 지역 북서쪽에 베트콩 1개 중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던 미군사고문단측은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UH-1, H-21 헬기M113 APC를 지원해주었다. 그들의 전략은 남베트남 부대 1,500명 정도가 압박 지역을 세 군데에서 공격하여 포위한 뒤, 도망치는 잔존 세력은 화포와 헬기를 동원한 공중 폭격으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압박 전투에는 로버트 요크(Robert York) 장군의 지휘하에 베트남군 제7사단에서 헬기의 지원을 받는 3개 대대, 레인저 2개 중대, 민병대 4개 중대, 자경단 4개 중대, 13대의 M-113 탱크, 6문의 105mm 대포, 106mm 박격포 1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말 그대로 최신식 군대와 화력이 투입된 것이다.

1963년 1월 2일 오전 6시 35분, 10대의 미국 헬기가 남베트남군을 실고 압박으로 향했다. 남베트남군 2개 부대는 그 근처를 도보로 수색하면서 남쪽에서 압박에 접근했다. 매복해 있던 베트콩 사령관은 남베트남군이 30미터 안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 공격을 가했다. 이들의 공격에 남베트남군 여럿이 죽고 나머지는 도랑 뒤에 은폐했다. 이때 무장헬기 5대의 호위를 받는 수송헬기 10대가 등장했다. 당시 베트콩은 5대 이상의 헬리콥터를 격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남베트남군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착륙하자마자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집중공격을 가했다. 이때 헬기 15대 중 14대가 피격되었으며 이 중 5대가 격추당했다. 한편 M113 장갑차는 3대가 파괴되고 이 과정에서 미군 3명이 전사했다.

당시 압박 전투에 참전했던 베트콩 측 참전용사 레콴콩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 순간부터 우린 적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 용감하지 않은 자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죠.”

파일:6e063f1f2bede9afaa997c2010329b87.png
파괴된 헬리콥터.

베트콩은 추락한 헬기에서 나오려는 남베트남군을 집중공격했다. 당시 작전을 세웠던 미군사고문단의 밴 중령은 어쩔 수 없이 헬기를 타고 공중을 맴돌다가 남베트남군 사령관에게 무전으로 구조를 위한 APC 지원을 요청했다. 무전을 받은 남베트남군은 APC와 다수의 병력을 압박 쪽으로 보냈지만 논 근처였기에 APC의 이동이 지체되었고, 기껏 압박 지역으로 보낸 8대의 APC와 지원병력들도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장갑차 포수 6명이 사망했다. 밴 중령은 남베트남군에게 남은 지상군을 총동원해서 적들을 동시에 공격하라고 간청했으나 남베트남군 사령관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날 밤 베트콩은 사라졌다.

3. 결과

“압박 전투는 빌어먹을 처참한 전투였다.”
존 폴 밴(John Paul Vann)이 데이비드 핼버스탬에게 한 말
“가장 힘든 전투에서 우리 병사들은 압박 전투를 떠올리며 용기를 냈죠. 소리치고 열광했어요. 적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어요.”
PBS 베트남 전쟁 2화 인터뷰에서 참전용사 레콴콩의 증언
압박 전투는 케네디 행정부에 주의를 환기하는 경고였다. 민족해방전선은 압박에서 병력도, 화력도 열세였다. 미군 항공기의 지원을 받은 중무장한 남베트남 부대는 재래식 전투에서 게릴라들에게 수천 발의 탄약을 퍼부었지만, 그런데도 바보같이 싸움에서 졌다. 이 전투는 사이공의 전쟁 수행 노력에 깊은 문제가 있다는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징후이자 남베트남의 상황이 막 악화하려는 중이라는 경고로 작용했다.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 이데아, 2023, 313쪽.
압박 전투는 남베트남군과 미군사고문단 측의 완벽한 패배였다. 위에 상술했듯이 미군은 군사고문단 3명이 사망했고 헬기 5대가 파괴되었으며, 남베트남군은 최소 80명 이상이 전사하고 부상자까지 합치면 사상자는 수백에 달했다.[8] 그에 비해 수적으로나 화력면에서 열세였던 베트콩 측은 전사 18명, 부상 39명으로 그쳤다. 한때 응오딘지엠의 열혈 지지자였던 미고문단출신 인사인 조셉 버팅어는 이 전투를 2,500명의 남베트남군이 200명의 베트콩에게 패배한 졸전으로 책에 기록하기도 했다.

파일:20190101_114221.jpg
압박 전투 관련 북베트남 우표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의 상황을 하노이에서 지켜보던 호치민이나 레주언을 비롯한 북베트남 측에게 남베트남 정권이 내재적으로 허약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됐다. 압박 전투를 통해서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3.1. 왜 이렇게 못 싸웠나?

