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5:41:30

위버멘쉬

극복인에서 넘어옴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프리드리히 니체
,
,
,
,
,

1. 개요2. 상세3. 원문4. 영웅 숭배?5. 번역명 논란

1. 개요

파일:friedr_nietzsche.jpg
베르너 호르바스(Werner Horvath) 그림
Friedrich Nietzsche - the Three Metamorphoses, 40×50, 2005
위버멘쉬[1](독일어: Übermensch / 영어: Overman)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삶의 목표로 제시한 인간상이다.[2]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할 줄 알아서 고통마저도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외부의 힘이나 절대자에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니체는 인간이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야 된다고 말했지, 매번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밧줄 위에서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즉, 삶이 무기력해서 그 권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필요가 있을 때 그 '나아감'이 본능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 인간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3]

이 말은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해 그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위버멘쉬는 자신이 세운 가치관에 의해 스스로 몰락하는 자다.[4] 동정에 기반을 둔 기존 도덕의 선악과 출발점이 다를 뿐 위버멘쉬는 자신을 제어하는 '자신만의' 엄격한 가치관[5]을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다. 위버멘쉬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를 존중하는바, 이 강력한 자란 자신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루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엄격하고 혹독한 모든 것을 존경하는 자다. 그는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겁 많은 인간, 불안해하는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남에게 아첨하는 인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모든 이를 경멸한다.[6] 다시 말해, 위버멘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라,[7] 도리어 자신을 제어하는 크고 작은 자기 긍정의 엄격함으로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 더 나아가 삶의 필연적인 면마저 어리숙하게라도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것으로써 극복할 줄 아는 건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8]

한국어로는 초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니체가 가리키는 바는 '물리적ㆍ물질적인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그 '창조적[9]인 힘'으로 끊임없이 몰아치는 가혹한 삶의 고통과 허무를 매번 노래하고 춤추는 마음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즉, 삶이 가혹하다고 해서 이상적인 종교나 도덕, 이념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혹하고 불합리한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 심지어 그 고통을 기꺼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자극제로 삼으려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어 그대로 힘이 센 초능력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초인'이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최근에는 아예 원어 발음 그대로 "위버멘쉬"라고 번역하는 추세이다.

2. 상세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천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즐거운 학문』 283절
위버멘쉬란 어원으로 볼 때 '넘어선(über) + 사람(mensch)'을 뜻한다. 즉, (보통 사람을) '넘어선 사람'을 말한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사람의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이의 세 단계로 분류한다. 낙타는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가게 해도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사자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따라가기만 하는 것을 벗어나 반항하기 시작한다. 사자는 종교와 도덕이 하라는 대로 살아라는 용(드래곤)의 강압에 맞써 부정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반항만 할 줄 알 뿐이어서 그것에 고통과 허무만을 느끼지, 그것을 긍정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마침내 아이의 단계에 이르러서 사람은 삶을 놀이로 파악하고 그것을 즐기게 된다. 끊임없는 놀이를 통해 질리지 않고 긍정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여기서 아이의 단계가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된다.[10]

삶에 있어서 절대적 판단은 없다는 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쉽게 말하면 삶은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기독교의 도덕을 비판한다. 또한 기존의 절대적인 모든 가치들을 깨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자리에 자신이 만들고 만들어갈 가치관을 스스로 세워나간다. 즉, 기존 사상이나 견해들이 주장하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가치를 부수고 자신만의 새로운 '옳고 그름(선악)'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 기존 사상과 견해를 넘어서려는 자신만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위험하며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고통이 강해질수록 상대하는 적(사상, 견해)이 강자라는 얘기므로 그 사람은 오히려 강자와 맞서는 자신의 고통을 즐긴다. 즉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기꺼이 삶의 고통을 마주볼 수 있을 정도의 용기를 지닌 자, 그리하여 매번 자신을 '극복하려는 자'를 위버멘쉬(극복한 사람)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없이 제 마음대로 '이게 맞다' '저게 맞다'하는 것은 '극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기존 강자를 넘어서려고 하는 선택'과 '그로 인한 고통마저 충분히 이겨냈을 때' '그리고 '그 고통을 심지어 즐길 때', 니체는 그를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그리고 처음에 서툴렀던 자신의 가치관은 강자들과의 수많은 투쟁을 통해 점차 다듬어지고 발전해 나간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 발휘하고 심지어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자신만의 고상한 가치관(귀족 도덕)이 수립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가치관은 끊임없이 '고상해진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의 가치관과 결국 비슷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선택하고 만들어온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만큼은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할 충분한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져 있는 밧줄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존재다. 우리는 위버멘쉬로 나아가다가도 어느새 겁을 집어먹고 동물 쪽으로 발을 돌리게 되는 나약한 존재다. 위버멘쉬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떨쳐버려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위버멘쉬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벌거벗은 두 사람, 가장 큰 사람과 가장 작은 사람 모두를 보았다 ㅡ 그들은 아직도 서로 너무나도 비슷하다. 참으로 가장 큰 사람조차도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11]

