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5 11:25:19

서문표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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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門豹[1]
생몰연대 미상

1. 소개2. 하백취부 악습 타파3. 최후

1. 소개

중국 전국시대 인물로 위(魏)나라 정치가다. 공자의 제자로 공문십철로도 꼽히는 자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위나라의 군주인 문후(文侯)는 자하를 스승으로 모시고 경전과 예를 배우는 한편 국정에 자문을 구했는데, 자하의 문하생인 이극과 서문표 등은 문후의 중요한 인재로 활약했다.

2. 하백취부[2] 악습 타파

사기 골계열전에 따르면[3] 서문표는 위나라 문후 때 업성(城) 태수가 되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서문표의 이 일화를 굳이 골계열전, 즉 해학과 기지가 뛰어난 인물들을 소개하는 부분에 실을 정도면 한나라 시대에도 서문표의 행동을 매우 '쿨하게' 여겼던 모양. 유교 사상과 상반되는 괴력난신을 타파하고자 일을 벌였다.
진(晉)나라가 분열하고 위나라가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鄴) 땅에 유수(留守) 자리가 비자 모사 적황은 문후에게 서문표를 적임자로 추천했다. 업 땅은 조나라, 한나라 옆에 있던 곳이라 위나라의 중요한 요충지였으나 별로 개발되지 않았다. 서문표가 업에 도착해보니 성안이 한산하고 왕래하는 사람이 적었으며, 민심도 좋지 않았다.

서문표가 장로(長老)들을 불러놓고 백성들의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장로가 말했다.

"하백(河伯)[4]에게 신부감을 바치는 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가난하기도 합니다.”

서문표가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업의 삼로(三老)[5]와 아전들은 해마다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가며, 수백 만전을 거두어 그 중에서 하백에게 신부감을 바치게 하는데 20~30만 전을 쓰고, 그 나머지 돈은 무당들과 나누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 시기가 되면 무당이 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집안의 딸 중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보면 ‘이 처녀가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곧 폐백을 보내 주고 데려갑니다. 처녀를 목욕시키고 새로 비단옷들을 지어 입히고 홀로 머물게 하며 재계시킵니다. 재궁(齋宮)을 물가에 짓고 붉은 장막을 치고 처녀를 그 안에 머물게 합니다. 쇠고기와 술과 밥을 갖추어 먹이고 10여 일을 보냅니다. 그날이 되면 단장을 시키고 시집가는 여자의 이부자리와 방석처럼 만들어 여자를 그 위에 앉힌 뒤 물에 띄워 보냅니다. 처음에는 떠 있지만 수십 리를 가면 물에 가라앉고 맙니다. 예쁜 딸을 가진 집들은 큰 무당이 하백에게 시집보낼 것을 두려워해 데리고 멀리 도망가는 집이 많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 안이 더욱 비게 되어 사람도 없어 더욱 더 가난해진 것이 이미 오래 된 일입니다. 백성들의 속담에 ‘만약 하백에게 신부감을 바치지 않으면 물이 넘쳐 백성들을 빠져 죽게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을 위해 신부감을 바치려 할 때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참석하여 처녀를 전송하겠소이다."

장로들이 모두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하백에게 신부를 바치는 날이 되어 서문표는 강가로 가서 그들을 만났다. 삼로와 아전, 유지들과 마을의 부로가 모두 모이고 이를 구경하러 온 백성들이 모두 2천~3천 명이었다. 무당은 늙은 여자로서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다. 여제자 열명 가량이 따르는데 모두 비단으로 만든 홑옷을 입고 큰 무당의 뒤에 섰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의 신부감을 불러오거라, 내 예쁜지 못났는지 확인하도록 하겠다.”

무당의 제자들이 곧 처녀를 장막에서 데리고 나와서 서문표 앞으로 왔다.

