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4 12:03:29

요안니스 쿠르쿠아스

이름 요안니스 쿠르쿠아스
(영어: John Kourkouas, 그리스어: Ἰωάννης Κουρκούας)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동방 제국군 총사령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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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명장. 로마노스 1세 시기에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18년간 아랍 원정을 이끌며 맹활약했다.

2. 행적

아르메니아계 군사 귀족 가문인 쿠르쿠아스 일가의 인물이다. 조부는 바실리오스 1세 휘하의 히카나토이 정예 연대장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로,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수도에서 추방되었고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하지만 연좌제가 적용되지는 않아 가문 자체는 망하지 않았고, 아들 로마노스가 궁중 관리로 발탁된 뒤 가난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로마노스의 아들 요안니스는 아르메니아 테마의 다브리보스 지역에 속한 도케이아(현재 터키 토카트)에서 출생했으며 친척인 크리스토프 주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빠르게 승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의 친구가 되었다.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를 대신하여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후가 섭정하던 시기, 요안니스는 궁전 근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919년 3월 25일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함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하자, 요안니스는 이에 호응해 로마노스에 반대하는 관료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궁전을 활짝 열어서 로마노스 일행이 입성하게 하였다. 로마노스는 조이 황후를 실각시키고 권력을 장악했고, 딸 엘레니 레카피니와 콘스탄티노스 7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조이 황후의 최측근이었던 대 레온 포카스는 이 소식을 듣고 아나톨리아 테마의 크리소폴리스에서 반기를 들었지만 곧 진압당했고, 로마노스는 920년 12월 17일 기어이 황제로 즉위했다.

923년 로마노스 1세는 자신의 집권에 큰 기여를 한 친구 요안니스를 아나톨리아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테오파네스 콘티노아토스(Theophanes Continuatus)에 따르면, 그는 22년 7개월간 이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고 한다. 그는 칼디아의 스트라테고스 바르다스 보이아스의 반란을 빠르게 진압하였고, 동생 테오필로스 쿠르쿠아스를 칼디아 총독에 임명했다. 로마노스 황제는 여세를 몰아 아랍을 상대로 대대적인 원정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926년, 요안니스는 황명을 받들어 동생 테오필로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을 괴롭혔던 멜리테네 아랍 토후국을 공격했다. 그는 아바시니아에서 공세를 펼쳐 아랍군을 수차례 격파하고 멜리테네 요새를 포위하고 수개월간 공격했다. 멜리테네 에미르 아부 하프스(Abu Hafs)가 공물을 바칠 테니 휴전해달라고 애원하자, 그는 황제의 허락을 받고 포위를 풀었다.

927~928년, 요안니스는 아랍의 지배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중요한 요새인 사모사타(Samosata)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드빈(Dvin)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나스르 알-수부키(Nasr al-Subuki) 장군이 드빈을 성공적으로 사수했고, 요안니스는 아랍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자 철수했다. 그 후 카시 왕조의 통제하에 있던 아르메니아 남부 지역으로 진군하여 반 호수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고, 작은 도시인 클리아트(Khliat)와 비틀리스(Bitlis)를 점령한 뒤 모스크의 민바르(minbar : 설교단)를 십자가로 대체하였다. 그 지역 아랍인들은 칼리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오히려 이 요청으로 인해 무슬림들이 그 지역에서 즉시 쫓겨났다.

