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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독립운동가)

파일:박영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
경원(景遠)
정헌(靜軒)·검추(劒秋)
본관 함양 박씨[1]
출생 1896년[2] 12월 28일
충청남도 부여군 공동면 중리
(現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3] 곡부마을 137번지)
사망 1930년 (향년 34세)
러시아 연해주 고루지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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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6년 12월 28일 충청남도 부여군 공동면 중리(現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곡부마을 137번지)에서 아버지 박동익(朴東翼, 1868. 1. 11 ~ 1931. 1. 6)과 어머니 한양 조씨(1863. 3. 5 ~ 1916. 3. 22)[4]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여군에서만 700~800석 재산이 있는 지방 유지였고, 한성부 또한 자주 드나들어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노량리(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앞에 집이 있을 정도였으며, 시흥군 상북면 구로리(現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도 토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아버지 박동익은 1902년(고종 39) 내부 주사(內部主事)를 역임한 관료 출신이기도 하다. 출생 이후 첫째 작은아버지인 진사[5] 박동한(朴東翰, 1873. 11. 11 ~ 1894. 9. 14)에 입양되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고향 마을에 있던 신명의숙(信明義塾)에 입학해 졸업했다. 졸업 후 상경해 휘문의숙에서 수학하다가 1915년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신명의숙 재학 시절 스승이었던 이세영[6]이 활동하던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고, 졸업 후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겸 학도감에 취임했다. 1919년 8월 7일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가 창설되자 서일·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김규식(金奎植)[7]·이범석 등과 함께 주요 간부로 참여했고, 그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백종렬(白鍾烈)·오상서(吳祥瑞)·이운강(李雲岡)·최해(崔海)·강화린(姜化麟)·김춘식(金春植)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입대했다. 이후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8]에 북로군정서 부설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립해 교관 겸 훈육부장, 학도단장(學徒團長)에 취임했고, 1920년 4~5월 사이에 이경상(李京相)에게 북로군정서 가입을 권유하는 등 사관생도를 모집해 단기교육을 실시하는 데에 힘썼다. 1920년 7월에는 독립군총사령 김좌진의 부관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연성대장(鍊成隊長)으로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올렸다.

이후 관동군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1921년 6월 27일 일어난 자유시 참변 이후 무기를 구입해 길림성으로 되돌아왔다. 1922년에는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1924년 1월 대한독립군단에 입대해 이범윤·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강화했다. 1924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진영을 재정비, 재조직하게 되면서 행정부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대한독립군단 부관장에 취임했다. 1925년 2월에는 3.1 운동 6주년을 기념해 길림성 길림현(吉林縣)[9]에서 등사판의 선포문을 작성해 국내에 있던 국민협회 등에 배포해 군사교육의 확립, 식산흥업의 촉진, 민족의식 향상을 위한 문화보급 등을 강조했다.

1925년 3월 길림성 연길도 영안현(寧安縣)[10]에서 김좌진 ·남극(南極)·최호(崔灝)·(劉賢)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단 대표로서 신민부 조직에 참여해 보안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민병제를 실시하고 출전을 기다리는 휘하 장병들을 훈련했으며, 계몽사업을 전개하고 군인의 질적향상을 위해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목릉현(穆棱縣)[11]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한 뒤 백종렬과 함께 교관에 취임해 청년 군인 500여 명을 양성했다. 한편, 1924년 9월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해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 해림보(海林堡)[12]에서 활동하던 초대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암살하고 하얼빈시에 있던 조선인민회 지부를 습격해 와해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진입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공작을 추진해 이중삼 등으로 구성된 특수공작대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1927년 8월 국내에 잠입해 함경남도·함경북도·강원도·경상남도·경상북도·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의 작전지도를 작성하고 일본 제국 육군 주재소 위치 등을 파악했다.

1926년 4월 김좌진의 명령으로 항일운동의 군자금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김해창(金海昌)·주영진(朱榮鎭) 등과 함께 러시아 제3국제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어 소련 공산당과 접촉을 취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1927년 러시아 첩보기관인 국가정치국(GPU)에 체포되었고,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피살돼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밀직공파(密直公派)-구당공파(九堂公派)-부평공파(富平公派) 29세 희(熙) 항렬.[2] 함양박씨구당·소요당·명헌공파보 상권 499쪽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돼 있다.[3] 함양 박씨 집성촌이다. 배우 박시후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조영식(趙榮植)의 딸이다.[5] 1891년(고종 28) 증광 진사시에 3등 354위로 입격했다.[6]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시영(李始榮)으로 기재돼 있으나, 이시영은 관직생활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회영 등 형제들과 이미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망명했으니 이는 명백한 오기이다.[7]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과는 동명이인이다.[8]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둥광진(東光鎭) 스리핑촌(十里坪村).[9]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10]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11]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12]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