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했듯 1896년에 창단되었고, 최초 창단될 시기에는 우디네세 체조 & 펜싱 클럽(La Societa Udinese di Ginnastica e Scherma)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축구는 우디네세의 주종목이 아니었고, 체조와 펜싱 선수들의 번외 활동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러던 우디네세가 본격적인 축구클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23년에 이름을 우디네세 AC(Udinese Associazione Calcio)로 바꾸고서부터였다.
1982-83 시즌 6위로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는데 이때 대표적인 선수는 브라질의 스타플레이어 지쿠였다. 그러나 1986년 베팅 스캔들에 휘말리며 1986-87 시즌 승점 9점을 감점당했고 이 때문에 강등을 당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는 세리에 A와 B를 왔다갔다하는 시소 클럽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1994-95 시즌 세리에 B 2위로 승격한 다음 1995-96 시즌부터 현재까지 잔류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세 차례 유럽 대회에 출전했는데 알베르토 자케로니와 루치아노 스팔레티 등의 감독들은 우디네세를 이끌고 UEFA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이 팀을 이끈 1996-97 시즌 우디네세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UEFA컵에 진출했다. 1997-98 시즌에는 유벤투스, 인테르에 이어 클럽의 최고 순위인 3위를 기록했다. 올리버 비어호프가 27골로 득점왕에 올랐다.[3]
꾸준히 UEFA컵에 진출하던 우디네세는 2000-01 시즌 부침을 겪으며 1999년부터 팀을 이끈 루이지 데 카니오 감독이 경질되고 루치아노 스팔레티가 부임해 최종전 끝에 12위로 잔류에 성공했다. 2001-02 시즌은 로이 호지슨과 잠피에로 벤투라가 감독직을 맡았고 이 해에도 우디네세는 15위 엘라스 베로나에 승점 1점차로 앞서 14위로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했다.
결국 2002-03 시즌 시작과 함께 스팔레티가 감독으로 돌아왔고 우디네세는 지난 시즌 강등 위기의 팀에서 단숨에 6위로 도약해 UEFA컵에 복귀했다. 전직 아르헨티나 및 파르마의 레전드 국가대표 수비수 로베르토 센시니, 그리고 모르간 데 산치스 골키퍼가 수비진을 안정화시켰다. 강등된 나폴리로부터 영입한 체코 국적의 마렉 얀쿨로프스키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공격진에는 다비드 피사로가 돋보였다. 2003-04 시즌도 7위로 UEFA컵에 진출했고 빈첸초 이아퀸타가 11골로 활약했다. 스팔레티의 리빌딩이 완성이 된 2004-05 시즌에는 공격적이고 재미있는 팀컬러를 완성했고 삼프도리아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4위를 기록하며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 다비드 디 미켈레가 15골, 이아퀸타가 13골을 넣으며 공격을 이끌었다.[4] 그러나 스팔레티는 우디네세 감독직에서 사임해 AS 로마로 떠났다.
2005-06 시즌 우디네세는 UEFA컵 준우승팀 스포르팅을 제압하고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했다. 파나티나이코스 FC, 베르더 브레멘, FC 바르셀로나와 힘겨운 조편성을 받았다. 첫 경기에서 우디네세는 이아퀸타의 해트트릭으로 3-0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최종전 끝에 베르더 브레멘과 승점이 같은 3위로 아쉽게 탈락했다.[5] UEFA컵에서는 32강에서 프랑스의 랑스를 꺾었으나 16강에서 불가리아의 레프스키 소피아에게 1차전 0-0 무승부, 2차전 1-2 역전패를 당해 탈락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 준결승에 올라갔으나 인테르를 상대로 탈락했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2라운드까지 연승 이후 유럽대항전 병행으로 인한 일정의 혹독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하위권으로 처졌고 17위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리그에서는 11위로 마쳤다.
