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15:42:29

에이드리언 홍 창

파일:adrianhong.jpg
이름 에이드리언 홍 창
Adrian Hong Chang
한국명 홍으뜸
국적
[[멕시코|]][[틀:국기|]][[틀:국기|]][1]
출생 1983년, 서울특별시
학력 예일 대학교 (역사학 / B.A.)
신체 186cm, 100kg

1. 개요2. 생애3. 칼럼4. 여담5. 참조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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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가수스 전략 회사의 전무 이사이자 반 북한 비밀단체인 자유조선의 창설에 관여한 핵심인물.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한 단체인 LiNK와 빈곤층, 정신질환 환자들이 클래식 음악 라이브 연주회를 즐길 수 있게 지원하는 단체인 Street Symphony를 설립했다.

2019년 주스페인 북한 대사관 습격 사건 이후 사건의 주도자인 것과 자유조선의 '수장'이라고 알려져 2019년 3월 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한국, 미국 등의 언론의 취재에 의해 수장격 인물이 아닌 조직 창설에 관여한 핵심인물 정도로 알려졌다.

2. 생애

부모가 멕시코로 선교를 간 사이 멕시코에서 태어나 멕시코 국적을 얻었으며 6살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초, 중, 고, 대학을 졸업한 재미교포다.

2004년 3월 예일대에 재학 중이었던 그 해 예일대에서 개최한 KASCON(미주한인총학생회, Korea American Students Conference)[2]에 참여했다가,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2000년 탈북 회고록 '평양의 수족관'을 읽은 후 북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북한 내부 실상을 조사 중이었던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키 김을 처음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잇따라 시위대를 조직해 참여정부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기권을 비난했다.

학부생 4학년이던 2005년에는 당시 UC 버클리 학부생 이던 한국계 미국인 배우 이기홍을 만나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하는 단체인 '리버티 인 노스 코리아(Liberty in North Korea, LiNK)를 설립했다. 이 때의 주요활동은 북한 인권의 실체를 알리는 일과 북한에 침투해 북한 주민을 탈출시켜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북한 주민 한 명을 탈북시키는데 들었던 비용은 평균적으로 한 사람 당 250만원 정도이며 이 단체는 후원과 기부금으로 팀을 꾸려 북한 주민을 구조하는 일을 이어오고 있다.

2006년에도 에이드리언 홍과 LiNK 동료들은 중국을 통해 북한 주민들을 탈출시키다가 중국 당국에 체포, 수감되었다.

2008년에는 황장엽을 만나 북한 망명정부 수립을 제의했지만, 황장엽은 대한민국이 있는데 무슨 북한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는 망명정부 수립이냐며 거절했다고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주장한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는 서울광장에서 ’북한 인권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입은 검은 테이프로 봉인한 채 침묵 시위를 하였다.

2009년까지 LiNK를 통한 탈북자 구출과 지원을 위해 북한과 중국을 다니다가 성고문, 인신매매, 죽음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의 처지를 이렇게해서는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보다 과감한 활동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LiNK를 떠난다. 이후 2010년 말 중동 지역에서 불붙기 시작한 '아랍의 봄' 운동에서 북한의 미래를 보았는지 2011년부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활동하며 카다피 축출 후 혁명 정부 설립을 도우면서 리비아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중동 고위 인사의 방한을 중개했다. 실제로 카다피 제거 이후 들어선 리비아 혁명 정부의 무스타파 아부샤그르 리비아 부총리가 2015년 3월 홍 창의 소개로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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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정부 때 북한 관련 자문의원으로 국회와 백악관에 자주 불려갔었고, 홍 창 부부는 백악관에서의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초대되었다.

2014년에는 한국에서 스타트업과 사회적 기업에 관한 강연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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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홍은 북한에 6개월 동안 잠입했다 미국으로 돌아와 북한의 현실을 폭로한 수키 김에게 북한에 관련해 의논할 일이 있다고 이메일을 했지만 무엇에 대해서 얘기할 건지 자세한 언급은 꺼렸으며 이후 2020년 11월까지 수키 김과 연락이 끊겼다.

모바일 전송 보안 솔루션 업체인 사일런트 서클의 전략 자문과 신제품 테스트에 참여했던 모양이다. #

2015년부터는 '조선 연구원(Joseon Institute)'이라는 단체의 소장을 맡아 북한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대한 대비책을 연구하고 있다. 조선 연구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북한이 개혁, 혁명, 통일 또는 붕괴의 결과물이든 간에 단기적으로 중대한 전환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미래의 북한이 가능한 한 매끄러운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소개하며, "북한의 변화를 이끄는 어떤 조직들과도 전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내용도 있다.