가장 가까운 제국의 영토로부터 500km 이상 떨어진 곳까지 원정을 갔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이 이전 세기의 방어적인 전략으로부터 공격적인 전략으로 방향을 수정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 기근이 발생했고,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원정이 진행되면서 군대가 차출되면서, 요안니스의 동방군 전력이 약해졌다. 이 때를 틈타 사즈 왕조의 굴람(ghulam : 노예)인 무플리크(Muflikh)와 아제르바이잔의 총독이 역습을 가했고, 요안니스는 패전을 면치 못하고 아나톨리아로 귀환했다. 930년, 멜리아스 장군이 아랍에게 넘어간 사모사타를 공격했지만 아랍 장군 네즘(Nedjm)에 의해 대패했다. 이공격에서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생포되어 바그다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요안니스는 동생 테오필로스와 함께 콸리콸라 토후국의 수도인 테오도시오폴리스(Theodosiopolis: 현재의 에르주룸)를 공격했다. 이때 타오-클라르에타(Tao-Klarjeti : 오늘날 터키 북동부 일부 지역) 왕국(게오르기아 왕국)의 이베리아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국경선 근처에 동로마 제국이 직접적으로 통치를 하려는 것에 분개하여 포위된 도시에 공급품을 제공했고, 동로마 제국 손에 넘어간 몇 개의 작은 도시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 도시들 중 하나인 마스터톤(Mastaton)의 요새가 인도되었을 때, 이베리아인들은 신속하게 아랍인들에게 이 요새를 돌려주었다. 요안니스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아락세스 강 북쪽의 모든 영토를 이베리아 왕 다비트 2세에게 주기로 했다. 그 후 테오도시오폴리스는 포위 공격 7개월 만인 931년 봄 함락되었고, 제국에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928년 멜리테네 에미르 아부 하프스가 사망하자, 멜리테네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포기했다. 동로마군은 이에 보복하여 말리테네의 평원 주변 언덕 위에 둥근 요새를 세우고 그 땅을 조직적으로 황폐화시켰다. 결국 멜리네테 거주민들은 931년 초 공물을 바치기로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동로마 군대의 원정에 분견대를 파견하는 것도 동의했다. 이렇듯 동로마군의 침공이 날로 거세지자, 압바스 왕조가 반격에 나섰다. 931년 3월, 압바스 지휘관 무니스 알-카딤(Mu’nis al-Khadim)이 이끄는 아랍군이 소아시아를 3차례 침공했다. 뒤이어 8월에 타르소스의 아미르 수믈(Suml)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안키라와 아모리움까지 뚫고 들어와서 136,000 디나르(dinar: denarius)의 가치가 있는 포로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요안니스의 동로마군은 이 동안 바스푸라칸(Vaspurakan) 통치자 가긱(Gagik) 1세를 도와주기 위해 아르메니아 남부에 가 있었다. 그 당시 가긱 1세는 아르메니아 지방 군주들을 모아 동로마 군대와 힘을 합쳐 아제르바이잔의 아미르에 대항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기 전 카시 왕조의 영토를 공격해 클리아트(Khliat)와 베르크리(Berkri)를 남김없이 파괴했다. 하지만 무플리(Muflih)가 보복으로 즉각 가긱 1세의 영지를 공격함으로써 가긱 1세는 캬시 왕조의 영토에서 유리한 입장을 견지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캬시 왕조의 영토도 획득하지 못했다. 한편 멜리테네인들은 모술에 있는 함단 왕조에 원군을 청했다. 이에 함단 왕조의 통치자 사이드 이븐 함단(Sa’id ibn Hamdan)이 동로마 군대를 공격하여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사모사타는 방치되었으며, 931년 11월 동로마 수비대는 멜리테네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이드는 무슨 이유에선지 충분한 수비대를 남겨두지 않고 모술로 돌아갔고, 동로마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933년 요안니스의 지휘하에 멜리테네를 침공했다. 이에 아랍의 무니스 알-카딤(Mu’nis al-Khadim)은 포위된 멜리테네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동로마군은 이들을 격파하여 많은 포로를 획득했지만, 포위를 더 이어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934년 초, 요안니스는 또 다시 5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멜리테네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칼리프 알 카히르가 폐위되면서 아랍 세계에서 내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에, 어떤 무슬림 국가도 멜리테네를 구원하지 못했다.

요안니스는 사모사타를 재차 점령하고 멜리테네를 포위했다. 도시의 많은 거주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남은 자들은 934년 5월 19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항복했다. 요안니스는 반란이 일어날 걸 우려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고, 응하지 않는 자를 추방했다. 이로서 멜리테네는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이곳의 비옥한 땅은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요안니스는 뒤이어 936년 사모사타 지역을 정복하고 도시를 남김없이 파괴했다.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다울라(Sayf al-Dawla)는 사모사타를 구원하려 했지만 함단 왕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회군했다.

이후 반란을 진압한 사이프는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여 카르페테 요새를 점령했으며, 요안니스가 급파한 전위대를 격파하고 많은 노획물을 획득했다. 같은 해 동로마 제국과 아바스 왕조는 함단 왕조의 급격한 세력 성장을 경계하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전선이 축소되면서 병력을 집결할 수 있게 된 요안니스는 939년 테오도시오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둔군이 쫓겨나자 즉각 탈환 작전을 감행했다. 비록 사이프의 구원군이 접근하자 철수했지만, 뒤이어 반 호수 주변의 무슬림 토후국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아르메니아 남서쪽 산맥의 아르사모사타(Arsamosata)를 점령했다.

