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애 시뮬레이션

어릴 때부터 만화와 애니로 세상을 배운 될성부른 오타쿠.
터울 많은 누나의 책장에 있던 만화책들로 만들어진 취향이 좀 남다르달까.
덕분에 학창 시절, 사춘기를 직방으로 맞아 날뛰는 호르몬을 주체 못 하는 여느 고딩들과는 다르게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 학창 시절을 빠짐없이 함께 보낸 기태를 짝사랑했다.
과격함이 미덕이고, 서열 싸움이 일상인 남고에서 그런 것에 일체 관심 없는 완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줬으니까.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완이 부르면 미련 없이 달려오는 의리파 겜돌이었으니까, 그래서 졸업식 날 고백까지 했다.
하지만 완의 착각이었을까? 기태가 말하는 '우리'는 아무리 특별해도 우정까지였던 것 같다. 결국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입대를 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하는 게 만화뿐이라 미대를 갔고, 블로그에 연재하던 만화는 영 호응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연명 중이다.
나름 친구들의 연락을 요리조리 잘 피하며 살아있는데 어느 날 면접을 보러 간 게임 회사에서 기태를 다시 만났다.
큰일났다. 7년이 지났는데도 심장이 뛴다. 어쩌면 다시 시작할 기회 아닐까?

컴공과 재학 시절, 각종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던 코딩 천재.
대기업 취직은 프리 패스일 거라던 이야기가 무색하게 현재 대표인 태오와 모바일 게임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게임에 미쳐 있던 기태에게는 당연한 선택일지도.
입력하는 그대로 출력되는 코딩처럼 학교생활도, 사회생활도 막힘없이 잘 살아왔는데 딱 하나 어려운 게 있다면 인간관계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
특히 완이 그랬다. 낭만적이고, 감수성 풍부하고, 세심한 완의 마음속에 뭐가 들었는지, 그 깊이는 또 얼마만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완은 늘 특별 한 친구였고, 완에게는 언제나 졌다.
완이 잠적하고 나서 처음으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화가 났고, 궁금했고, 걱정했고, 배신감을 느꼈고, 보고 싶었다.
그게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을 무렵 완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계획대로 다시 완을 만났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매일 부딪치며 일하게 됐다.
이제 좋아 한다고 말할 차례인데 완은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원래 연애가 이렇게 복잡한 거였나?
이번에는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고, 완과 엔딩까지 가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