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인 야율융서의 작중 행적 문서.2. 작중 행적
2.1. 2회
예고편처럼 광기에 찬 모습이 아니라 차분한 모습으로 나온다. 노환으로 죽어가는 모후 승천태후를 보살피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오른 자신을 위해 섭정하면서 몸소 전장에 나가 요나라의 영토를 넓힌 모후의 활약[1]을 거론하며, 이제 자신이 그것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소배압이 고려가 요에 공순하지 않고 송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꺾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이에 동의하며 어머니께서 서방정토로 떠나시기 전까지 항하(갠지스강)의 모래알 중 한 알을 찾을 정도로 어렵다고 해도 반드시 침공의 명분을 찾아내라고 명령한다.[2]2.2. 4회
현종의 책봉을 요청하는 고려 사신이 도착하자, 지금껏 고려 국왕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건강하다더니 갑자기 병으로 훙서(薨逝)했다는게 무슨 소리냐며 사정을 소상히 고하라고 압박하고, 사신의 해명을 듣고서도 믿을 수 없으니 제대로 알기 전까진 책봉을 허락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그 와중 승천태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단 자리를 파하고 사신은 고려로 복귀한다.явцгаая. (얍츠가이 : 가자.)
이후에도 여러차례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책봉을 요구했으나 이를 보류하다가 결국 고려에 앙심을 품은 여진 부족을 통해서 고려 내의 정변이 발발한 사실을 전해듣고, 태후의 3년상을 중단하고[3] 사신을 보내어 강조의 처단과 고려 정벌을 목적으로 40만을 이끌고 남하하겠다고 선전포고하기에 이른다.[4]2.3. 5회
이후 고려를 향해 대군을 이끌고 직접 남하하면서 고려에 선전포고 하는 사신 역할을 마치고 돌아온 한기의 보고를 듣는다. 강조를 배짱이 두둑한 자로 평한 뒤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라 평한다. 이후 소배압으로부터 병사들이 동경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첫번째 정벌이니만큼 만반의 준비를 다하라고 명한다. 이후 직접 말을 타고 압록강을 건넌 뒤, 누가 선발에 나설 거냐 하문하고 야율분노가 나서자 점령한 곳의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한다.
2.4. 6회
흥화진이 2일을 버틸 때까지는 짐짓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며 급할 것 없다는 태도로 사령관 역할을 맡은 야율분노를 다독였지만, 흥화진의 고려군이 무려 7일을 버티자, 생각대로 안 되어서 심기가 뒤틀렸는지[5] 야율분노를 꾸짖으며 내일까지 접수 못하면 흥화진 성벽에다 수급을 던져넣겠다며 화를 낸다.
2.5. 7회
결국 인간방패를 앞세웠음에도 흥화진을 함락시키기 못한 것에 분노하여 야율분노를 처형할 기세였지만, 소배압이 "만약 여기서 선봉장을 참하신다면 흥화진에서의 패전의 무게가 더욱 커질 것이나, 아무렇지 않게 여기신다면 그 무게 또한 가벼워질 것"이라고 고언하여 분노를 겨우 가라앉히고 냉정함을 되찾는다.[6] 그리고 소배압의 조언에 따라 흥화진을 포위할 병력을 남겨둔채 남하하여 통주 삼수채에 진을 친 강조의 본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하는데, 그러면서도 "어머니께서는 등 뒤에 적을 두지 말라고 했다"고 말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이후 고려군과 대회전을 벌이기 전날 밤, 군영을 순시하면서 소배압에게 "분전하시오"라며 독려하는 데, 후방의 봉화를 보고는, 왜 뒤편에서 불이 보이는 거냐며 소배압에게 묻는다. 이에 소배압이 "흥화진 쪽에서 봉화를 탈환하여 올린 것 같다"고 보고하자, "또 흥화진이오?"라며 뒷목 잡을 듯한 표정과 함께, "저 손바닥만한 성이 자꾸 나를 분노케 한다"며 부르르 떤다.[7]
2.6. 8회
