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54:01

열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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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의미3. 문제점4. 관련항목

1. 개요



조선 시대에 남편을 위해 절개를 지키거나 희생적인 삶을 산 여인, 즉 열녀를 기리고자 세운 기념문이다. 보통 민간인도 받았지만 주로 사대부 여성을 기리는 비문이 많았다.

2. 의미

조선 시대에서는 유교, 그 중 성리학을 중요시하였다. 성리학에서는 강조하는 것이 단 세 개였는데, 그것이 , , 열()이였다. 그 중, 열을 지킨 여인을 열녀라고 하며, 돈 많은 집안은 열녀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며 마을에 열녀문을 만들어 열녀를 기렸다.

대다수는 성리학적 예법을 직접적으로 학습하고 따랐던, 사대부 여성을 기준으로 자주 세워졌다. 일단 평민들은 열녀가 되기엔 관련 사상이 미약했을뿐더러, 서로 빈부분을 채우며 살아가던 조선 사회에서 지조 하나 지키자고 생계적인 면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쉽게 열녀가 되지 않았다.

3. 문제점

열녀문이 세워지면 세금이 면제되고 혜택이 늘어난다는 점을 악용하여 멀쩡한 사람을 죽여놓고 열녀로 둔갑시켜 비석을 세우는 일들이 벌어졌다. 과부는 자살을 강요하거나 아예 직접 죽여버릴 정도였다. 자살을 강요받는 것이 두려워 먼저 자해를 한 경우도 있었는데 주로 손가락을 잘랐다. 문제는 개인이 아닌 마을 단위로 일어났었던 것. 현대로 치환하자면 보험 사기를 위해서 명예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밝혀질 경우에는 처벌 수위가 매우 셌다. 단순 살인의 정도를 넘어 임금과 조정까지 속인 기군망상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례들이 밝혀질 경우에는 조정에서는 그 지역의 열녀비는 취소하고, 주범은 사형에 수령도 고을을 교화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책임지면서 파직되며, 고을의 등급까지 강등시키는 등 매우 강력한 처벌을 내렸다. 특히 조선 시대의 고을 등급 강등은 거주민들의 처우 악화와 수령 파직을 동반했기 때문에 더더욱 강력한 처벌이었다.

4.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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