2017년 1월 김정남과 접촉해 북한 망명 정부 수립과 합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한다. 김정남을 감시하던 북한은 이에 위기를 느끼고, 2017년 2월 13일, 김정남을 암살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TED와 예일 대학에서 선임연구원이었다.

2019년 4월 18일, FBI가 에이드리언 홍의 아파트를 급습했으나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고, 또 다른 자유조선의 구성원이자 김한솔 구출과 2019년 주스페인 북한 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안이 붙잡혔다.

이틀 뒤인 20일, FBI는 다시 한 번 아파트를 수색했지만 에이드리언 홍이나 다른 자유조선 멤버는 찾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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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안 홍의 기소장과 체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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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안 홍의 공개수배서
북한의 암살단을 피해 피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11월 16일, 육성으로 이뤄진 언론 인터뷰가 공개됐다.# 인터뷰는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있는 ‘댈러스 비비큐’라는 식당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3. 칼럼

<영문판> (펼쳐보기)
For a decade, from 1998 to 2007, South Korea pursued a policy of engagement towards North Korea known as the “Sunshine Policy.” Initiated by the late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 Jung and further developed by his successor the late President Roh Moo Hyun, the approach was an embrace of North Korea’s regime, with unconditional aid, direct talks, and rewards in hopes of promoting a softening of the North and political conciliation.

As part of this strategy, in practice effectively one of all carrots and no stick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clamped down on any efforts that might cause offense to Pyongyang, particularly exposure of its abhorrent, unparalleled human rights violations.

From 2004 to 2008, when I served as co-founder and Executive Director of an organization called Liberty in North Korea, we worked to raise awareness of North Korea’s human rights violations and encourage other countries to help improve conditions inside. Throughout Asia, our team members ran underground shelters helping North Koreans escape, and some of the activists (including myself, in 2006) were imprisoned in China for their efforts.

During that time, many North Korean defectors complained regularly about how the South Korean government muzzled their efforts to shed light on their experiences in the North—stories of hunger, torture, public executions, criminal acts by the regime, and concentration camps. Prominent defectors were barred from leaving South Korea to testify in the United States or Europe, even on invitation of the United States Congress, and many spoke of being blocked by the South’s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from organizing, managing newsletters and meeting with foreign media or diplomats stationed in Seoul.

South Korean press and the film industry began portraying North Korea more favorably. In our occasional run-ins with South Korean officials or thinly-masked intelligence agents, some made allusions to the risk we “might” face if we continued our work. Around the world, businessmen and community leaders of Korean heritage told us of heavy pressure from their local Korean consulates to not support the cause of human rights in North Korea, and certainly not contribute financially to the effort. At the time, with no small amount of irony, we faced more opposition and impediment from the government of South Korea than we did from that of the North.

At the time, we faced more opposition and impediment from the government of South Korea than we did from that of the North.

It was a dark and bewildering time—when a democracy forged in blood defended and empowered the most despicable of oppressive regimes.

How did North Korea react to the South’s appeasement Sunshine Policy? During this same time, it clashed with the South Korean Navy (June 15, 1999) and sunk a patrol boat, killing 6 and wounding 18 South Korean Navy men (June 28, 2002). It conducted rocket tests (August 1998), a nuclear test (October 9, 2006), and a handful of missile tests (February 2003, March 2003, July 2006), and actively helped proliferate weapons systems, technology and materials to Yemen, Iran and Libya, among other countries.

President Kim Dae Jung won a Nobel Peace Prize for his efforts to improve relations with the North, which culminated in a historic June 2000 meeting with the then-leader Kim Jong Il. The summit was later found to have been bought with an estimated $500 million dollars in illegal, secret transfers of cash, a greater amount than North Korea’s annual export earnings at the time. One can imagine what North Korea spent that cash on.

With the election of conservative President Lee Myung Bak in 2007, it seemed the days of such madness were finally behind us.

Letting North Korea win now will only strengthen it further. North Korea should not be allowed to continue bending the world to its whim with blackmail and extortion. It must learn that the civilized world does not work this way.