야율분노의 기습으로 사로잡은 강조를 포함한 고려의 장수들에게 거란의 신하가 되라고 권유했으나[8][9], "도끼나 휘두르는 야만인의 신하로 남느니 고려의 백성으로 죽겠다"는 강조의 말 중 거란을 야만족이라고 칭한 것에 격분하여 "야만... 야만...?!" 하며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직접 도끼로 강조를 찍어 죽인다. 그것도 한 번에 찍어 죽이는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도끼를 사용해서 난도질해 죽인다.[10][11] 원작에서는 야율융서는 죽으면서도 절조를 지키는 강조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야율융서를 더 잔혹한 인물로 각색하여 강조를 직접 처형하는 장면에서 살점이 찍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나오고 피가 야율융서 본인의 얼굴과 고려 무장들에게까지 튀고 야율융서가 눈을 희번득하게 뜨며 살기를 내뿜는 등 상당히 잔인하게 연출되었다.[12] 대신 처형을 당한 강조를 제외한 이현운 등의 다른 장수들은 포로가 된 후 성종의 요구에 굴복하여 거란의 신하가 된다. 이렇게 통주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뒤 항복한 고려 장수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한편, 소배압이 적의 수급을 3만 조금 넘게 베었다고 보고하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첫 승리라며 소배압과 야율분노를 포함한 장수들을 치하한다.[13]
2.7. 9회
사신으로 찾아와 현종의 친조를 청한 강감찬의 말에 속아넘어가 청을 들어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14][15] 그렇게 친조를 청한 고려 국왕에게 자신을 직접 만날 것을 요구한다. 강감찬은 친조를 청한 고려의 백성 역시 이제는 황제 폐하의 신민이니 만큼 약탈도 금지해달라고 청하자 야율융서는 그것 역시 받아들여 병사들에게 타초곡을 금하고 포로들에게도 따뜻한 음식을 먹일 것을 명한다.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는 찰나, 고려의 사신을 믿지 않았던 소배압이 강감찬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승전의 소식을 정한 사신을 며칠간 거란 군영에 머물게 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옳다고 청하자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서경을 오늘 밤 안으로 항복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강감찬과 함께 한기 등을 보내지만, 한기와 강감찬 등이 정해진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자 고려의 늙은 신하와 어린 군주가 합을 맞춰 자신을 기만한 것인지 강력하게 의심하며 서경을 함락시키기 위해 출정할 것을 소배압에게 명령한다.2.8. 10회
서경의 항복 문서를 가지고 온 강감찬을 맞이한 뒤 소배압의 만류에도 서경을 향한 침공을 중단한다. 하지만 이틈에 동북면의 군사가 서경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자신을 속인 강감찬은 군영에서 도망을 간 것을 확인하자 격노한다. 소배압에게 서경의 침공을 다시 명령한다. 한편 서경 공략 장면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서경성 본성이 잘 보이는 중흥사를 장악한다. 다음날 아침 중흥사 불당에서 명상을 하다가 염불을 외우던 승려가 갑자기 단도를 꺼내들고 기습했는데, 미리 눈치챘는지 맨손으로 순식간에 승려를 제압하고 그 목을 졸라서 교살한다. 그 뒤 티저에 나온 것처럼 "고려 놈들은 교활하여 믿을 수가 없다. 고려를 모두 불태워 자신을 분노하게 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고 독백한다. 뒤이어 들어와 황제가 암살당할뻔한 상황을 확인한 소배압에게 서경 공략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채근한 후, 날뛰는 고려군들을 모두 섬멸하라고 경고한다.