사이프는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마이야피리킨(Mayyafiriqin)에서 출발하여 반 호수 서쪽 15km에 위치한 비틀리스(Bitlis)로 나아가 그곳의 몇몇 요새를 공략하고, 지역 군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뒤이어 테오도시오폴리스 주변의 동로마 영역을 황폐화시켰고, 콜로네이아(Koloneia)까지 침공했다. 결국 요안니스는 그를 격퇴하기 위해 아르사모사타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부이 왕조와 이집트-시리아의 이흐시드 왕조가 함단 왕조를 압박해오자, 사이프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흐시드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요안니스는 941년 여름 아랍 원정을 준비했다.

그런데 941년 루스족이 갑작스럽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당시 동로마 육군과 해군은 요안니스의 지휘하에 아랍 원정에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어서, 수도 주변의 병력은 얼마 없었다. 로마노스 1세는 급히 낡은 배를 끌어모아서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스(protovestiarios: 황제 의상실 담당자로 주요 재정 업무 및 황제 보좌를 담당)인 테오파네스로 하여금 지휘하게 했다. 941년 6월 11일, 테오파네스는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여 루스족 함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루스족 잔여 병력은 비티니아 해안에 상륙하여 시골을 황폐화시켰다. 이에 파트리키오스 직책을 역임한 대 바르다스 포카스가 서둘러 달려왔고, 뒤이어 요안니스의 군대도 도착했다. 바르다스와 요안니스는 루스족을 공격해 수많은 적군을 섬멸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배를 타고 트라키아로 도주하다가 동로마 해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942년 1월, 요안니스는 아랍 원정을 재개했다. 그는 알레포 지역을 철저하게 약탈하였으며, 알레포 인근의 하무스 시를 함락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이때 10,000~15,0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그해 여름, 타르소스의 수믈이 보복 공격을 가하여 국경의 몇개 마을을 약탈했다. 요안니스는 이에 아랑곳않고 가을에 대규모 원정에 착수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요안니스는 약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반 호수 서쪽에 위치한 동맹국 타론(Taron)을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동로마군은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래로 발을 들이지도 못했던 못한 마이야피리킨(Mayyafiriqin), 아미다(Amida), 니시비스(Nisibis), 다라(Dara)를 잇달아 공략했다. 요안니스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굴을 닦기 위해 사용한 뒤 얼굴 형상이 찍힌 천 만딜리온(Mandylion)이 보관된 에데사였다.

요안니스는 942년부터 에데사를 매년 맹렬히 공격하였고, 에데사 주변 일대도 철저히 파괴했다. 943년 동로마군이 에데사를 완전 포위하자, 에데사 주민들은 강화를 요청했다. 요안니스는 모든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그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 만딜리온을 요구했다. 에데사 주민들은 비록 무슬림이었지만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서 초상을 귀한 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의 요구에 난감해했다. 그들은 칼리프에게 직접 문의하겠다면서 칼리프의 지침을 받을 때까지 공격을 유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944년 봄, 에데사 주민들은 칼리프에게서 "그대들을 구할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리스도의 초상을 저들에게 넘겨라."는 답신을 받았다. 이에 주민들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 초상을 요안니스에게 넘겨줬고, 요안니스는 곧바로 엄중한 호위를 붙여 그것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8월 초, 그 초상은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 해안에 도착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테오파네스가 직접 그것을 로마노스 황제에게 보냈다. 8월 15일, 그리스도의 초상은 금문을 통해 수도에 당당히 입성했고, 황궁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요안니스는 뒤이어 비트라(Bithra)와 게르마니케이아(Germanikeia)를 약탈하고 아나톨리아로 귀환했다.

944년 가을, 두 아들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의 이간질에 현혹된 로마노스 1세는 요안니스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직위에서 물러나게 했다. 판테리오스(Pantherios)가 요안니스를 대신하여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944년 겨울 알레포 인근을 공격하던 중 사이프의 급습을 받아 대다수 병력을 상실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노스 1세는 12월 16일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에게 폐위되었고, 945년 1월 26일 콘스탄티노스 7세가 정변을 일으켜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를 몰락시키고 황권을 되찾았다. 요안니스는 946년 초 코스마스와 함께 타르수스의 아랍인들을 상대로 포로 교환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테오파네스 콘티노아토스는 요안니스를 "제2의 트라야누스 또는 제2의 벨리사리우스"라고 칭송했다. 그의 활약은 동로마 제국이 단순히 아랍의 공격을 방어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의 확장 정책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