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11 18:09:42

영수 전투

영수 전투
靈壽戰鬪
Battle of Lingshou
시기 기원전 389년
장소 위나라 중산령 영수일대
(오늘날의 허베이 성, 스자좡시)
원인 조의 중산령 확장욕구,
조선의 구 연나라령과 영수 악씨일족 확보 필요성,
오기의 실각
교전국 조선朝鮮
조趙
위魏
지휘관 상방 공중련†
별부사마 악자
동부군 사령관 서문표
공자 위앵[1]
병력 조군 약 4만
조선군 1만9천[2]

총 5만 9천여 명
위군 1만 7천[3]

총 1만 7천여 명
피해[4] 조군 약 1만 2천여명
조선군 약 2백여명

총 1만 2천 2백여 명 손실
위군 약 7천여명

총 7천여 명 손실
결과 위군 패배, 조나라 상방 공중련 전사, 위나라 동부군 사령관 서문표, 공자 위앵 포로
영향 조선 구 연나라령 및 영수 악씨 일족 확보
위나라와 인질교환 및 관계개선

1. 개요2. 배경
2.1. 조 & 조선의 사정2.2. 위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영수 전투, 1차전 (조 vs 위)3.2. 영수 전투, 2차전 (조선 vs 위)
4. 결말
4.1. 서문표의 항복과 영수개문
5. 전후처리
5.1. 조선과 위의 인질교환5.2. 조나라, 복수를 천명
6. 영향
6.1. 악자의 당주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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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389년 조선, 조의 연합군이 위와 맞붙은 전쟁이다. 흉노의 지속적인 서하령 약탈에 피해가 나오자, 위무후는 오기를 실각시키고 공숙좌를 임명한다. 조나라는 오기가 실각하자 상방 공중련을 총사령관으로 4만의 대군을 일으켜 위 중산령으로 진격, 조선 역시 별부사마 악자와 1만 9천을 동원하여 향한다.

중산령에는 위공자 위앵이 1만 2천과 함께 주둔 중이었고[5] 동부군 사령관 서문표가 5천의 증원을 이끌고 합세하여 요격에 나섰다. 서문표는 능숙하게 조나라군을 격퇴하지만 이어서 조선군이 당도하여 위군은 대패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서문표는 항복요구를 받아들이고 영수를 개문, 조선군은 영수를 점령하고 공자 위앵을 포로로 잡았다.

2. 배경

2.1. 조 & 조선의 사정

조나라는 표면상 삼진연합의 일원으로 위와 우호관계였지만, 국력상 위에게 밀리는 형국이었다. 이전 연나라의 멸망에서도 위나라의 중산령 보호를 위해 위무후는 조열후를 압박하여 무리한 원정을 강행하게 하였다. 이에 상방 공중련은 연을 멸망시킨 신흥국 조선의 등장과 위무후-오기 관계의 악화를 계기로 위나라에 통수를 날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먼저 조선과 밀약을 맻어 조선은 구 연나라령 완성과 영수의 악씨 일족[6]을, 조나라는 업과 대량을 점령하기로 약속한다.

조선은 연나라 멸망 후 강대국 위의 외교적 압력으로 동맹이었던 중산국과 적대를 선언하고, 영수에 있는 악씨 일족이 인질(?)로 잡혀 별부사마 악자의 제대로 된 활용이 어려워졌다. 이때 조나라 상방 공중련이 위무후와 오기의 갈등을 알려주면서 함께 위나라령을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을 한 후 위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흉노에 거금을 주고 서하령을 공격하는 한편, 적대를 선언한 중산국에 물자를 지원한다. 비록 중산국은 조위연합군에 멸망하지만 흉노의 지속적 공격으로 오기가 실각함으로써 위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2.2. 위의 사정

위나라는 재상 전문의 취임에 오기가 불만을 표한 것을 계기로 위무후와 오기의 갈등이 생기게 된다. 위무후는 자신이 임명한 재상에 불만을 토한 오기가 고깝게 보였고, 오기는 일국의 재상을 임명하는 사안에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의 사주를 받은 흉노의 서하령 약탈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왔으며, 결국 위무후는 오기를 두 번이나 수도로 소환하고, 두 번째 소환에서 오기의 서하군 지휘권을 박탈하여 실각시키고 오기의 자리에 공숙좌를 임명한다. 오기가 실각하자 조나라에서 전쟁 준비를 위하여 중모에서 한단으로 수도를 이전하지만 위무후는 업에 주둔중인 서문표를 믿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은 제나라령 아읍을 공격하는 친정을 계획한다.

3. 전투의 전개

3.1. 영수 전투, 1차전 (조 vs 위)

조선과 조의 연합군이 중산령을 목표로 남과 북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동부군 사령관 서문표는 위나라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중산령의 방비에 능동적인 방어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양국의 군이 합류하기 전에 순차적으로 야전을 벌여 적을 각개격파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첫 목표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상대인 공중련이 있는 조군이었다. 비록 공중련의 조군이 위군의 2배였지만, 공중련은 서문표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서문표의 능수능란한 지휘에 조군은 3번의 회전 내내 위군에 제대로 일격을 가하지 못하고 피해만 늘어가는 상황에 놓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사적으로 친해 서로 잘 알고 있으니 의외성이 없어 세세한 병력의 장악도가 피해를 가르는 관건이 되고, 그 분야에서는 서문표가 공중련에게 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초조함을 느낀 공중련은 4차 회전에서 자신이 있는 본대를 포함한 전군을 위군을 향해 돌격시키지만 서문표는 그런 조군의 공격을 맞받아쳐 역으로 조군을 괴멸시킨다. 총사령관인 공중련은 "죽을 때는, 그동한 정리해둔 죽간의 산도 잊고, 내 집의 방에서 편히 죽을 거라 다짐했는데..여기가, 내 끝이구나..." 라 한탄하며 위군의 창칼에 전사한다.