2.9. 11회
서경 외곽 사찰에서 전황을 보다가 포로로 잡힌 대도수가 야율융서 앞에 끌려나와 "고려는 절대 야만인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서 야율융서의 역린을 건드리지만, 야율융서는 강조를 도끼로 난도질해 죽인 것과 달리 일부러 대도수를 죽이지 않고, 고려가 대도수의 고국인 발해국처럼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라며 대도수를 도발하고 비웃지만, 여전히 서경이 저항 중인 상황을 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한편 야율분노의 충동질에 넘어가 서경이 완전히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진격을 명해 소배압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16]2.10. 12회
이후 야율분노의 고려 왕을 잡으러 개경으로 가자는 말대로 거란군이 점령한 개경 시내를 가로질러 드디어 고려 황궁에 입성한다. 늘 고려의 신하들이 서있던 대전에 용상 기준 좌측에 거란 장수들, 우측에 한족출신 관리[17]들을 나란히 세워두고 자신은 보란듯이 고려 황제의 용상에 앉는다. 현종의 행방을 찾아내라 지시하지만, 이후 곽주에서 온 전령이 곽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에 신하들이 철군하자는 쪽과 끝까지 고려왕을 추격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려 다투자, 야율융서는 성을 내며 끝까지 고려 왕을 추격해 잡아오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한다.2.11. 13회
개경을 점령하고도 현종을 잡지 못하고, 거점이 없어 고립된 상태에서 병사들의 불만은 쌓여가는 상황에 놓이자 철군을 주장하는 소배압 및 관료들과, 남하를 주장하는 야율분노와 무장들의 입장이 엇갈린 상태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소배압이 거듭 철군을 권하지만, "경이라면 쉽게 철군할 수 있겠냐"며 자존심과 정치적 입지 때문에 철군을 마뜩지 않아 한다. 그리고는 고려를 "늪"이라고 칭하며 조그마한 나라가 자신을 삼키려 든다며 분노서린 독백을 한다. 이후 야율분노로부터 소배압이 군영을 이탈했다는 보고와 함께 강감찬을 포로로 잡아오자, 강감찬에게 "네 놈만 아니었다고 진작 끝났을 전쟁이었다. 네놈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다"며 분노하며 강감찬을 직접 도끼[18]로 내려찍으려 하지만,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야율분노의 만류로 강감찬은 살려놓은 뒤, 소배압을 추궁한다. 그러나 소배압이 처음엔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지 않자, 야율융서는 휘하의 군사들과 대질하겠다고 하는데, 이에 소배압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폐하를 위한 것이니 이번 일은 불문에 부쳐달라고 하며 갈등의 조짐을 보인다.2.12. 14회
침소에 들어있던 중 병사들이 군영을 이탈했다는 보고에 격노하고, 소배압은 군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으니 이제 철군해야 한다고 다시 주장한다. 그러던 중 하공진이 와서 친조의 표문을 전하자 관료들은 화색을 보이지만, 하공진에게 "고려 국왕은 지금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하공진이 멀리 남쪽에 계신다고 답하자, "거란까지 직접 와서 친조를 하겠다는 군주가 왜 개경으로 올 결심은 못하느냐"라고 지적하고 분노하며 하공진을 가두고 남쪽으로 진격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관료들과 소배압은 난감한 표정을 짓지만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포함한 무장들은 오히려 반기는 상반된 반응이 백미.2.13. 15회
일단 야율분노에게 남진을 위해 병사들을 무장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나, 실제로 남진을 해야할지 계속하여 고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란 병사들의 탈영이 이어지는 등 군기가 무너진 상황이고 고려 왕의 입조 약속이라는 명분을 쥔 상태에서 소배압과 관료들의 철군 요구 역시 계속 무시할 수 없기 때문. 소배압을 호출해 남진을 지시하지만, 이 상태에서 무리하게 남진시켰다가 군대를 모두 잃을 순 없다는 소배압의 충언에 격분해 어검을 꺼내 소배압의 목에 겨눈다. 야율융서는 소배압이 고려와 내통하여 거짓 표문을 가져왔다며 질타하지만, 오히려 소배압은 "그 표문마저도 없으면 영영 돌아가지 못하옵니다. 거란의 황제는 일생을 전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이며, 한 전쟁에 모든 것을 걸어선 아니되옵니다"라고 말하면서 무릎까지 꿇고 철군을 요구하자 결국 마음을 돌려 철군하기로 결정한다.
