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01:51:32

오스카 갬블

파일:Oscar_indians.jpg
오스카 갬블
Oscar Gamble
본명 오스카 찰스 갬블
Oscar Charles Gamble
출생 1949년 12월 20일
앨라배마 주 래머
사망 2018년 1월 31일 (향년 68세)
앨라배마 주 버밍엄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학력 조지 워싱턴 카버 고등학교
신체 180cm / 72kg
포지션 외야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16라운드 (CHC)
소속팀 시카고 컵스 (1969)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0~197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3~1975)
뉴욕 양키스 (1976)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7)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78)
텍사스 레인저스 (1979)
뉴욕 양키스 (1979~1984)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5)

1. 개요2. 선수 시절3. 은퇴 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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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야구선수. 포지션은 외야수와 지명타자였다.

1970년대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저니맨으로 2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펀치력과 준수한 컨택과 선구안을 갖춰 여러팀을 전전하며 가는 곳마다 주전 혹은 준주전급 외야수로 활약했다.

2. 선수 시절

갬블은 앨라배마의 조지 워싱턴 카버 고등학교를 졸업 후 세미 프로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는 당시 시카고 컵스의 스카우트였던 벅 오닐[1]의 눈에 띄었는데, 오닐이 구단에 갬블을 추천하면서 1968년 드래프트에서 16라운드에 컵스의 지명을 받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9년 시즌 말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은 갬블은 시즌 후 딕 셀마와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 백업 외야수로 출전하며 점차 실력을 쌓다가 1972년 로저 프리드와 함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는 이적 첫 해부터 주전으로 활약, 데뷔 첫 100안타와 동시에 20홈런으로 팀 내 홈런 3위를 기록했고 3년간 54홈런과 평균 2할 7푼대의 타율과 8할 초반의 OPS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시즌 후 인디언스가 팻 돕슨을 받아오는 대가로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양키스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거둔 뒤 시즌 후 다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 된 갬블은 1977년 화이트삭스에서 타율 .297 31홈런 83타점 OPS .974로 개인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시즌 후에는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FA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을 맺고 파드리스에서 1년간 뛴 뒤, 다시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되었다가 1979년 시즌 중반 다시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고, 1984년까지 양키스에서 활약한 뒤 198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고향인 앨라배마에서 주로 지내며 뉴욕 퀸스의 유소년 야구 클리닉에 자원봉사로 참여하기 위해 뉴욕과 앨라배마를 오가며 지내다가 2018년 암으로 사망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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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에서도 볼 수 있듯 특유의 아프로 헤어스타일이 트레이드 마크로, 팬들 사이에선 선수시절의 활약보단 이 헤어스타일로 더 회자된다.
다만 갬블은 이 헤어스타일로 인해 양키스 시절에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도 양키스는 메이저리그에서 엄격한 용모 복장 규정이 있는 구단으로 유명한데, 갬블이 뛰던 당시에는 이 규정을 만든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입김이 가장 강력할 때였다. 당연히 스타인브레너 입장에서는 갬블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고, 갬블은 처음 양키스에 왔을 때 머리 정리하기 전까지는 유니폼도 못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2]

양키스 시절에는 언론과 사이가 좋은 몇 안되는 선수였다. 예나 지금이나 뉴욕의 언론은 극성맞기로 유명한데,[3] 갬블은 오히려 자신의 언변을 살려 기자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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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폼이 특이한데, 상체를 거의 땅과 수평이 되도록 굽힌 상태에서 타격을 했다. 본인 말로는 공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그의 아들들도 야구 선수로 활동했는데, 첫째 아들인 션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프로로 뛰었으며, 둘째 아들은 셰인은 대학 야구 선수로 뛰었다.

[1]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타자로, 니그로 리그에서 2번의 올스타에 선정이 되었고 이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2] 은퇴 후에는 머리를 잘랐다.[3] 뉴욕 언론은 종목을 불문하고 악명이 높다. 대표적인 게 뉴욕 닉스의 레전드 패트릭 유잉의 사례로, 유잉을 두고 유잉무용론과 트레이드 루머 등을 양산해 이에 지친 유잉이 닉스를 떠나게 만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