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양회총(梁會鏦) |
이명 | 양회종 |
생몰 | 1919년 12월 30일 ~ 1993년 1월 15일 |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
사망지 | 전라남도 화순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양회총은 1919년 12월 30일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순군에 있는 이서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일제의 민족차별교육과 조선학생에 대한 노역 동원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주도했으며, 일본인 교장을 이서공립보통학교에서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 일로 국내에서 진학이 어렵게 되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소재 정칙중학교(正則中學校)에 입학하였는데, 1937년 7월에 항일의식을 적은 일기장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40여일 동안 구금되었고 동교를 퇴학당하였다.그 뒤 다시 일본 지바현 소재의 메이린(明倫)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에는 항일단체인 <라비트그룹>의 간행물인 '전쟁과 평화'에 항일기사를 기고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여름방학 시기에 귀국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간 구금되었고 1940년 5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이 일로 퇴학당했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43년 9월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내로 송환되어 소집영장을 받았지만 이에 불응하기로 결심하고 신분증을 변조한 뒤 일본으로 밀입국해 고향 후배인 박진철(朴眞哲)의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44년 5월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성도회(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약했다. 성도회의 활동은 한인 학생들을 상대로 민족독립사상을 고양시키는 것과 학병지원 반대 등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된 회원을 통하여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폭탄제조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활동은 1944년 9월 일본 헌병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체포된 후 시부야(澁谷) 헌병대로 끌려가 2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1월에 스가모(巣鴨)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그 후 귀국한 그는 광주서중학교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으며, 이후 여수고등학교·광주상업중학교(현 광주동성여자중학교)·완도중학교·광주고등학교 등에서 교장을 역임했고 .1963년 4월 2일부터 1968년 10월 20일까지 목포상업고등학교[1] 교장을 맡았으며, 1976년 9월 1일부터 1977년 8월 31일까지 목상고등학교 교장을 다시 맡았다.
이후 전남교육회장, 대한교련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교육장에까지 올랐다.
그후 1993년 1월 15일 화순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양회총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