불타는 개경을 뒤로하고 귀주 협곡쪽으로 퇴로를 정해 철군하는 중에 양규가 이끄는 서북면 군사들의 기습을 받아 야율분노가 이끄는 선봉대 1만을 잃고 고려군에 의해 앞뒤로 포위되면서 협곡 안에 갇힌다.[19] 결국 산자락을 타는 것으로 차선책을 선택하지만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서북면 군사들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외려 병사 1만 5천을 잃고, 포로들을 3만 넘게 잃자 격분해 양규를 유인할 덫을 만들라고 명령하며, 반드시 퇴각하기 전에 양규를 죽이고 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실 성종 야율융서로서는 야심만만하게 추진했던 고려 원정을 흥화진에서 초장부터 망치고,[20] (실제로 야율융서 쪽에서 양규의 소행임을 알지는 못하겠지만) 곽주 점령으로 인해 남쪽으로의 진군에 큰 걸림돌이 생겨 철군하는 결과를 선택해야 했으며 이제는 아예 철군길까지 괴롭히고 있는 것이 양규인 만큼 정말로 이가 갈리는 상황이기에 최소한의 자존심으로 자신을 계속 괴롭힌 양규의 목숨이라도 거두면서 압록강을 건너가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2.14. 16회
양규 결사대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은 성공하여 거란 본대가 그들을 포위하였다. 항복하면 거란의 장군으로 삼아줄 것이라 마지막으로 회유해보지만, 양규는 효시로 답을 대신하고 돌격한다. 처음에는 최후의 발악을 즐겁게 구경할 생각이었는지 궁수부대로 제압해야 한다는 소배압의 간언에도 보병 부대 3천을 더 밀어넣으라며 양규의 항전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그러나 양규가 갑옷이 너덜너덜해지고 투구가 벗겨져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거란군을 계속하여 죽이면서 오히려 자신을 향해 효시를 날리는 것을 보면서부터 표정이 변하더니, 소배압의 명으로 투입한 궁수부대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효시를 겨누며 걸어오는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며 "저 지독한 놈..."이라고 진절머리를 친다. 그리고 양규 등의 수급을 챙기겠다는 다짐과는 다르게 양규와 김숙흥 등 고려 전사자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갔다. 결국 압록강을 건너면서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철군하는 것에 허탈해하면서 돌아가는데, 막타로 정성의 흥화진 부대가 또 거란군을 공격했다는 보고에 끝까지 물어뜯는다며 푸념하고 기운 없이 압록강을 건너 거란으로 돌아간다. 앞선 5화에서 자신만만하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던 모습과는 대비되는 장면.2.15. 17회
잠시 철수을 한 이후 소배압과 함께 재침 준비를 상의하는데, 소배압이 지략이 뛰어난 장수에게 맡길테니 이번엔 친정을 하지 말라고 청하자 또 실패해서 제후국들의 웃음거리가 될까봐 그러냐면서 내심 서운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소배압은 군주가 계속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며, 고려는 작은 나라인데 그곳에 두번씩이나 거란의 황제가 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에 납득을 하였는지 이번엔 어떤 명분으로 재침할 것이냐고 묻자 소배압은 고려에서 친조 요청을 약속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를 명분으로 삼으면 된다고 답하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2.16. 21회
지난 17회 이후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친조를 독촉함과 동시에 고려의 사신에게 "너희는 애초에 친조할 뜻이 없었다."면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재침할 뜻을 선포하는 모습이 등장했다. 하지만 전령으로부터 온 급보를 받고 매우 당황하여 정확한 사유는 나오지 않지만 행궁을 다시 상경으로 옮기는 모습을 보인다.2.17. 22회
고려를 침공하겠다고 천령절 사신으로 찾아온 김은부를 참하라고 명하는 식으로 표면적으로 압박을 가하지만, 실제로는 서북 국경의 부족(몽골 부족으로 추정)에게서 반란의 징후가 보이자 그 곳으로 대군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란의 징후가 사실이냐고 반문한 뒤 그 군사들은 고려를 정벌할 군사들이었다고 역정을 낸다. 하지만 소배압이 지금 서북 국경의 부족을 제압해두지 않으면 거란 자체가 크게 분열할 수도 있으므로 고려는 겁만 주고 타협을 해야 한다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인다. 소배압이 군사 3천을 내어 사신들을 위해 고려를 기만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고려는 속임수에 능한 나라로 결코 기만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계한다.2.18. 23회