어르신들이 흔히 '남베트남군은 포병한테 돈을 줘야 화력지원을 해주더라'라는 썰을 푸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남베트남군의 형편없는 전투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이 처음부터 이렇게 막장 군대라고 보긴 어렵다. 8년 전의 남베트남군은[9] 사이공 전투에서 숫적인 우위를 잘 활용하며 베트콩보다 훨씬 훌륭한 훈련과 무장을 받고[10] 사이공 건물을 방패로 삼을 조건까지 갖춘, 압박 전투에서의 베트콩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적 빙쑤옌군을 갈아드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싸우던 남베트남군이 왜 고작 8년 뒤에는 이런 오합지졸이 되었는가?[11]

남베트남군의 이러한 추락은 본질적으로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실책이 크다.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 지역의 명성 있는 독립운동가들 중 유일하게 무장투쟁 경험, 그러니까 군사적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치적 동맹들과의 협치를 거부하고 측근정치를 펴는 독재자였는데, 이 두가지가 환장할 시너지를 만들어내며 남베트남군의 능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일단 55년~56년의 종교파 숙청으로 캄보디아 국경지대와 메콩강 삼각주 지역의 지역 반공 조직과 무력이 날아가면서 베트콩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버렸다. 정규군도 능력보다는 충성심 위주로만 등용하면서 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군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다 잘 아는 정치 동맹들조차 숙청해버린 지엠이 작전에 무리하게 간섭하면서 상황이 더더욱 나빠졌다. 응오딘지엠의 간섭에 시달리던 남베트남 장교들은 결국 많은 작전을 어영부영 진행하거나 서류상으로만 진행했기에 좋아한 건 베트콩뿐이었다.

응오딘지엠이 살아있던 1963년 10월 17~18일 메콩강 삼각주에서 베트콩과 남베트남정규군 사이에서 벌어진 쯔엉티엔(Thương Thiện)과 록닌(Lộc Ninh)에서의 전투는 제2의 압박전투였다. 이는 7대 1이라는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처참하게 패배한 사례였다.[12]

응오딘지엠이 1963년 11월 쿠데타로 실각하고 살해된 후인 1964년 빈지아 전투,1965년 동 쏘아이 전투에서는 레인저.해병.공수부대를 포함한 남베트남 정규군이 역시 베트콩에게 갈려나갔다. 즉 남베트남군의 졸전은 응오딘지엠이 있을때는 가문 중심 족벌 전시행정 때문에, 지엠이 사라지자 아예 통일된 구심점이 사라진 수뇌부의 보신주의와 군벌화 때문에 속빈 강정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이전에 응오딘지엠의 이러한 군사적 실정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은 59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북베트남 측에서 정식적으로 군사적 충돌과 일제 봉기를 지시하지 않은 채[13] 고립된 잔존세력 소탕작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4. 기타

압박 전투를 다룬 매체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 복무했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영화 '크레모아(A Bright Shining Lie, 1998)'가 있다.[14] 영화상에서도 자신의 명령과 충고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무능함을 보이는 남베트남군 사령관에게 존 폴 밴이 실망하는 모습이 나온다.


[1] 존 폴 밴이 작전을 지휘하며 사용했다.[2] 사상자를 총 200명 이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472를 참조[4] 프랑스-베트남 전쟁[5] 1956년에 마무리된 토지개혁은 정부측 입장에선 성공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2백만 에이커(8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2백만 이상의 농민 가족에게 분배되었다. 마을에서 토지를 독점했던 향신 계급의 오랜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고, 빈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되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최소 13,000~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처형당했고, 북베트남 경제가 크게 악화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말이다.[6] 그리고 남베트남의 반공 민족주의자들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베트민들과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종교파다.[7] 장갑차가 결정적이었다. 베트민 잔존병들은 이렇다 할 대전차화기가 없었고, 있다고 해도 충분하지 못했다.[8] 윤충로 교수는 닐 시핸의 저서와 버체트 등 다수의 저서들을 인용하면서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이 400~45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고, 이 중 13명은 미국인이었으며 6대의 헬기가 추락했고, 15대가 파손되었으며 3대의 M-113 탱크가 파괴되었다고 논문에 썼다. 즉, 숫자상 10배가 넘고 미군의 지원으로 최신식 화력을 가진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에게 참패했다는 얘기다.[9] 정확히는 베트남 공화국군이 아닌 베트남국 국군이다. 물론 이미 사이공 전투 개전 시점에서는 혁명이 완료되어 친불 수뇌부가 제거되고 찐민테와 응우옌타인프엉이 군권을 장악한 상태기에 극초기의 베트남 공화국군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10] 당시 바이비엔이 이끌던 사이공계 빙쑤옌은 바오다이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사이공의 지하경제권을 장악하여 예산 압박도 없었고 프랑스와도 화해하여 프랑스군의 지원도 받았기에 거의 베트남국 정규군에 준할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11] 근데 사이공 전투의 남베트남 쪽 지휘관은 기존 베트남국군 출신이 아닌 일본군에게 훈련받고 프랑스와 베트민 상대로 싸우며 경력을 쌓은 찐민테 였기에 과연 순수하게 당시 남베트남군의 전술적 역량이 이 정도 수준이나 되었다고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물론 찐민테 암살 직후 인계를 받은 베트남국군 출신 장교인 즈엉반민이 별 탈 없이 잘 인계를 받고 싸웠긴 했으며, 전술적 역량과는 별개로 당시 남베트남군 병사의 사기와 훈련도가 꽤 훌륭했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12]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472[13]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월맹은 국제 여론전을 통해 남베트남이 56년 총선을 받아들이게 해 전쟁 없이 '남부 해방'을 이룩한다는 방침이었다[14]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기자였던 '닐 시핸'이 쓴 책인 '밝게 빛나는 거짓말(A Bright Shining Lie)'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