서문표가 그녀를 보더니 무당과 삼로와 부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처녀는 아름답지가 않으니 수고스럽겠지만 큰무당 할멈이 들어가서 하백에게 다시 예쁜 처녀를 구해 다음에 보내드리겠다고 전하여라.”

곧바로 아전에게 명해 군사들을 시켜 큰 무당 할멈을 들어안아 강물에 던져버리게 했다.[6]

조금 있다가 서문표가 말했다. “무당 할멈이 어째서 이렇게 오래 있단 말인가? 제자들을 보내 재촉하게 하라!”

다시 제자 하나를 강물에 던졌다.

또 조금 있다가 말했다. “제자는 어째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 다시 제자 하나를 더 보내 재촉하게 하라!”

또 제자 하나를 강에 던졌다. 서문표가 입을 열 때마다 제자가 하나씩 강으로 던져져서 그렇게 모두 제자 세 명이 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무당과 그 제자들이 모두 여자라 사정을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니[7] 삼로가 번거롭겠지만 들어가 하백에게 알리시오.”

다시 군사들을 시켜 삼로를 강물 속에 던졌다. 서문표는 붓과 같은 비녀를 관에 꽂고 자리에 엎드려 강을 향해 절을 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장로와 아전들과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겁을 먹었다.

서문표는 이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무당과 삼로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다시 아전과 고을 유지를 한 사람씩 하수에 들여보내려고 하였다. 겁에 질린 이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땅에 부딪치니 이마의 피가 땅위에 흐르고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서문표가 말했다.

“좋다, 잠시 멈추고 기다려 보자.”

잠시 후 서문표가 말했다.

“모두들 일어나라.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붙잡고 있는 모양이니 너희들은 모두 마치고 돌아가도록 하라.”

업현의 아전과 백성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후로는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해 신부감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하며 도망쳤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서문표는 곧 백성을 징집하여 12개의 도랑을 파서 강의 물을 끌어서 백성들의 논에 물을 대니 논마다 모두 물이 대어졌다.[8] 당시 백성들은 도랑을 만드는 것이 다소 번거롭고 힘들다고 여겨 하려고 들지 않았다.

서문표가 말했다.

“백성들이란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즐거워할 수 있을 뿐이지 함께 일을 시작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지금 부로와 자제들은 비록 나를 증오하겠지만 100년 뒤에는 부로와 자손들이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도 모두 이 수리(水利) 덕분에 백성들이 부유해 졌다. 12개의 도랑이 황제의 치도(馳道)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한(漢)나라가 세워지자 지방의 수장과 관리들은 12개 도랑의 다리가 황제가 행차하는 길을 끊어서 서로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랑의 물을 합치고 또 치도에 이르는 세 도랑을 합쳐 하나의 다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자 업현의 부로들이 장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서문표가 해 놓은 일이니 어진 사람의 법도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장리들도 결국 이 말을 받아들여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서문표는 업의 현령이 되어 이름을 천하에 알려지고, 그 은택은 후대에까지 흘러 끊어져 끝난 적이 없었으니 어찌 어진 대부라고 일컫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풍몽룡의 [동주열국지]에서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때 업도(鄴都)에 수장(守將)이 비어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적황이 말했다.

"업도는 상당(上黨)과 한단(邯鄲) 사이에 끼어 있어 한나라와 조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땅입니다. 이곳에는 필히 강단있고 정사에 밝은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서문표(西門豹)가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문후가 즉시 서문표를 불러 업도의 수장(守將)으로 임명하였다. 서문표가 업성에 당도하였으나 성안의 거리가 한산하며 왕래하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다. 서문표(西門豹)는 성안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불려온 노인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하백(河伯)이 부인을 취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듣고 말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다! 하백(河伯)이 무슨 방법으로 부인을 맞이해 간단 말인가? 노인장들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로 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장수(?水)는 첨령(沾嶺)에서 발원하여 사성(沙城)에 이르러 동쪽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업도를 지나면서 장하로 이름이 바뀝니다. 하백(河伯)은 맑은 물이 흐르는 장수의 수신(水神)입니다. 하백(河伯)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여 매년마다 여인을 한 명 씩 골라 부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인을 가려 하백에게 보내주면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의 낟알을 잘 여물게 할 수 있도록 비를 골고루 적당히 오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처녀를 보내지 않으면 하백께서 노하여 파도가 일어 인가를 덮쳐 잠기게 합니다."