천령절 하례를 위해 찾아온 각국 사절들에게 연회를 베풀기 위해 초청하는 과정에서 김은부가 도주한 사실을 알게 되고 격분한다. 소배압이 직접 김은부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소배압이 가지 않아도 알아서 압록강을 넘기 전에 잡혀올 것이라며 처음에는 만류하나 소배압이 거란 사신의 협상력을 높이고 고려를 제대로 기만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가는게 낫다고 하자 이에 동의하고 소배압을 보주 내원성으로 파견한다. 이후 발해 출신 병사들과 함께 김은부를 탈출시키기 위해 저항하다 사로잡힌 하공진이 자기 앞으로 잡혀오자 처음에는 이를 용서하고 남경으로 보내려고 하나, 하공진이 '자신은 고려의 신하'라고 선을 그으며 거부하자 "너희 고려인들은 대체 왜 굴복하지 않고,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화가 나 묻는다. 하공진이 여기에 더해 "침략자의 자비는 위선에 불과하다고 힐난하고 그런 짐승의 신하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 받아치자 격분한다.[21]2.19. 24회
고려 사신 김은부를 돌려보내겠다는 소배압의 말에 그를 고려의 동북면, 여진족의 영역에 보낸 것을 언급하며 이번에도 본인을 위해 내통한 것이냐고 묻고, 소배압은 그렇다고 응답하자 사신을 돌려 보내라고 명령한다. 그 후 고려는 언제 칠 수 있느냐고 소배압에게 질문하는데 소배압은 서북쪽 국경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반란의 징후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한 번 역심을 품은 자는 그 마음에 사로잡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에나 고려를 공격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22] 그리고 1014년 또 한번 병사들을 모아서 보내어 고려를 또 다시 침범했지만 이번에도 흥화진에서 막혀 실패한다.[23]2.20. 25회
연이은 국지전에서의 패전에 대하여 한탄할 때에 소배압이 대신 사과하자 군사가 너무 적었는데다가 소배압이 출정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직후 고려를 정복해야 송을 칠 수 있다면서 다시 공격을 빠르게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2.21. 27회[24]
소배압과 고려의 정변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고려는 정변이 자주 일어난다고 비아냥 거렸고, 그에게 이번 정변의 주역인 최질에 대해 질문하자 "강조보다 한참 못한 사람"이라는 소배압의 답을 듣는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승리할 것이라면서 현종을 거란의 포로로 삼아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 계획[25]이다."라고 말하자 소배압도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면 고려의 군사들도 거란의 군사가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친조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일부 군대를 압록강 쪽으로 전진배치했다.[26]2.22. 28회~30화
고려의 현종이 친조를 하러 온다는 소식에 놀라면서 소배압과 의논하여 일단 압록강에 주둔한 군대를 대기시키라 명한다.[27] 이후 시점이 1018년으로 넘어가면서 소배압을 도통으로 삼고 고려를 다시 침공하게 한다. 이때 소배압에게 직접 지휘봉을 하사한 후 우피실군을 포함 최정예 군사들을 총동원하게 하여 모든 권한을 위임한 뒤 반드시 고려를 정복하여 이 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한다. 30화 에서는 자신의 처소로 찾아온 승려들과 만나 이번 전쟁에 관하여 거란과 고려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며 짧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지난 2차 침공과 달리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큰 비중은 없다.2.23. 32회(최종회)
귀주에서 대참패하고 홀로 꿇어앉아 처분을 기다리는 소배압 앞에 등장한다. 예상대로 작중 최대로 격분한 모습으로 들어와 거의 절규하다시피 소배압을 도끼로 내리치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고 도끼를 내던진다. 이후 "고생했소, 가서 쉬시오"라고 음울한 위로 한마디만 남긴 채 허탈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뜬다.[28]
이후 고려가 사신을 통해 압류했던 거란의 사신을 돌려보내고, 그동안 미뤄왔던 국왕 책봉을 요청한다.[29] 당연히 야율융서는 "너희가 이겼고 우리가 졌는데 왜 너희가 우리에게 화해를 청하냐"라며 분개하지만, 이제 거란에게는 그런 감정을 받쳐줄 힘이 없었기에 결국 소배압의 설득으로 전쟁의 종결과 현종의 책봉을 승인하고, 고려 사신이 나간 뒤 얼굴을 구기는 것을 끝으로 등장을 마친다.