니체는 『유고집』에서 카이사르를, 『우상의 황혼』에서 나폴레옹을 각각 위버멘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조건부 위버멘쉬다. 카이사르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부여될 때에야 비로소 최초의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 나폴레옹도 온전한 위버멘쉬가 아니라, '폭군'(Unmensch; 운멘쉬)과 '위버멘쉬'의 종합이다. 즉, 물리적ㆍ물질적인 힘의 추구로서는 위버멘쉬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위버멘쉬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힘'의 추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니체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인간상은 누구였을까? 학자들에 따르면 니체의 위버멘쉬에 가장 근접하는 인물은 괴테로 여겨진다.[12] 니체에 의하면 괴테는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약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강함에서 나온 관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웠으며 그 자신의 삶을 긍정한 인물이었다.[13]

3. 원문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그대들의 의지가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라고!

내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간곡히 바라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대들에게 초지상적인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섞는 자들이다.

저들은 삶을 경멸하는 자들이고 말라 죽어가는 자들이며 스스로 중독된 자들로, 대지는 저들에게 지쳐 있다. 이런 자들이니 저쪽으로 떠나가는 것을 좋아할지도!

지난날에는 신에 대한 불경이 가장 큰 불경이었다. 그런데 신은 죽었고 신에게 대해 불경했던 자들도 함께 죽었다. 이제 가장 끔찍한 일은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는 것 그리고 저 규명되지 않은 뱃속을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영혼이 육체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는 이 경멸이 최고였지. 영혼은 육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기를, 굶주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영혼은 육체와 대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 바로 그런 영혼 자신이 야위었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며 굶주렸었다. 그러니 그 영혼이 누린 쾌락은 잔인함이었던 거지!

그대 내 형제들이여, 내게 말해다오. 그대들의 육체가 그대들의 영혼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그대들의 영혼 자체가 궁핍하고, 때묻었고, 가여운 안일에 젖어 있다고 하지는 않는가?

진정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더렵혀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인간은 먼저 바다이어야 한다.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바로 그 바다다.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을 수 있는 바다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4]
즉, 위버멘쉬는 종교나 도덕에서 말하는 초지상적인 희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덕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세운 목표와 사명에 따라 살아가며, 그로 인한 자신의 몰락마저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15]

이에 반해 위버멘쉬의 반대말인 '인간말종'은 안락과 평온만을 원하기 때문에 단지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이며, 고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변화, 즉 창조와 동경의 마음은 되도록 멀리하려고 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을 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너무나 성가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모두가 동등해지기를 원한다.[16]

4. 영웅 숭배?

그런데 초인이라는 말은 곳곳에서 극히 순진하게, 차라투스트라의 형상에서 드러나 있는 가치들과는 정반대되는 가치들을 구현한 자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초인은 보다 높은 인간의 '이상주의적인' 전형, 즉 반쯤은 '성인'이고 반쯤은 '천재'인 자로 이해되는 것이다. 다른 엉터리 학자는 초인이라는 말 때문에 나를 다윈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의도하지도 않은 채로 사기를 일삼는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을 내가 그토록 혹독하게 비난했음에도 사람들은 초인이라는 말에서 그러한 영웅 숭배를 읽어냈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17]
니체가 말하는 초인(위버멘쉬)이 영웅이 아니냐는 오해가 많은데, 니체 생전에도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서 니체 스스로 자신이 말하는 '초인'은 결코 영웅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초인(위버멘쉬)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며 그런 자신의 현실을 매번 극복하려는 기질을 의미할 뿐, 국가를 위해서 영웅적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나 인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18] 즉,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물리적ㆍ물질적인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19]

