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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1870)

파일:이세영(1870).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유흠(李維欽), 이세구(李世求)[1]
좌현(佐顯)
고광(古狂)·천민(天民)
본관 덕수 이씨[2]
출생 1870년[3] 5월 29일
충청도 아산현 이동면 구휴동
(現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신휴3리 구부엉골마을)[4]
사망 1941년 5월 28일
중화민국 사천성 성도
묘소 중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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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본래는 이순신의 형 율리공(栗里公) 이요신(李堯臣)의 12대손이나, 입양된 후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이 되었다.

이민우 전 국회의원은 7촌 재종숙(再從叔)이다.

2. 생애

1870년 5월 29일 충청도 아산현 이동면 구휴동(現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신휴3리 구부엉골마을)에서 아버지 이민하(李敏夏, 1851. 2. 2 ~ 1950. 2. 9)와 어머니 평강 채씨(1845. 8. 14 ~ 1924. 2. 23)[5]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25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민철(李敏哲, 1844 ~ 1886. 7. 21)에 입양되었으며,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충청도 정산현 관면 관현리(現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 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에 분개하여 그해 11월 홍주부 홍주군(現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나 전라도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의병대에 가담하는 체하면서 몰래 정부측 관리와 내통하여 김복한 등을 체포, 투옥시키면서 의병대가 와해되었다.

그는 이 때문에 홍주부 홍산군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인 1896년에는 황재현(黃載顯) 등과 함께 홍주부 남포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또 다시 실패하였다. 그 뒤 군 주사(郡主事)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906년에는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그의 참모장으로서 활약했으나, 그해 4월 홍주군에서 패하면서 충청남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는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아 황해도 황주군에 유배되었다.

1907년 10월 그는 재령강 연안의 철도(鐵島)로 옮겨졌다가 유배형이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경술국치를 당하고 1912년 임병찬 등이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이세영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 3도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13년 3월에는 함경도·평안도·황해도 3도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만주로 건너가 봉천부(奉天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6]에 있던 신흥강습소 소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1917년 6월에는 소장에 취임했고, 그해 11월에는 신흥중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 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에서 출범하자, 이에 가담하였고 참모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3일에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1921년 11월에는 주만통군부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2년 2월에는 한교교육회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그해 8월 대한통군부 군사부장, 10월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등에 취임하였다.

1932년 3월에는 충칭 신사회(新社會) 부위원장,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민중후원회 간사에 각각 임명되어 활동했다.

1941년 5월 28일 중화민국 사천성 성도에서 별세했다.

[1] #[2] 충무공파 24세 영(永) 항렬.[3] 1869년생이라고도 한다.#[4] # 신휴리 87-2번지에 생가터가 있다고 한다.[5] 채예묵(蔡禮默)의 딸이다.[6]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 광화진(光華鎭) 광화촌(光華村) 제7촌민소조(第七村民小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