서문표가 말했다. "이 일은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는가?"

부로가 계속 대답했다. "이 읍의 무당이 하는 말에 따른 것이라 옛날부터 풍속이 물을 두려워하고 있어 누가 감히 무당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매년마다 동네의 호족들과 관청의 하급 관리들이 무당과 같이 모의하여 백성들에게서 수백 만 전의 부세를 걷어 그 중 이삼 십 만 전은 하백의 부인을 찾는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물었다. "백성들이 그렇게 착취를 당하고 있으면서 어찌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노인들이 말했다. "무당은 하백에게 축원을 드리는 일을 주관하고 삼로(三老)와 아전(衙前)들은 비용을 거두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 다녀 수고로움이 적지 않으니 비용으로 나누어 쓴다 해도 그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초봄에 들에 종자를 뿌리는 시기에 무당이 사방의 민가를 찾아다니며 하백의 부인을 구한다고 하면서 제법 미색을 갖추고 있는 처녀를 발견하면 즉시 '이 처녀는 마땅히 하백의 부인으로 보낼 만하다.'라고 말합니다. 그 처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하백(河伯)의 부인으로 보내지 않으려면 많은 재물과 비단을 무당에게 바치고 그러면 무당은 다시 다른 처녀를 별도로 찾습니다. 다시 하백의 부인으로 지명된 처녀의 집이 가난하여 재물과 비단을 주지 못해 면하지 못한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자기의 딸을 무당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무당은 강물 위에다 지은 재궁(齋宮)의 침소 주위에 장막을 친 다음 그 안에 이부자리를 새롭게 장만하고 그 처녀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힌 다음에 재궁의 안에서 묶게 합니다. 점을 쳐 길일을 잡은 다음에 갈대로 엮어 만든 배에 처녀를 태우고 강물 위에 띄어 보냅니다. 처녀를 태운 배는 강물에 떠내려가 몇 십리를 흐르다가 이어 가라 앉고 맙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비용으로 인하여 고통이 적지 않고 또한 딸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의 딸이 하백의 부인으로 점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딸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안이 텅텅 비우게 된 것입니다. "

서문표가 다시 물었다. "그 동안 하백이 노하여 홍수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는가?"

노인들이 말했다. "매년마다 하백에게 부인으로 처녀를 바쳐오고 있는 덕분에 아직까지 하백의 노여움을 사지 않아 홍수의 피해가 없었습니다만, 그 것은 단지 여기 업(鄴) 땅은 지세가 높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라 강물이 덮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년마다 한해(旱害)를 만나 가뭄으로 곡식이 말라죽는 재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이 그리 영험하다 하니 처녀가 시집을 갈 때 내가 마땅히 참석하여 전송하고 백성들을 위해 축원하리라!"

이어서 처녀를 하백에게 바치는 날이 되자 그 노인네들이 와서 서문표를 찾아와 알렸다. 서문표가 의관을 정제하고 의식(儀式)이 행해지는 강가로 나갔다. 고을의 모든 관속(官屬), 삼로(三老), 호족(豪族), 이장(里長), 그리고 마을의 부로(父老) 등이 이미 참석하여 서문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이곳 저곳에 모여 자리를 잡았는데 그 의식을 구경하려고 모인 사람이 수천명이 넘었다. 삼로와 이장 등이 대무(大巫)를 데리고 와서 서문표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대무의 행동거지가 매우 거만하였다. 서문표가 대무를 살펴보니 바로 늙은 노파였다. 소무(小巫)로 여자 제자를 20여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옷차림을 정결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소무(小巫)들은 수건이나 빗, 그리고 향로 같은 것들을 손에 들고 대무의 뒤서 서서 수행하였다. 서문표가 대무를 향해 말했다.