<번역판> (펼쳐보기)
1998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햇볕정책”이라고 알려진 대북 관여 정책을 추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시작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더 확대시킨 이 접근법이란 북한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 직접 대화와 정치적 화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보상이였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남한 정부는 북한의 끔찍하고 비할 데 없이 역겨운 인권침해를 낱낱이 공개하는 등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단념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리버티 인 노스 코리아(Liberty in North Korea, LiNK)라는 조직이 공동 창립자이자 경영자를 맡았을 때 우리는 북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인식들을 제고하고, 다른 국가들이 북한 내부 상황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장려했다. 아시아 전역에서 우리 팀원들은 북한 주민들이 탈북할 수 있도록 비밀 보호소를 운영했으며, 그러다 나와 일부 봉사자들은 그 대가로 중국에 억류되어 수감 생활도 겪었다.

그 기간 동안, 많은 탈북자들은 남한 정부가 그들이 북한에서 겪은 굶주림, 고문, 공개 처형, 정권의 범죄 행위, 강제 수용소에 관한 경험을 알리기 위한 시도들을 저지하고, 재갈을 물린다고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저명한 탈북자들은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미국 의회의 초청에도 증언을 위해 한국 밖으로 출국이 금지되었다. 또한 국정원이 언론을 조작하고, 관리했으며 외신이나 서울에 주재한 외교관들을 만나는 것도 막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한국의 언론사와 영화계는 북한을 점점 미화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가끔 같이 일하던 한국 공무원들이나 국정원 공개요원(백색요원)들은 만약 우리가 하던 일을 계속 한다면 직면할 수도 있는 위험을 암시해줬다.

전 세계에서 한국의 기업인들과 재단의 단체장들은 우리에게 현지의 한국 영사관들이, 북한 인권을 위한 활동에 재정적 지원이나 지지를 하지 말라고, 강하게 압력을 넣고 있다 전했다.

당시, 우리는 북한보다 한국 정부로부터 더 방해와 장애물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 때는 피로 일궈낸 민주주의 정권이라는 곳이 가장 압제적이고, 경멸스러운 정권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어둡고, 말도 안되는 시기였다.

북한은 한국의 햇볕정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같은 시기 동안(1998~2008), 그들은 한국 해군과 충돌하여 함정 하나가 침몰하고(제1연평해전), 한국 해군 6명을 살해하고 18명을 부상입혔다. 그들은 미사일 실험과 핵실험을 강행했으며,또한 예멘, 이란과 리비아 등 국가들에게 무기 체계, 기술 및 재료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대중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 6월 김정일과의 역사적인 만남에서 절정을 달했다. 시간이 지난 후 이 정상 회담은 북한의 연간 수출액보다 더 많은 5억 달러를 불법적이고, 몰래 송금해 “구입” 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이 그 돈을 어디다 사용했을지 상상이 간다.

2007년 보수적인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우리는 마침내 광란의 시대를 떠나보내는 것 같았다.

북한이 지금 얻어가게 놔주는 것(퍼주는 것)은 오직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북한은 더 이상 그들의 변덕을 따르게 세계를 협박과 강탈로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북한은 문명화된 세계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4. 여담

  • 일단 미국에 의해 현상수배된 현상수배범이긴 한데, 현상수배 된 이유가 진짜로 에이드리언 홍 창을 잡아들이려는게 아니고 북한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연막에 불과하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무려 미국의 정보기관이 대놓고 (그것도 국내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몇 년째 못 잡고 있다는게 말이 되냐는 것. 사실 실제로도 이 부분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것이, 상술한 2020년 11월의 육성 인터뷰는 뉴욕타임 스퀘어에 있는 식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진짜로 미국 정부가 그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있다면 저런데서 언론사와의 만남을 갖는 것 자체가 제 발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수준의 위험한 짓이 된다.

    따라서 미국은 에이드리언 홍 창과 자유조선을 혹시나 급변할 수 있는 북한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책으로 놔두되, 그렇다고 아예 아무런 조치를 행하지 않으면 북한을 자극할 수 있으니 표면적으로는 현상수배범으로 놔둔다는 것. 아무리 미국 입장에서 북한이 적성국이라지만 그 이전에 자유조선이 한 짓은 엄연히 테러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쨋든 일단은 현상수배는 해줬다는게 사실상 정설이다.(...)

5. 참조

6. 관련 문서


[1] 2021년 2월 7일자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멕시코 국적임을 전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멕시코 국적이지만 미국에 거주한다고 나와 있다.[2] 1987년 시작했고 미국 내 300여 개 대학의 한인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의제를 다루는 컨퍼런스. 2004년의 의제는 북한인권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