3.2. 영수 전투, 2차전 (조선 vs 위)

공중련을 전사시키고 조군을 격퇴시켰으나, 서문표는 사석상의 친구의 죽음을 씁쓸해할 새가 없었고 서문표의 위군은 쉴틈이 없었다. 재정비가 끝나자마자 조선군이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초전에 두 군은 백중세를 이루었지만, 연나라 정벌 당시에도 활약했던 조선군 지휘관 악자가 전방에 나서서 활약하자 위군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연이은 전투로 지칠 대로 지친 위군은 악자의 활약과 조선군의 맹공에 결국 무너지고 지휘관인 서문표는 중상을 입은 채 조선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4. 결말

4.1. 서문표의 항복과 영수개문

포로로 끌려온 서문표와 그를 본 악자는 서로 크게 놀라했다. 서문표의 입장에서 악자는 바로 친우였던 악양의 딸이었고, 악자의 입장에서는 서문표가 아버지 악양의 둘도 없는 친우였기 때문이다. 서문표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악자가 살아있는 것에 기꺼워하였고,[7] 이에 악자는 더이상 피를 보지 않게 해달라며 항복을 권유하였다. 서문표는 악자의 항복 권유에 동의하며, 영수에 사람을 보내 문을 열도록 한다. 이렇게 영수전투는 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5. 전후처리

5.1. 조선과 위의 인질교환

영수가 점령되고 자신의 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위무후는 분개하였으나 곧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영수를 탈환하려 군사를 보낸들 반드시 탈환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시간이 지날 수록 조선이 인질로 잡힌 딸에게 어떠한 대우를 할지 눈에 보였다. 또한 운이 좋아서 탈환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전력손실이 예상되며 그렇게 되면 현 위나라의 패권은 분명히 흔들리게 된다.

계산을 마친 위무후는 먼저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태자교환을 통한 화평을 제시하였다. 당시 위나라의 국력으로 명백히 한 수 아래인 조선에게 태자교환을 제시하는 것은 과한 선택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위무후는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 조선으로 인해 정세가 꼬이는 것을 막고자 과감하게 양보하였다. 조선측은 위무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화평이 성립, 두 군주의 딸은 서로 상대방의 수도로 보내져 기나긴 인질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5.2. 조나라, 복수를 천명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전투에는 패배하여 재상 공중련과 병력 1만 2천의 손실을 본 조무후는 크게 노하며 위와의 화평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위와 조선의 태자교환이 성립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방이었던 조선이 완전히 위나라 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점령지인 중산령의 영수와 공중련이 생전 약속했던, 구 연나라령 무원과 대를 넘겨주면서 조선과의 동맹을 유지하였다.

6. 영향

6.1. 악자의 당주 취임

영수가 조선령으로 넘어간 후 악자는 아버지 악양을 만나기 위하여 악씨 본가를 찾아갔다. 하지만 악씨 일족 입장에서 악자는 빈말로도 좋게 봐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기에 부녀상봉은 힘들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동행하고 있던 서문표가 "누가 감히 아비와 자식의 상봉을 가로막으려고 드는 거냐! 천륜을 행함을 방해하려고 하는 놈들은 썩 나와라!" 외치며 꾸짖으며 부녀의 상봉을 성사시켰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두 사람만 알겠지만, 이후 악양이 모든 악씨 일족과 서문표를 모아놓고 악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것을 발표하고 서문표를 그 증인으로 삼았다. 나머지 이들이 크게 반발하였으나, 여럿이서 나고 자란 땅인 영수에서 행동한 일족들과 달리 타지인 조선으로 혼자 건너가 장군이 되어 출세한 악자의 능력을 비교하며, 당주의 덕목 중 하나인 유능함을 증명하고 무엇보다도 악자는 자신의 맏이임을 들면서 악자의 차기 당주 임명을 강행하였다.[8]

이로써 영수 악씨는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악자를 시작으로 악조, 악월, 악구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최강의 장수 악의[9]가 조선의 장수가 되어 활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 명목상 중산령 책임자인 얼굴마담이다. 실세는 서문표이고 실제 전투에는 나서지 않고 영수에 있었다.[2] 별부사마 악자 직속병력 5천, 증원병력 1만 4천[3] 서문표 직속 5천, 중산령 주둔군 1만 2천[4]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5] 여담으로 위앵의 모친 위무후 위격의 계승 전 영지도 중산령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의 왕세자 = 프린스 오브 웨일스인 것처럼 위의 계승권자의 영지는 중산령인지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지만, 다이스 판정 결과 그건 아니었다.[6] 별부사마 악자의 가문으로, 당시 영수는 악자의 부친 악양의 영지였다.[7] 서문표는 악자가 죽은 게 중산 공격 당시 선봉이던 자신이 대장 악양을 너무 몰아붙여서 그런 것이라는 죄책감에 10년이 넘은 영수 전투 당시까지도 시달리고 있었다.[8] 사심이 있었냐는 서문표의 질문을 나가기나 하라고 일축하긴 했지만, '평소에 갑옷 입고 다니면서 정곡을 찔리면 화내는 버릇은 여전하다'는 말로 볼 때, 어느 정도 사심은 있던 듯.[9] 다만 악자 등장하던 시절에 판정한 결과 악자의 자식(=악양의 손자)는 아니고, 영수 악가의 젊은이라기엔 좀 노안인 양반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