물론, 니체는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 나폴레옹, 카이사르를 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이 말하는 유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니체가 스스로 강조하듯 '심리학자'로서 사용한 말임을 잊어선 안 된다. 즉, 나폴레옹, 카이사르, 체사레 보르자 같은 지배자들의 '착취와 지배'를 말할 때 그것은 심리적인 의미에서 정신의 착취와 지배를 말하는 것으로,[20]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그저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내는 것이 마치 '정신'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21]

그러나 니체 사후 나타난 아돌프 히틀러나치당독일인(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설파하기 위해 니체의 사상을 왜곡해 이를 영웅 숭배론으로 둔갑시켰다. 나치당은 왜곡된 그 사상으로 독일 민족을 위해 영웅적으로 사는 삶을 국민들에게 장려했다. 니체는 독일인(아리아인)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나치는 니체가 독일인을 위버멘쉬라고 하였다고 거짓말을 했고 반대로 나치당이 경멸했던 유대인이나 슬라브인, 집시 및 이들의 혼혈은 운터멘쉬(Untermensch)라고 칭하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치의 의도와는 다르게 니체는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으며 인종을 말하긴 했으나 그것은 민족주의 개념에서 탈피한 '좋은 유럽인'을 양육하기 위한 목적이었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니체가 했던 '위험하게 살아라'는 말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의지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야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치가 주장하는 '민족'이나 '국가'가 시키는 대로 살라는 것과는 반대되는 주장인 것이다.

5. 번역명 논란

“니체는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념과 신앙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생의 의미’는 이 땅 위에 있다고 했죠. 그런데 ‘초인’(超人)이란 번역어는 그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말았죠. 니체는 초월적 존재를 반대했는데 말이죠. 독일어 ‘위버멘시’는 형이상학적 미몽에 쌓인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도 미국에선 ‘수퍼맨’, ‘오버맨’으로, 우리말에선 초인으로 바뀌었어요.” #
한자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초인(超人)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개념이 들어올 때 일본에서 그렇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인 하면 대부분 '슈퍼맨' 같이 엄청난 힘을 지닌 초능력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연유로 해서, 최근 한국에선 독일어 독음 그대로 '위버멘쉬'라고 번역하는 추세다. 다만 위버멘쉬로 번역할 경우, 니체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학문적 객관성이나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어도 독일어를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하지 않는 일반인에게는 낯선 개념일 뿐만 아니라 철학하기의 생활화나 대중화라는 취지에 다소 멀어지는 측면이 있긴 하다.[22] 니체 편집 위원 중 한 명인 김정현 교수도 이를 염려하여 위버멘쉬를 '극복인'으로 번역했다.[23][24] 그럼에도 '초인'이라는 번역이 워낙 강렬하기도 하고, 음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초인으로 번역하는 걸 고수하기도 한다.

