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0:44:22

우찬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우찬기
禹瓚基[1]基로 등재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태유(泰有) / 성암(誠菴)
본관 단양 우씨[2]
출생 1861년 9월 2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3]
사망 1921년 11월 5일[4] (향년 60세)
묘소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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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우승기는 그의 4촌 동생이다.

2. 생애

우찬기는 1861년 9월 2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하두(禹夏斗)와 어머니 달성 서씨[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서찬규(徐贊奎)와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성주의 정종호로부터 전달받고는, 자신 또한 영남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같은 문중 사람인 우경동·우성동·우승기·우하교·우하삼(禹夏三)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우찬기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우찬기는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그해 8월 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그러나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을 겪으며 지내다가 1921년 11월 5일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단양우씨판서공파족보에는[2] 판서공파-진사공 홍수(洪受)파 28세 기(基) 항렬.[3]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우경동·우병기·우성동·우승기·우하교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음력 10월 6일.[5] 서영복(徐英復)[6]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