[1] 실제로 송태종이 연운 16주를 회복할 목적으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나라를 침공하자 태후 본인이 직접 나서 송군을 꺾었고, 이후에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역으로 공격해 전연의 맹을 체결한다.[2] 항하의 모래라는 표현은 불교에서 자주 쓰는 비유다. 요나라가 대승 불교를 깊게 숭상하는 국가였다는걸 반영한 것.[3] 이 때문인지 출정을 위해 갑옷을 입혀주는 상궁들은 전부 상복 차림이다. 출정 준비의 첫 장면도 그가 상복을 벗어서 내려놓는 장면.[4] 이때 찰갑을 입으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5] 무려 국왕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나왔는데, 첫 관문부터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면서 일주일이나 시간을 끌리고 상대 주력은 아직 만나지도 못했으니 성종 야율융서 입장에서는 망신을 당했다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소배압이 고려군의 저항을 높이 사며 야율분노를 변호하자 소배압더러 변호하지 말라고 꾸짖기도 한다.[6] 참고로 원작의 야율융서는 패전 하나로 장수들에게 분노하는 인물은 아닌데, 통주 전투에서 야율분노의 선봉대가 처음에 고려의 검차진에 당하여 소배압이 퇴각 명령을 내린 일에 대해서도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는 장수에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7] 앞으로 있게 될 일의 포석인듯 싶다. 실제 흥화진을 점령하지 못한 것은 결국 2차 여요전쟁 내내 성종의 발목을 잡는다.[8] 원작에서는 야율융서가 훌륭한 수레진으로 거란군의 공격을 여러번 잘 막아냈는데 패한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고 묻자 전장에서의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생각하며, 패전의 책임은 완벽한 검차진이 뚫릴 리가 없다는 자신의 교만 때문이라고 인정한다. 이에 야율융서는 앞으로 신하로서 공을 세울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고 자신과 함께 천하를 움직여보지 않겠냐고 회유하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거부한다.[9] 추가로 드라마에서는 바로 도끼를 든 후 위협하자 이현운이 배신을 하지만, 원작에서는 부하들이 강조의 용기를 시험하고자 두 다리의 살점을 뜯어내는데, 주저앉아 있던 강조가 이현운의 매국 발언에 분노해 그를 걷어차고 일갈한 후 불상처럼 다시 앉으며 꿋꿋이 입장을 바꾸지 않자 야율융서도 그를 곁에 두고 싶은 사내라고 감탄하면서 한덕양도 강조는 기개가 있는 자이니 더 이상 욕보이지 말라고 청한다.[10] 참고로 원작에서는 같이 있으면 부귀영화가 보장되는데 왜 죽음을 자초하냐면서 병사에게 참수하도록 시키고, 강조는 자신이 만세토록 왕을 시해한 자로 남을지언정 나라의 변절자가 되지는 않겠다고 말한 직후 참수당하는데, 야율융서는 절조를 위해 목숨 따위에 아랑곳하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멋진 기개라면서 고려에 이만한 장수가 또 어디 있겠냐며 그의 마음을 닮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잡혀 온 고려의 지휘관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거란의 신료들도 낯빛이 엄숙해진다.[11] 참고로 본 배우인 이원종과 김혁은 야인시대 이후 21년 만에 같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정작 당시 그들이 야인시대 맡았던 캐릭터들인 구마적과 이정재는 작중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12] 다만 이것도 심의 통과가 가능하게 최대한 수정한 것이 실제 역사에서는 능지형을 가하다가 마지막까지 강조가 회유에 넘어오지 않자 그제서야 죽였으니 그 장면을 그대로 묘사할 순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한국 드라마는 물론이고 매년 넘칠 만큼 사극을 찍어대는 중국 드라마에서조차 능지형은 그 잔혹성 때문에라도 재현한 일이 없다.[13] 평원에서 거란군이 자신있는 회전을 해서 30만의 고려군을 상대로 이긴 이상 모두 섬멸해 저항의지를 꺾었어야 했는데, 기습으로 강조와 일부 수뇌부들만 사로잡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려 절반의 승리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도망가서 살아남은 27만명의 고려군은 훗날에 있을 거란과의 최후의전쟁 에서 대역전의 씨앗이 된다.