결국 어떤 번역이든 간에 니체 철학에서 말하는 '초인(Übermensch)'이 흔히 생각하는 '초인'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유의하며 읽는 것이 중요하다.
[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위버멘슈'로 써야 하지만 '위버멘쉬'로 쓰인 지 오래되어 관용어가 되었다. 학계에서는 거의 대부분 '위버멘쉬'로 쓴다.[2] 방향을 제시한 것이지, 니체는 실제로 매번 인간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위버멘쉬가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건 이상이기 때문에 그러지 못해서 좌절을 하고 그 좌절마저도 긍정할 줄 알자는 얘기다.[3] 따라서 인간은 위버멘쉬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하는 비판자들의 주장은 니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애초에 니체는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도 영원한 강자가 아니다. 강자도 언젠가 몰락하여 약자가 된다. 니체는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살다보면 약해질 때가 오기 마련이라고 말한 바 있다.[4]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그 말 때문에 부서진다. 그러므로 나의 영원한 운명은 다음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예고자로서 나는 파멸하고자 한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자신에게 축복을 내릴 때가 왔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5] 니체는 '기존의 선악'을 공격하면서 '자신만의 선악'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물론 이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들의 가치관은 기존의 선악을 바꿔나가는 원천이 된다. 도덕은 몇천 년의 세월 동안 변화해 왔으며 그 변화는 바로 이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예술가적-엘리트주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6] 고귀한 인간들은 겁 많은 인간, 불안해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 같은 인간, 거지 같은 아첨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말쟁이를 경멸한다. 평민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모든 귀족의 근본신조다. 고대 그리스에서 귀족들은 자신들을 '우리 진실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중략)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롭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을 사물들에게 처음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서 인식한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한 도덕은 자기에 대한 찬미다.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풍요로움의 느낌이 그런 도덕의 전경에 드러나 있다. 고귀한 인간도 불행한 자를 돕지만, 동정에서가 아니라 넘쳐나는 힘에서 비롯된 충동에서 돕는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를 존중하는바, 이 강력한 자란 자신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루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엄격하고 혹독한 모든 것을 존경하는 자다. ㅡ 《선악의 저편》 260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63~364)[7] 위버멘쉬는 스스로에 대해 엄격하긴 하지만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고 긍정하는 사람이다. 즉, 위버멘쉬에 있어서 엄격함은 '자기 비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자기 긍정'을 하겠다는 엄격함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예컨대, 니체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게 만드는 도덕과 종교의 '양심의 가책'을 '병든 것'으로 본다. 반대로 건강한 사람은 이러한 도덕과 종교의 '양심의 가책'에 맞서 자기를 긍정할 줄 알고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가질 줄 아는 자다.[8] 그대들은 내게 "삶은 견뎌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침에는 자부심을 지녔을 텐데도 저녁에는 체념을 해버리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삶은 견뎌내기 어렵다. 하지만 그처럼 연약한 체 하지 말라! 우리 모두는 무거운 짐을 잘도 짊어지는 귀여운 수나귀들이고 암나귀들이니. (중략) 사랑에는 늘 얼마간의 광기가 깃들기 마련이다. 광기에는 늘 얼마간의 이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리고 삶을 좋아하는 내게도 나비와 작은 비눗방울이,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 그런 종류의 인간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볍고 어리숙하지만 사랑스럽고 활발한 그 작은 영혼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런데 내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진지하고 철저하고 깊고 장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중력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중력의 정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죽인다. 자, 저 중력의 정신을 우리가 죽여버리자.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76~77)[9] 여기서 '창조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이제껏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한 결과로 인해 자신만의 특별한 내적 반응을 느낀다는 점에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남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유명한 그림에서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그림에서 특별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그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자신만의 그 느낌이 '창조적'이라는 것이다.[10] 물론 위버멘쉬 개념에서 '즐기는 것'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자의 싸움에서 나오는 고통을 극복했는가가 중요한 포인트다.(물론 극복하면 즐기게 된다. 그런데도 굳이 말한 이유는 '억지 즐김'을 강요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어린아이와 같은 놀이로 긍정함으로써 극복하라는 것이고. 이러한 긍정은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로 이어진다.