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춘추시대의 제나라 희공의 딸로 제양공, 제환공의 누나. 당대에는 동생인 문강, 애강과 함께 자매가 대단한 미녀로 유명했지만 훗날에는 패륜 자매로 악명을 떨쳤다.[1]2. 생애
원래 선강은 위나라(衛) 선공의 세자 급자(急子)[2]에게 시집갈 예정이라 위나라에 보내졌으나, 위선공의 마음에 들어서 급자가 아닌 위선공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즉,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로채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 막장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는데 선강은 위선공과 사이에서 수(壽)와 삭(朔)[3] 등 두 아들을 얻자, 선공을 부추겨 수를 세자로 삼으라고 했다. 수는 천성이 착했으나, 삭은 굉장히 사악했는데, 선강은 위 선공의 총애를 받았던 애첩 이강(吏姜)[4]이 목을 매 죽자 이강의 아들이자 세자이며, 자신의 원래 약혼자이기도 했던 급자를 친아들인 삭과 함께 모함했다.이 모함으로 꼬드김에 넘어간 선공이 급자를 제나라의 사신으로 파견하게 하고 국경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 급자를 죽이려고 작심했다. 선공은 급자에게 사신의 표식을 줬는데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이 표식을 가진 사람을 죽여 도적에게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려고 했다. 공자 수는 이 악랄한 계획을 알아차리고, 이복형 급자를 친어머니 선강의 마수에서 구하고자 애썼다. 공자 수는 급자에게 술을 먹이고, 자신이 사신의 표식을 지니고 국경을 넘다가 대신 피살되었고, 급자는 뒤늦게 정신차려서 뒤따르다가 자신이 급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결국 죽었다.
이처럼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나, 공자 수를 잃고 상심한 위선공은 머지 않아 죽었고, 군위를 이어서 선강의 소생인 공자 삭이 공위를 이어 위혜공이 되었다. 그러나 위혜공의 사악한 짓거리에 분노하고 있으며 급자를 지지했던 우공자 직(職)과 좌공자 설(洩)이 위혜공이 위나라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대부 영궤(寧跪)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급자의 친동생인 검모(黔牟)를 옹립했다. 이들은 급자와 공자 수를 다시 발상하여 개장했으나, 제양공이 위혜공을 지지하여 위나라를 공격했고 결국 위혜공은 복위했다. 위혜공은 복위 후 검모를 주나라[5], 영궤를 진나라(秦)로 추방하고,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을 죽였다. 이 때 선강은 제양공의 주선으로 위선공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아들(...)인 소백 석(碩)과 재혼했다.[6]
선강은 소백과 결혼한 이후에 2남 2녀를 봤다. 아들로는 대공 신(申), 문공 훼(燬) 형제, 딸은 두 자매를 낳았는데 이들은 각각 송환공, 허목공 등의 부인이 되었다. 문강, 애강과 달리 선강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후 위나라의 역사는 혼란스러워진다. 위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赤)이 뒤를 이어 의공이 되었다. 의공은 제환공과 싸워 대패했으나, 뇌물을 바쳐 화평했다. 그런데 의공은 정통성이 부족했는데, 아버지 위 혜공이 자기 형들을 참소하여 죽게 하고 임금이 되었으며, 의공 자신은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치하며 특히 학덕후였다. 학을 대신들처럼 대우하여 작위를 주고 녹봉을 주어 인심을 잃었는데, 기원전 660년 12월에 적이 쳐들어오자, 병사를 일으켜 막으려 했으나,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했다. 대신들도 학더러 가서 막으라고 비꼴 정도였으며 의공은 석기자(石祁子), 영장자(寗莊子)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고 거공(渠孔)에게 융차의 지휘를 맡기고 자백(子伯)을 차우로 삼고 황이(黃夷)를 선봉, 공영제(孔嬰齊)를 후군으로 삼아 형택에서 적과 싸웠으나 참패하고 살해당했다.
의공이 끔살당하고[7] 수도 조가(朝歌)는 엉망이 됐으며 살아남은 백성들은 겨우 5천 명이 되었다.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급자를 동정했으므로 급자의 후대를 옹립하려고 했지만 요절했고, 공자 수의 후손이 없어서 결국 급자의 조카이자 선강의 3남인 신을 위대공으로 옹립했다. 제환공은 공자 무휴에게 병사들과 물자들을 수송하게 해서 위나라를 원조했다. 그러나 대공은 즉위하고 얼마 못 가 죽었으므로 아우 훼가 뒤를 이으니 그가 위문공이다. 문공은 상중에나 입는 거친 베옷을 입고 거친 명주로 지은 모자를 쓰고, 임업 · 농업 · 상업 · 공업 · 교육 · 학문 진흥에 힘쓰며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조세를 줄이고 스스로 일하며 백성들과 함께 괴로워하며 흩어진 위나라 민중을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문공의 노력에 힘입어 즉위 초에는 30승에 불과하던 병거가 재위 말년에는 300승이 되었다.[8]
기원전 658년, 제환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위해 초구(楚丘) 땅에 도성을 재건해 주었다. 문공은 이후 형나라를 정복하는 등 위나라를 재건하는데 여생을 보냈다.
참고로 선강의 딸 중 허 목공에게 시집간 딸은 열녀의 표상이 되면서 어머니 선강하고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1] 그나마 처음부터 막장을 달린 끝에 노나라와 제나라 어디에도 돌아가지 못하다가 말년에 겨우 노나라로 가서 죽은 문강이나 처형당한 애강과는 다르게 위선공이 그녀를 가로챈 것 부터가 문제였고 저 둘과 다르게 사통을 하지는 않았기에 위나라에서 쭉 살다 죽었다. 자기자식 제후 만들겠다고 의붓아들은 죽였다만[2] 또는 급(急).[3] 훗날의 위혜공[4] 이강은 위 선공의 아버지 위 장공의 애첩이었다(...). 다시 말해 위선공은 아버지의 애첩(의붓어머니)이랑 아들의 약혼자(예비 며느리)를 모두 자신이 차지한것.[5] 검모가 주 왕실의 사위였기 때문이다.[6] 당연히 소백 석은 비록 대륙 최고의 미녀이기는 하나 어머니와 친형의 원수인 선강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선강이 소백 석을 만취시킨 뒤에 그렇고 그런 일을 해서.... 임금의 어미와 잔 셈이 되었고, 살기 위해서 선강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7] 의공의 아들 개방은 일찍이 제환공을 섬겨 제나라에 있었다.[8]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전차 1승당 보병이 최소 30명 이상, 보통 70~100명이 편제되므로 천승지국이란 단독으로 치중을 포함 수만에서 10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를 뜻한다. 의공 사망 직후 병력은 커녕 백성이 5천명이었는데 대공-문공시기를 지나 병력이 최소 1만에서 수만에 이르렀으니 문공은 성공적으로 위나라를 다시 재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