06/07 시즌은 유럽대항전을 노릴 법 했으나 칼초폴리로 승점을 깎였던 팀들이 상승세를 타면서 순위가 점차 밀린 끝에 10위로 마쳤다. 주축이었던 모르간 데 상치스 골키퍼와 빈첸초 이아퀸타, 설리 문타리가 팀을 떠났다.
07/08 시즌 초반부터 세리에 A에 돌아온 나폴리에 홈에서 0-5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으나 곧바로 유벤투스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유벤투스에 첫 패배를 안겼다. 사미르 한다노비치, 안드레아 도세나, 괴칸 인러, 파비오 콸리아렐라, 안토니오 디 나탈레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우디네세는 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한 끝에 7위로 시즌을 마치며 UEFA컵에 진출했다.
08/09 시즌 9라운드까지 승점 20점을 쓸어담는 돌풍을 일으키며 1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후 11경기 무승(3무8패)의 극심한 하향세에 빠졌고 5연패 수모도 당하면서 순식간에 14위까지 곤두박질쳤다. 30라운드까지 14위였다가 6연승을 거두고 최종전 칼리아리와의 홈경기에서 6-2 대승을 거두며 7위로 마쳤다. 다만 코파이탈리아에서 라치오와 삼프도리아가 결승을 치름에 따라 UEFA컵 진출은 무산되었다. UEFA컵에서는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EPL의 토트넘 홋스퍼, 디펜딩챔피언 제니트 상트페트르부르크 등을 꺾고 8강까지 진출했으나 베르더 브레멘에게 무릎을 꿇었다.
09/10 시즌 콸리아렐라가 나폴리로 떠난 가운데 디 나탈레가 무려 29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으나 팀 성적은 좋지 않았다. 감독을 두 번 교체하는 진통 속에 15위에 그쳤다. 시즌 내내 원정경기 승리가 1승 뿐이었다.
프란체스코 귀돌린 감독이 복귀한 10/11 시즌 유망주 알렉시스 산체스가 기량을 만개하면서 디 나탈레와 위협적인 공격진을 형성했다. 그리고 우디네세는 라치오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4위로 마감하며 6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냈다.
11/12 시즌 맹활약을 했던 12/13 시즌 시작전에 마우리시오 이슬라, 콰드오 아사모아를 같은 리그의 유벤투스로 이적시키고, 주전 골키퍼였던 사미르 한다노비치를 역시 같은 리그의 인테르로 팔아버렸다. 12/13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콜롬비아 국가대표 풀백 파블로 아르메로를 나폴리로 임대[6]시켰다. 위에서 언급된 선수들은 모두 주전선수들이다. 이렇게 매 시즌 이적시장에서 주축 선수들을 내보내서 그런지 시즌 초에는 고전한다. 특히 이는 시즌 초반에 있는 유럽대항전 예선 결과에 영향을 미쳐서 11/12(물론 이때는 아스날을 만났지만), 12/13 시즌 챔피언스리그 모두 조별리그조차 올라가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졌으며, 유로파에서도 변변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팬들은 세리에의 리그 포인트를 깎아먹는 주범이라고 대차게 까고 있다.13/14 유로파리그에서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며 조별리그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10/11 시즌부터 12/13 시즌까지 세 시즌 동안 주장이자 우디네세의 거의 유일한 프랜차이즈 선수안토니오 디 나탈레는 계속 자신 주변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바뀌는 사이에서도 활약해서 많은 축구팬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런 그도 결국 13/14 시즌 이후 퍼지고 말았으나, 전반기에 퍼진 것은 후반기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전반기에 꼴랑 4골밖에 못 넣었으나 후반기에 13골을 넣으면서 되살아났고, 은퇴하기로 했던 것도 번복하였다.