[14] 처음에는 30만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치렀던 고려가 갑자기 쉽게 항복한다는 사실에 진심인지를 의심했으나, 강감찬의 현란한 말빨에 넘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미 고려의 내막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前 도통부사 이현운이 거란에 전향한 덕분에 야율융서는 강감찬을 믿었어도 소배압이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아 보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15] 후에 묘사되는 것을 보면 주력군이 참패를 당한 상황에서 늙은 관료와 어린 황제가 감히 대국의 황제를 면전에서 기만할 거라는 사실 자체를 생각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6] 소배압은 서경을 거점으로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개경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야율융서는 거점은 곽주 하나로 충분하다면서 자신감을 비친다. 문제는 그 시점에서 야율융서와 거란의 장수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양규와 김숙흥이 이미 곽주를 탈환할 작전을 짜고 출정한 상태라는 점이다.[17] 이현운을 비롯한 통주에서 투항한 고려 장수들도 같이 서 있다.[18] 8회에서 강조를 무참히 내려찍어 살해했던 그 도끼.[19] 이에 소배압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죄하자, 소배압의 잘못이 아니고 고려가 교활한 나라라며 반 쯤 체념한 듯한 반응을 보인다.[20] 2차 여요전쟁 초기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흥화진에서 일주일 가까이 버티자 함락을 포기하고 군대를 우회하여 통주 삼수채에 있는 강조를 공격했다. 성종으로서는 여기서 강조가 이끄는 주력군을 상대 방심을 틈타 와해시킨 덕에 개경까지 남하할 수 있었지 만약 강조가 견고하게 버텼다면 개경은 구경도 못한 채 회군해야 했을 것이다.[21] 결국 다음 장면에서 하공진은 야율융서의 명에 따라 형틀에 묶여진 상태로 산 채로 배를 갈라 간이 뽑히면서 사망하게 되었다.[22] 그리고 이 장면에서 고려의 역심을 품은 장수를 비추는데, 최질의 현재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며 이 시점에서는 고려 내에서도 큰 반란이 일어날 기미가 있다.[23] 야율융서는 2차 침공 당시 '저 작은 성 하나가 짐의 발목을 잡는구나' 라며 흥화진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를 표출했고, 흥화진 옆으로 빠져 다른 곳을 공략해야 했다. 2차 침공 당시 퇴로까지 막으려던 양규와 김숙흥은 이미 애전 전투에서 무자비하게 퍼부운 보병 공세와 화살 때문에 죽었지만, 고려를 지키고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그 이후에도 유지되어 방어 태세가 잘 갖추어졌기 때문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던 것. 정말 본인 말대로 그 작은 성 하나 때문에 침략해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24] 26회에서는 고려 내부에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18-20회와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았다.[25] 실제 역사에서 거란은 고려를 표면상 속국으로 두었지만, 완전히 제후국으로 삼는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거란이 아닌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여몽전쟁 이후 고려를 원나라 왕실에 억류시키면서 공민왕 때까지 '부마국'으로 만들었다.[26] 실제 역사에서도 요나라는 1015년에 압록강 앞에 성을 쌓고 국경을 침범해 흥화진을 공격했다. 사신이 '군사들이 압록강을 넘어오고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한번 흥화진을 공격하고 고려를 침공하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사신을 통해서 고려 조정을 압박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27] 그러나 친조하러 온 다는건 그냥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한 계책이라서 현종은 당연히 거란땅으로 가지 않는다.[28] 고려사절요의 기록에는 야율융서가 소배압에게 '얼굴가죽을 벗겨 죽여버리겠다'는 말과 함께 삭탈관직했다고 적혀 있는데, 소배압이 날린 군사가 황제의 근위대이자 최정예기병인 걸 생각하면 관대한 처분 맞다. 소배압이 단순한 신하가 아니라 자신의 친인척인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말이다. 이후 소배압은 빈왕에 다시 봉해졌다가 그해 사망한다. 작중에서는 분노도 분노지만 허탈하고 우울한 모습이 더 강조되었다.[29]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긴장이 섞인 기색과 태도로 대하던 예전에 비해 당당하고 여유로워진 표정을 짓고 있는 고려 사신을 통해 고려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소배압에게 별도로 보내진 서신에는 상국으로 모시겠지만 재차 고려를 적대시할 경우 송과 연합해 거란을 공격하겠다는, 도발적인 문구가 들어 있었다. 체면치레는 해주겠지만 건들면 다친다고 대놓고 협박을 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