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48:50

위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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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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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衛)나라 16,18대[1] 국군
혜공
惠公
희(姬)
위(衛)
삭(朔)
아버지 위선공(衛宣公) 희진(姬晉)
어머니 선강(宣姜)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69년
재위 기간 음력 1차 재위: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2차 재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1. 개요2. 생애
2.1. 세자를 모함해 죽이다2.2. 좌, 우 공자에게 쫓겨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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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제16,18대 군주. 위선공의 아들. 위후검모의 이복 동생. 학덕후로 유명한 위의공의 아버지이며, 제나라의 간신으로 유명한 공자 개방(開方)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다. 그는 어머니 선강과 함께 태자 급자를 모함했고, 끝내는 도적을 시켜 급자를 죽이고 태자가 되었다.[2] 그리고 위 선공이 죽고 그 뒤를 이었다. 좌, 우 공자는 그 일로 위 혜공에게 한을 품어 폐위시키고, 급자의 동생인 위후 검모를 세웠다. 그러나 제양공의 도움으로 복위했다. 그리고 왕자 퇴를 돕다가 실패한다.

2. 생애

2.1. 세자를 모함해 죽이다

그는 위선공 항목에 나왔듯이 어머니 선강과 함께 태자인 급자를 모함했다. 그리고 무사들을 도적으로 위장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복 동생인 공자 수(壽)는 그것을 알고 급자를 설득해 제나라로 가지 말라고 했으나 급자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리하여 공자 수는 세자의 의장을 하고 그 도적들에게 갔다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급자는 그것을 알고 슬퍼하며 도적들에게 가서 죽었다. 선강 입장에서는 자신의 큰 아들이 본의 아니게 죽은 것은 안타까웠겠지만,[3]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인 공자 삭이 세자가 되었다. 위 선공이 죽자 바로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혜공이다.

2.2. 좌, 우 공자에게 쫓겨나다

위혜공 원년(기원전 699년), 2월 송(宋)나라정(鄭)나라에 여러 차례 뇌물을 요구하자[4] 그 요구에 견디지 못한 정나라 측에서는 노(魯)나라, 기(紀)나라와, 송나라 측에서는 위(衛)나라, 제(齊)나라, 연(燕)나라와 각기 합쳐 서로 싸웠는데, 송나라 측이 패했다. 3월 위혜공은 아버지 위 선공의 장례를 치렀다.

위혜공 2년(기원전 698년), 송나라는 위나라, 제나라, 채(蔡)나라, 진(陳)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다시 쳤다. 그리하여 정나라의 거문을 불사르고 정나라 도성과 동쪽 교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송나라는 그 서까래를 약탈했다.

위혜공 3년(기원전 697년), 위혜공은 노환공, 송장공, 진장공(陳莊公)과 함께 이 땅에서 회맹해 정나라를 치려 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는 패배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위혜공 4년(기원전 696년), 위혜공은 노환공, 송장공, 채환후와 조나라에서 회맹했고, 다시 정나라를 치려 했다. 4월 제후들과 정나라를 쳤다. 그런데 위나라 내부에서 위혜공이 급자를 죽인 일로 인해 민심을 잃자 좌공자 실, 우공자 직은 위 혜공을 폐위시키고 태자 급자의 동생인 검모를 세웠다. 이에 위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후 검모 7년(기원전 689년), 노장공은 제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4개국과 연합해 위나라를 쳐서 위혜공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위후 검모 8년(기원전 688년), 제양공주장왕(周莊王)의 명으로 위나라를 쳐서 위후 검모를 몰아내고 좌, 우공자를 죽이고 위혜공을 복위시켰다. 위후 검모는 주나라의 수도 낙읍으로 망명했다. 위 혜공은 8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것이었다.

위혜공 20년(기원전 680년), 위혜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견 땅에서 회맹했다.

위혜공 21년(기원전 679년), 위혜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견 땅에서 회맹했다.

위혜공 22년(기원전 678년), 정나라가 송나라를 치자 위혜공은 송나라, 제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12월 위혜공은 노나라,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위혜공 25년(기원전 675년), 위혜공은 주 왕실에서 검모를 받아들여 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남연과 함께 주나라를 치는 간 큰 짓을 한다. 이에 주혜왕은 온읍으로 달아나고 그들은 왕자 퇴를 세웠다.[5]

위혜공 31년(기원전 669년), 5월 계축일 위혜공이 죽고 공자 적이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학덕후로 유명한 위의공이다.


[1] 폐위되었다가 복위 되었다[2] 본의 아니게 친형을 죽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3] 애초에 계획에서는 세자인 급자만 죽이는 것이 목적이어서 그렇다.[4] 그 자세한 내막은 정여공, 송장공 문서 참조.[5] 희퇴 항목에 나오듯이 일은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