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19:31:52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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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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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모습

梁元錫(일본명:柳川次郎)
1923년 ~ 1991년 12월 12일 (향년 68세)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梁元錫. 柳川次郎(야나가와 지로). 1923~1991. 부산출신의 재일교포이자 야쿠자이다. 생이 파란만장해서 만화나 소설 등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이 제법 있다.

2. 생애

일제강점기 그와 가족은 함께 일본에서 살았는데 2차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혼자만 일본에 남았다. 왜 남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갈리는데 해방후 시모노세키에서 한국으로 출항하는 연락선을 타려던 중 일본 불량배들과 싸움에 휘말려 배를 놓치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단순히 돈벌려고 남았다.. 는 말도 있다.

혼자 일본에 남은 뒤로는 폭력배로서 자신의 오른팔인 타니가와 코타로(강동화)와 함께 야나가와구미를 크게 키워냈다.오사카에서 제법 세력을 떨치다가 고베의 고위 폭력단 야마구치구미의 산하로 들어가 야마구치구미가 전국구로 세력을 떨치는데 앞장 섰다. 특히 이사람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이 기토오 구미와의 100대8 싸움. 8명밖에 안되는 소수의 조직원으로 100명 가까이 되는 기토오 구미의 본거지로 처들어가서 이겨버린 이 사건은 당대의 화제가 되었고, 덕분에 그를 모델로 하는 소설, 만화 등이 많이 나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미화도 많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굉장히 흉악하고 잔인한 야쿠자였기 때문에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1] 특히 한국에서는 그가 재일교포였기 때문에 더더욱 미화되어서 받아들여지곤 했는데, 야나가와구미의 보스로 이권이나 이익을 위해서는 같은 재일동포도 참살해버렸다는 것을 감안하자.

1968년 아이치현 민단에서 폭력단을 축출하기로 하자 민단 지부장 김용환이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 부하인) 최재수에게 피살되었다.[2]

1976년에는 스모선수 타카노하나의 한국 방문을 주선했다. 타카노하나는 미야자와 리에와도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3] 일본 최대의 폭력단 야마구치 구미의 전투군단이 그의 야나가와구미였다. 당시 칼럼에 의하면 키토우구미와 이권다툼을 했고, 메이유카이를 쳐부수는데 앞장섰으며, 관서가 주무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조직폭력단 해체작전인 정상작전의 결과 조직을 해산했는데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본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멋대로 해산하였다 하여 파문되었다. 다만 부하들이 모두 야마구치구미의 직계로 들어가 활약한 걸로 보면 어느 정도 야나가와구미를 희생양으로 해서 겉으로만 해산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게 중론이다.[4] 1988년에는 미야기현 민단 지부장이 되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일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 정부로부터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참고로 해체를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감옥에서 복역 당시에 자신의 딸과 동갑인 15세의 한 재일교포 여학생에게서 받은 "야나가와씨, 재일 동포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아주세요"라는 편지를 읽고나서 해체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때 2대 회장이 된 강동화(일본명 타니가와 코타로)가 처음엔 반발했지만 ‘오야붕이 만든 조직이니 맘대로 해..’하며 울면서 승복했다고.....#

한국 중앙정보부보안사와 연줄이 있었다. 80년대에는 보안사 일본지부장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우익 야쿠자로 활약하면서 조총련 및 북한과 연계하는 좌익들을 견제하는데 힘을 보탰다. 권정달 회고록 중 내용

3. 여담

1975년에는 한국에 TV 100대를 기부했다든가당시 기사,당시 사진.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을 한국 고교야구 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해 돈을 댔다던가... 이런 부분에 대해 폭력배가 쇼를 했다고 볼지, 자기 개인돈까지 털어가며 일했으니 진정성이 있다고 할지 판단은 각자의 몫

최영의와도 친분이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일 때 길거리에서 양원석과 최영의가 시비가 붙었지만 금세 화해하고 이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양원석한테 최영의가 쫄았다'느니 '최영의한테 양원석이 쫄았다'느니 말이 저마다 다른데, 애당초 최영의나 양원석이나 만화, 소설 등에서 미화되고 포장된 부분이 많다보니 진실이 어떨지는 미스테리. 한국에서 나온 양원석 관련 출판물에서는 '알고 보니 두사람 다 같은 한국 출신이라 같은 동포끼리 왜 싸우나 싶어서 금방 화해했다'라고 묘사하기도 한다(대표적인 예가 허영만의 80년대 만화 아스팔트 위의 광풍)

최영의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였던 카지와라 잇키의 자서전적 만화 사나이의 성좌에서도 잠깐 등장한다. 카지와라가 젊은 시절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서 곤경에 처하자, 최영의가 자신의 인맥인 양원석을 통해서 사태를 수습해주었다고.

2002년엔 비디오 영화로 양원석의 일대기를 다룬 '실록 야나가와구미 시리즈'가 제작되기도 했다. 유명 배우 마츠카타 히로키가 출연했다.영화 트레일러


[1] 애초에 야마구치 산하에서 가장 폭력적인 무투파 조직을 이끌었던만큼, 이 사람 손에 죽은 사람의 수만해도 엄청난데다가, 그 과정에서 조직의 이익을 위해 온갖 비열하고 잔인한 습격방법은 다 동원했다.[2] 이 김용환의 동상은 국립극장 근처에 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남산공원에 있다. 독립운동가 김용환 항목 참조. 동상이 있는 건 그가 민단 지도자이자 반공 투사로 유명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3] 이 타카노하나는 앞에 나온 타카노하나의 아들. 아버지 타카노하나(본명: 하나다 토시아키)는 50년생이고 아들 타카노하나(본명: 하나다 코지)는 72년생이다.[4] 실제로 야쿠자조직들은 사전에 조직원과 합의해 겉으로는 파문한것처럼 처리하고, 뒤로는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조직원을 시켜서 살인사건을 일으키고, 해당 조직원이 멋대로 저지른거라며 파문시킨 후, 감옥에 보내놨다가 출소하면 복권시키는 케이스가 가장 흔하다. 정말로 책임을 물려했다면 파문이 아니라 절연을 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