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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모티머(제3대 마치 백작)

<colbgcolor=#FFC9C7><colcolor=#000000>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Edmund Mortimer, 3rd Earl of March
이름 에드먼드 모티머
Edmund Mortimer
출생 1352년 2월 1일
잉글랜드 왕국 웨일즈 브레컨셔 리스웬
사망 1381년 12월 27일
아일랜드 코크(향년 29세)
배우자 필리파 플랜태저넷[1] (1369년 결혼/1381년 사망)
자녀 엘리자베스, 로저, 필리파, 에드먼드
아버지 로저 모티머
어머니 필리파 몬타구[2]
형제 마조리
직위 제5대 위그모어 남작, 제3대 마치 백작, 제6대 얼스터 백작, 잉글랜드 원수.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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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활약했으며, 곤트의 존과 대적했다.

2. 생애

1352년 2월 1일 잉글랜드 왕국 웨일즈 브레컨셔의 리스웬에서 제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와 초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의 딸 필리파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오들리 남작 존 투셰의 부인인 마조리 모티머가 있었다. 1354년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앨리스 피츠앨런과 약혼했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1360년 2월 아버지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동행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에드워드 3세의 후견을 받았고, 나중에는 위컴의 윌리엄 주교와 윈체스터의 에드먼드, 리처드 피츠앨런의 후견을 받았다. 그는 왕의 아들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특히 장남은 흑태자 에드워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368년 봄 왕의 아들들 중 한 명인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인 필리파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다.

성인이 된 뒤 몬머스, 브렉녹셔, 래드너셔, 슈롭셔, 헤리퍼드셔, 몽고메리셔 등 웨일스 지역의 모티머 가문 영지의 통제권을 획득했으며, 아일랜드 및 이스트 앵글리아에 있는 영지 역시 통제했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의 딸 비올란테 비스콘티와 결혼한 지 5개월 후인 1368년 10월 17일 피에몬테의 알바 시에서 급병에 걸려 사망한 뒤, 아내 필리파가 라이오넬이 아일랜드 내 영지로 삼았던 얼스터 백작령을 인계받았고, 그는 남편의 자격으로 얼스터 백작이 되었다. 이후 그는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행정부를 대표하는 저명한 인물이 되었다. 또한 에드먼드와 필리파의 후손들은 플랜태저넷 왕조 직계가 끊어진 뒤에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선점권을 획득했고, 이 권리는 훗날 모티머 가문의 단절된 뒤 요크 왕조에 계승되었다.

1369년 잉글랜드 원수로 선임된 뒤 흑태자 에드워드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1371년 1월 8일 마치 백작과 얼스터 백작으로서 처음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73년 1월 8일 프랑스에 파견되어 워교 임무를 수행했고, 그해 3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 협약을 엄수할 수석 수호자가 되었다. 1375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축출당한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를 지원하기 위해 브르타뉴로 파견되어 생 마티유 성을 공략했다. 이후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함께 캉페를레를 포위해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1375년 6월 27일 곤트의 존의 주관하에 브뤼헤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전쟁을 멈추게 되었고. 결국 캉페를레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브르타뉴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쓰느라 빚에 허덕였고, 런던 주교와 라티머 남작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그는 캉페를레를 공략하고 약탈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 깊은 반감을 품었으며, 잉글랜드 왕좌에 대한 권리에서 아내와 아들의 경쟁자이기도 한 곤트의 존을 적대했다.

1376년 4월 28일, 의회가 소집되었다. 일명 '좋은 의회'(Good Parliament)로 일컬어지는 이 의회에서, 의원들은 에드워드 3세의 부패한 조언자들, 특히 왕의 정부 앨리스 페러즈를 탄핵하고 왕권에 도전하기로 했다. 곤트의 존은 의회에 참석하기엔 몸이 너무 약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의회에 맞섰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그의 인기는 극히 낮았다. 사람들은 존의 부와 막대한 권력을 미워했고,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비난했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심하게 부패했다고 맹비난한 존 위클리프를 후원한 점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의회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전쟁 수익, 막대한 돈 낭비 및 부패에 대한 비난을 제기했다. 의회는 국왕이 "자신의 비용으로 생활해야 하며" 막대한 세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에드먼드는 이렇듯 당국을 맹비난한 의원들의 대표로서 종횡무진했다.

