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21:30:38

오상서

성명 오상서(吳祥瑞)
이명 오상세(吳祥世)
청호(淸湖)
생몰 ?~1937년
출생지 미상
사망지 만주국 지린성 밀산현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상서는 호가 청호(淸湖)이고 가명이 오상세(吳祥世)였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의 출생년도 및 출생지, 독립운동 가담 이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백종열(白鍾烈)·박영희·김춘식(金春植)·강화린(姜化麟)·최해(崔海)·이운강 등과 함께 김좌진의 초청을 받고 북로군정서에 독립군 장교로 임명되어 사관양성소의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9월 9일에는 사관양성소의 제1회 졸업생 298명을 졸업시켜, 보병 1개대대가 편성되자 김사직(金思稷) 대대장 지휘아래 김규식, 홍충희, 김창수 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김좌진 휘하 제4중대장으로서 백운평, 갑산촌, 어랑촌, 천수평 등지에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청산리 전투 후 연해주-만주 국경지대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조직되자 즉시 가담했고,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갔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탈출하여 만주로 귀환했다. 1925년 3월 김좌진, 김혁(金赫) 등이 북만주 영안현에 신민부를 조직하자, 그는 여기에 가담하여 제2대대장에 임명되어 백종열(白鍾烈)·문우천(文宇天)·장종철(張宗哲)·박두희(朴斗熙)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했다.

또한 신민부에서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게 되자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이 임명되었으며, 그는 박두희·백종열 등과 함께 교관으로 독립군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또한 지린성 육군사관학교 학생단장을 역임했으며, 1926년에는 대한독립군단 위원 및 신민부 경호대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에는 지린성 자위군 대대장 및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 군정위원 등을 맡아 만주사변을 단행하여 만주를 장악한 일본 관동군과 맞서 싸웠으며, 강국모(姜國模) 사령관 휘하에서 중국구국군 사령 이두(李杜)의 협조를 받아 대한구국의용대를 조직하여 일군과의 유격전을 계속했다. 1936년 대한구국의용대를 대한혁명당(大韓革命黨)이라 개칭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했다. 그러나 1937년경 중국 지린성 밀산현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상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