그가 퍼지자 우디네세는 끝내 중위권으로 추락하였고 마지막 희망이던 코파 이탈리아마저도 4강에서 탈락하였다. 끝내 디 나탈레가 시즌이 끝나면 은퇴를 하기로 하였기에 우디네세의 미래는 매우 암담하다. 셀링 클럽 정책을 펼치면서도 챔스권을 유지하였던 것은 정말 디 나탈레의 능력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13/14 시즌엔 선수들을 대부분 지켰음에도 디 나탈레 한 사람의 부진이 이런 성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대하던 공격수 유망주 무리엘이 생각보다 부진한 것도 있긴 하다. 팀 순위를 끌어올리긴 이미 늦었지만 디 나탈레가 살아났고 은퇴를 번복한 것이 우디네세에겐 다행이다.
한때 희대의 낚시선수 네나드 스렉코비치(...) 짤방의 실제 주인공 두샨 바스타 선수가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브라질의 축구스타이자 역대급 공격형미드필더, 축구 역사상 최고의 프리키커라 불리는 지쿠가 잠깐 소속했었던 클럽이기도 하다. 참고로 지쿠는 우디네세 소속 당시 세리에 득점랭킹 2위에 오른적이 있다.
홈구장인 스타디오 프리울리를 종합구장이던 것을 우디네 시로부터 사들여 축구전용구장으로 개축하였다. 이름도 메인스폰서에서 따온 다치아 아레나로 개칭. 이전 구장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아치형지붕을 가진 메인스탠드만 남기고 삼면을 완전 철거후 전용구장화 하였는데 개축된 삼면의 디자인이 유벤투스의 홈구장과 매우 비슷하다. 유니폼도 비슷하고 홈구장까지 비슷해졌다.
세리에A의 대표적 셀링클럽이다. 전세계의 유망주들을 싼값에 영입해 해외각지에 임대를 보내 성장시켜서 클럽에서 주축선수로 쓰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시 빅클럽에 팔아 버린다. 연고지인 우디네의 인구는 10만에 불과하고, 세리에 A의 중계권료 분배가 차등이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에 A의 중소클럽은 높은 주급을 감당하기 힘들다. 매년 시즌이 시작되면 지난 시즌에 활약했던 주전 선수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이유가 이런 클럽 운영스타일 때문이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포르투, 벤피카등과 함께 방대한 스카우터진을 자랑한다.
구단주인 포초 가문은 잉글랜드의 왓포드 FC와 스페인의 그라나다 CF 또한 소유하고 있어 해당 구단들을 우디네세의 위성구단으로 거느려 임대정책을 펼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프리미어 리그의 중계권료가 엄청난 관계로 왓포드가 강등만 당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디네세가 왓포드의 선수공급 기지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을듯.[7][8]
페페 더 프로그의 밈 코인인 apu 코인과 뜬금없이 스폰서 계약을 맺어 24/25 시즌 유니폼 슬리브 스폰서로 지정, 유니폼에 페페의 얼굴이 들어가게 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1] 이 별명은 아무래도 같은 나라의 모 유명 구단이 자주 쓰는지라 잘 안쓰인다.[2]#[3] 득점 2위가 25골을 넣은 인테르의 호나우두다.[4] 클럽 레전드 안토니오 디 나탈레도 이때 강등된 엠폴리로부터 영입되어 리그에서 7골을 넣었다.[5] 홈에서 1-1로 비기고 원정에서 4-3으로 졌다. 우디네세는 파나티나이코스에 2승을 거뒀으나 바르셀로나에 2패를 당했다.[6] 완전이적 조항 삽입[7] 실제로 15-16 시즌을 앞두고 왓포드의 잔류를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으며, 그와는 반대로 우디네세와 그라나다의 전력은 약해졌다. 결국 세리에 하위권과 라 리가 강등권으로 쳐졌다. 이러한 결정의 이유는 EPL의 어마어마한 중계권료 수익 때문이다. 세리에와 달리 여긴 1부리그 중하위팀에게도 중계권비를 꽤 많이 나눠주기에 1부리그에 잔류만해도 엄청난 이익이 생긴다.[8] 그라나다 CF는 2017년부로 가문의 마수에서 벗어나 중국 자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국 왓포드는 2019-20 시즌에 강등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