[1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사제들로부터(von den priestern)[12] 군나르 시르베크, 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 이학사, 2016, p.784[13] Goethe konzipierte einen starken, hochgebildeten, in allen Leiblichkeiten geschickten, sich selbst im Zaume habenden, vor sich selber ehrfürchtigen Menschen, der sich den ganzen Umfang und Reichtum der Natürlichkeit zu gönnen wagen darf, der stark genug zu dieser Freiheit ist; den Menschen der Toleranz, nicht aus Schwäche, sondern aus Stärke, weil er das, woran die durchschnittliche Natur zugrunde gehn würde, noch zu seinem Vorteil zu brauchen weiß. (Friedrich Nietzsche, Götzen-Dämmerung)[14]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1~22[15]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자를. 덕은 몰락하려는 의지이자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한 방울의 정신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의 덕의 정신이기를 원하는 자를. 그렇게 그는 정신으로서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6)[16] 인간말종은 '사랑이라는 게 뭔데? 창조라는 게 뭔데? 동경이라는 게 뭔데? 별은 또 뭔데?'라고 묻고는 눈을 껌뻑거린다. 그러면 대지는 작아져 버린다. 그 대지 위에서는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인간말종이 깡충거리게 되고. 이 종족은 벼룩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말종이 가장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껌뻑거린다. (중략) 여전히 노동을 하지만, 그 노동은 편안하고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저들은 노동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더 이상 가난해지지도 더 이상 부유해지지도 않는다. 둘 다 너무 성가시기 때문이다. 누가 여전히 다스리려고 하는가? 누가 여전히 따르려고 하는가? 둘 다 너무 성가시다. 돌볼 목자는 없고 가축의 무리만 있을 뿐이다! 모두가 동등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동등하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느끼는 자는 제 발로 정신병원에 가기 마련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0)[17]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11~112[18] 여기서 우리는 최근 곳곳에서 설파된 학설, 즉 국가는 인류의 최고 목표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 의무라는 학설의 영향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학설에서 나는 영웅주의로의 후퇴가 아니라 어리석음으로의 후퇴를 인식한다. 국가를 위한 봉사를 자신의 최고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더 높은 의무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너머에 남성들과 의무들이 있는 것이다. ㅡ 내게는 적어도 국가 봉사보다 더 높다고 여겨지는 의무 중 하나는 모든 형태의 어리석음을 파괴하라고, 그래서 여기 이 어리석음도 파괴하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그들의 목적이 국가의 안녕을 넘어서는 남성들, 즉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국가의 안녕과는 상당히 무관한 세계, 즉 문화의 세계와 관련하여. 서로 뒤엉켜 인간의 공동체를 이루는 많은 투쟁 중에서 어떤 것은 황금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황동으로 되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KGW Ⅲ₁)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3, p.424)[19] 니체가 위버멘쉬를 '아이'에 비유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니체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힘의 추구에 대해서는 도리어 강하게 비판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부를 획득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고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력한 자들은!", "보라, 이 재빠른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는 꼴을! 그들은 서로 밀치며 기어오르고, 따라서 서로를 진흙탕과 심연 속으로 끌어내린다. 그들 모두는 왕좌에 오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광기다. 마치 행복이 왕좌에 앉아 있기라도 하다는 듯! 때로는 진흙탕이 왕좌에 앉아 있고, 때로는 왕좌가 진흙탕에 앉아 있다."[20] 진리는 냉엄하다. 이제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고급문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솔직하게 말해보자! 아직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지녔던 인간, 가공할만한 의미에서의 야만인, 또한 아직 불굴의 의지력과 권력욕을 갖는 맹수와 같은 인간들이, 보다 약하고 보다 교화되었으며 보다 평화적이며 아마도 상업이나 목축에 종사했던 종족들 혹은 그 마지막 생명력이 정신과 퇴폐의 찬란한 불꽃 속에서 꺼져가고 있던 노숙한 고대문화를 습격했던 것이다. 귀족계급은 처음에는 항상 야만계급이었다. 그들의 우월성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보다 완전한 인간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58)[21] 니체가 직접 든 예시.[22] 전성택, 「니체의 극복인(Übermensch)과 삶의 예술 」, 2010[23] "니체의“Übermensch”는 지금까지 ‘초인’으로 번역되어왔다. 그러나 초인이라고 번역할 경우, 신의 죽음 뒤에 신의 자리를 대신할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될수도 있다. 영미권에서도 카우프만은 이와 같은 오해 가능성 때문에 이를 'superman'에서 'overman'으로 바꾸어 번역했다. 국내에서는 이 용어를 그대로 음역하여 ‘위버멘쉬’로 사용한다. 이는 니체의 철학 개념을 이해할 때 원어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 의미 내용이 전달되기 어려운 한계를 동시에 지닌다. 이 용어 번역의 타당성은 니체의 인간학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상세한 논의를 통해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인데,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 용어를 ‘극복인’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24] 김정현,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책세상, 2010, 39-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