곤트의 존은 압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왕실 행정부에 대한 조사에 동의했고, 부패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에드먼드는 런던 주교 윌리엄 드 코트니와 함께 12명의 거물로 구성된 위원회의 리더를 맡았다. 여기에 에드먼드의 청지기인 피터 드 라 마레가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피터 드 라 마레의 주관하에, 하원은 에드워드 3세의 정부 앨리스 페러즈를 추방했으며, 고등 법원 직위에서 여러 고위 인사들을 해임했다. 1376년 6월 8일,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곤트의 존은 여계 후손의 왕위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도입하여 고인이 된 형제 라이오넬의 상속인이 왕위를 주장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려 했지만, 에드먼드가 이끄는 하원이 거부했다고 한다. 7월 6일 회기가 끝나기 전, 좋은 의회는 9명으로 구성된 행정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에드먼드도 이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1376년 7월 10일, 의회는 에드워드 3세의 자금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진노한 에드워드 3세는 같은 날 의회를 해산했고, 곤트의 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했다. 존은 의회가 4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내렸던 모든 조치를 무효로 처리해 왕권을 되돌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추방된 신하들을 궁정에 복귀시키기로 했다. 이 중에는 앨리스 페러즈도 있었다. 또한 존은 지난 의회의 의사 결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인사들을 대상으로 징벌적인 정책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왕에게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9명의 영주로 구성된 고문단을 해체했으며, 11월 17일엔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위크햄 주교로부터 세속 재산을 박탈하고 궁정에서 추방하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지난 의회의 의장이었던 피터 드 라 마레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1377년 1월 27일, 곤트의 존은 리처드 왕자와 함께 의회를 소집했다. 일명 '나쁜 의회'(Bad Parliament)로 일컬어지는 이 의회에서는 지난 의회의 결정 대부분을 공식적으로 뒤집었다. 에드먼드는 칼레에서 잉글랜드 원수로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바다를 건너는 동안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해 잉글랜드 원수직을 사임하기로 했다. 1377년 6월 21일,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실제 권력은 리처드 2세의 삼촌인 곤트의 존에게 집중되었다. 곤트의 존은 에드먼드와 화해하기로 했다. 1377년 10월 의회가 소집되었고, 피터 드 라 마레가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에드먼드는 영구 정부 위원회의 회원이 되었다.

1378년 1월 1일, 에드먼드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 규칙 위반을 근절하기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월 20일에는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요새를 점검하는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1379년 2월 14일에는 다른 영주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1379년 10월 22일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되어 갈수록 쇠퇴하던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영지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1380년 5월 15일 아일랜드에 도착한 뒤 아내의 영지를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이스트 얼스터에서는 여러 지역 지도자들의 지원을 토대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지만, 웨스트 얼스터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381년 12월 27일, 먼스터로 가던 중 코크 강 인근에서 감기에 걸려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에드먼드는 1380년 5월 1일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자신의 유해를 위그모어로 옮겨 높은 제단 왼쪽에 있는 위그모어 수도원 가문 공동묘지에 안장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연대기는 그가 코크에 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그의 유해 일부만 위그모어 수도원으로 보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라드너에 토지를 할당하고 연간 2,000 마르크의 연금을 제공하는 등, 위그모어 수도원에 상당한 기부를 했다. 그 때문에, 위그모어 수도원 연대기 작각들은 에드먼드를 무척 온화하고 지혜롭고 관대한 인물로 호평했다. 에드먼드의 후계자인 로저 모티머는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어렸기 때문에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후견을 받았다.

3. 가족

  • 필리파 플랜태저넷(1355 ~ 1378):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 제5대 얼스터 여백작.
    • 엘리자베스 모티머(1371 ~ 1417): 헨리 '핫스퍼' 퍼시와 초혼, 초대 카모이스 남작 토머스 카모이스와 재혼.
    • 로저 모티머(1374 ~ 1398): 제4대 마치 백작, 제7대 얼스터 백작, 제6대 위그모어 남작, 아일랜드 청지기.
    • 필리파 모티머(1375 ~ 1401):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초혼,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재혼, 제5대 베싱의 성 요한 경 토머스 포이닝스와 삼혼.
    • 에드먼드 모티머(1375 ~ 1409): 마치 기사.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다가 오히려 사로잡힌 뒤, 오와인 글린두르와 손잡고 조카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왕으로 옹립하고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2] 초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