"대무께서 번거롭겠지만 하백의 부인이 될 처녀를 불러와 주시오. 내가 한 번 보리라!"

대무가 제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하백의 부인으로 뽑힌 처녀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서문표가 대령시킨 처녀를 보니 아름다운 옷에 허리에는 하얀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얼굴은 그런 대로 중간 정도는 되었다. 서문표는 대무와 삼로, 그리고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하백(河伯)은 고귀한 신(神)이라 부인으로 바친 처녀는 반드시 그 자색이 아름다워야만 우리의 성의를 고맙다고 할 것이다. 이 처녀의 자색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니 대무는 번거롭겠지만 하백에게 가서 태수의 말이라고 하며 '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다시 날짜를 정해 바치겠습니다.' 라고 전하라!"

서문표가 즉시 수행 군졸들을 시켜 늙은 대무를 들어 강물에 던져버리게 하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서문표가 시치미를 떼고 정중한 자세로 서 있다가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늙은 노파라서 우리의 급한 사정을 전혀 개의치 않는구나! 강물 속의 하백을 만나러 가서 오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돌아와 하백의 뜻을 전달하지 않으니 너희 제자들이 가서 너희들의 대무를 재촉하여 빨리 돌아오라고 전하라!"

다시 군졸들을 시켜 제자 한 사람을 끌고 가서 강물에 던지게 했다. 서문표가 다시 엄중한 자세로 서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다시 얼마쯤 지나자 입을 열어 말했다.

"제자가 물 속으로 들어간지 오래 되었는데 그 역시 빨리 돌아와 보고를 하지 않는구나!"

군졸들을 시켜 제자 한 사람을 끌고 가서 강물에 빠뜨렸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이 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며 군졸들로 하여금 다시 제자 중 한 명을 안아다 강물 속으로 던지게 했다. 모두 대무의 제자 세 명을 던져 물 속에 가라앉게 하고는 다시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하백에게 간 사람들은 모두가 여인네들이라서 나의 말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하백에게 가서 나의 말을 정중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삼로(三老)가 수고를 좀 해 주어야 하겠소! 삼로는 하백에게 가서 나의 말을 분명하게 전해주기 바라오."

삼로가 사양하려고 하자 서문표가 큰소리로 외쳐 꾸짖었다.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빨리 가서 하백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돌아와 그의 뜻을 전하라!"

군졸들이 달려가 한 쪽에서는 밀고 다른 쪽에서는 끌고 해서 삼로가 미처 변명도 하기 전에 강물 속으로 던져버리자 삼로는 강물의 파도 속으로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 혀를 깨물며 괴로워하였다. 서문표가 관에 비녀를 꽂고 자리에 엎드려 강을 향해 절을 하며 공경의 뜻을 표하면서 삼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대략 한 시진[9]을 그런 상태로 있었다. 서문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삼로는 나이가 많아 하백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한 것 같다. 할 수 없이 나이가 젊은 아전(衙前)이나 마을의 호장들이 가서 나의 말을 전해야 되겠다."

아전(衙前)과 호장들이 서문표의 말을 듣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흐르는 땀으로 등을 적시더니 일제히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나온 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아전(衙前)과 호장들은 땅에 엎드린 채로 결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서문표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잠시 더 기다려보기로 하겠다."

하백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였다. 시간이 한 시진쯤 경과하자 서문표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하수의 물은 도도히 흐르건만 한 번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하백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함부로 민간의 여자를 죽게 만들었으니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겠다!"

아전(衙前)들과 호장(豪長)들이 다시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자기들이 지은 죄의 용서를 빌었다.

"원래 이것은 모두 죽은 대무가 사기를 친 것이지 우리들이 지은 죄가 아닙니다."

