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국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 희성 위씨(姬姓 衛氏) | ||||
초대 강숙 | 제2대 강백 | 제3대 고백 | 제4대 사백 | 제5대 첩백 | |
제6대 정백 | 제7대 기백 | 제8대 경후 | 제9대 희후 | 제10대 공백 | |
제11대 무공 | 제12대 장공 | 제13대 환공 | 제14대 주우 | 제15대 선공 | |
제16대 혜공 | 제17대 검모 | 제18대 혜공 | 제19대 의공 | 제20대 대공 | |
제21대 문공 | 제22대 성공 | 제23대 위군 하 | 제24대 성공 | 제25대 목공 | |
제26대 정공 | 제27대 헌공 | 제28대 상공 | 제29대 헌공 | 제30대 양공 | |
제31대 영공 | 제32대 출공 | 제33대 후장공 | 제34대 반사 | 제35대 위군 기 | |
제36대 출공 | 제37대 도공 | 제38대 경공 | 제39대 소공 | 제40대 회공 | |
제41대 신공 | 제42대 성공 | 제43대 성후 | |||
희성 자남씨(姬姓 子南氏) | |||||
제44대 평후 | 제45대 사군 | 제46대 회군 | 제47대 원군 | 제48대 위군 각 | |
삼황오제 · 하 · 상 · 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한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수 · 당 오대십국 · 송 · 서하 · 요 · 금 · 원 · 명 · 청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 |
위(衛)나라 27,29대[1] 국군 헌공 獻公 | ||
성 | 희(姬) | |
씨 | 위(衛) | |
휘 | 간(衎) | |
아버지 | 위정공(衛定公) 희장(姬藏) | |
어머니 | 강비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544년 |
재위 기간 | 음력 | 1차: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2차: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제27,29대 군주. 위정공의 아들. 위상공의 형.[2] 위양공의 아버지. 사냥질 만하다가 신하에게 폐위되었으나 13년 뒤에 복위했고, 공신인 영희를 죽였다.2. 생애
2.1. 비범한(?) 시작
아버지 위 정공이 죽었을 때 그 아내인 강비는 눈물을 흘렸으나 위헌공은 전혀 울지 않았다.2.2. 폐위 전
위 헌공 원년(기원전 576년) 봄, 위 헌공은 노나라, 진(晉)나라, 정나라, 송나라, 제나라 등과 함께 척 땅에서 회맹했다. 그것은 조나라의 군주 조성공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 성공을 체포해 주나라로 암송하기 위해서였다. 11월, 순림보는 진(晉)나라, 정나라, 제나라, 오(吳)나라와 종리에서 회맹했다.위 헌공 2년(기원전 575년), 위 헌공은 정나라를 쳤다. 가을 위 헌공은 진(晉)나라, 제나라, 송나라 등과 함께 사수 땅에서 회맹했다.
위 헌공 3년(기원전 574년), 노나라, 진(晉)나라, 제나라, 송나라와 연합해 정나라를 쳤다. 이후 가릉 땅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겨울 다시 제후들과 정나라를 쳤다.
위 헌공 5년(기원전 572년) 봄, 송나라의 팽성(彭城)[3]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위 헌공은 노나라, 진(晉)나라, 송나라와 반란군이 점령한 팽성을 포위했다. 위 헌공은 영식에게 노나라를 방문하게 했다.
2.3. 신하들에게 폐위당하다
위 헌공 13년(기원전 564년), 위 헌공은 악사 사조를 시켜 첩에게 금을 타는 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첩이 잘하지 못해 사조가 매질을 하자 첩은 악사 사조를 모함했고, 위 헌공은 곤장 300대를 때리게 했다.위 헌공 18년(기원전 559년), 위 헌공은 손림보와 영식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했으나 위 헌공이 끝내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러기 사냥에 빠진 탓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크게 노해 숙읍으로 갔다. 악사 사조는 그것을 알고 손림보를 교언장이라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자극했다. 이 일을 손림보가 거백옥에게 말했는데, 거백옥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손림보는 위 헌공을 쳐서 몰아냈고, 위 헌공의 아우이자 위 정공의 아들인 공자 표를 세우니 그가 바로 위 상공이다.[4] 위 상공은 손림보를 숙읍에 봉했다.
2.4. 복위
위 상공 12년(기원전 547년), 영희와 손림보가 총애를 다투며 서로 미워했다. 위 상공은 영희에게 손림보를 치게하니 손림보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진(晉)나라 그리고 진(晉)나라에 위 헌공을 복위시켜 달라고 했다. 제경공(齊景公)은 제나라에 있는 위 헌공을 복위시키기 위해 위 헌공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진(晉)나라는 위나라를 쳐서 당시 위나라 군주인 위 상공을 회맹에 이끌고 진평공(晉平公) 영희와 위상공을 사로잡아 위 헌공을 복위시켰다. 위 헌공이 도망간지 13년 만에 복위했다.위 헌공 복위 원년(기원전 546년), 위 헌공이 영희를 처형했다.
위 헌공 복위 2년(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공자 계찰이 위나라를 방문해 거백옥과 사추를 만났다. 계찰이 그들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군자가 많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위 헌공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악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 양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