서문표가 말했다. "대무는 이미 죽었으니 이후에 다시 하백이 부인을 맞이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중매를 서게 하여 하백에게 보내 고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과거의 죄를 물어 아전(衙前), 호장(豪長) 및 삼로(三老)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들에게 착취당한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 주도록 했다. 다시 마을의 부로(父老)들을 시켜 백성들 중 나이가 찼으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람들을 소무들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무속(巫俗)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렸다. 잘못된 무속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고 도망친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때 서문표가 땅을 판 곳이란 유래가 있는 서문거(西門渠)란 지명이 실제로 있다.

단순한 미신타파를 강행했다면 작은 사회의 특성상 갑툭튀한 이방인이 자신들의 전통(그게 옳고 그름을 떠나)을 파괴하려 한다는 거부감이 들 것이다. 즉, 저런 의식을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하면서, 현실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방식으로 미신을 타파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후에 조조전예가 크게 존경하고 통치에 있어서의 역할모델로 삼았다. 전예가 죽을 때 남긴 유언은 "서문표와 같은 길을 걸었으니 그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였고, 조조가 남긴 유언은 "업(鄴)의 서쪽 언덕 서문표(西門豹) 사당 부근에 묻어달라."였다.

후에 진짜로 하백이 나타나서는 처녀를 바치지 않는다고 괘씸하게 여겨 마을을 쓸어버리려 했으나 에게 화살을 맞고 물러났다는 이야기도 있다.[10]

보통은 아무런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면 무당과 결탁한 지역토호들에게 몰래 숙청당하는 일이 있겠지만, 서문표는 당대 위나라의 왕 문후와 문후의 스승인 자하의 제자라는 뒷배가 있기 때문에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서문표가 자신들의 행동을 대놓고 막으려 들지 않고 표면적으로는 따르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런 행동을 예상치 못하고 방심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3. 최후

그러나 한비자 중 '난언' 편에서 불행을 입은 현인들의 사례를 열거하는 중 '복자천과 서문표는 다투지 않았는데도 사람의 손에 죽고' 라는 언급을 하고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끝이 좋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 성이 西門으로, 복성이다.[2] 河伯娶婦, 하백이 아내를 맞다.[3] 단, 서문표 이야기는 사마천이 아니라 한선제 때 사기를 수정보완한 학자 저소손이 쓴 것이다.[4] 하수(河水, 황하의 옛 이름)의 신의 이름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부친으로 나오는 강의 신(혹은 물의 신)이 바로 하백이다.[5] 중국 진한시대(秦漢時代)부터 있었다는 관리의 직함으로 진은 향에 삼로를 두었으며, 한은 향 이외에 군과 현에도 삼로를 두었는데, 향민 중에서 유력자를 임명하여 지방사회의 교화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한반도의 고대국가인 옥저와 동예에도 읍이나 부락의 우두머리를 삼로라 하였는데, 아마도 중국 진한시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삼로는 오히려 잘못된 미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채웠으며 세금과 하백을 장가보내는 비용을 거두고 무당 및 나머지 관리들과 나누어 가졌다.[6]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라 이때 무당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강물 속으로 던져졌다고도 한다.[7] 전승에 따라 무당과 제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아서, 여인들이라 모두 하백과 정분이 나서 시간가는줄 몰라서 등이기도 하다. 제자는 그렇다고 쳐도 미녀만 받는 하백이 뭐 좋다고 70먹은 노파랑 정분이 나냐[8] 이는 당시 수해와 가뭄 등의 재해를 줄이는 것뿐 아닌 서문표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이런 미신을 근절하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수해가 발생한다면 상황상 미신을 없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9] 약 두 시간 정도.[10] 만화로 보는 중국 신화에선 하백이 강을 범람시키려 했으나 수로를 파놔서 홍수로 마을이 쓸려가진 않았다는 이야기와 예에게 눈을 맞는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