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2:06:36

윌리엄 네빌

성명 윌리엄 네빌
William Neville
생몰년도 1405년경 ~ 1463년 1월 9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스 요크셔 포콘버그
아버지 랄프 네빌
어머니 조앤 보퍼트
형제 캐서린, 엘레노어, 리처드, 로버트, 조지, 앤, 조앤, 에드워드. 세실리
아내 포콘버그의 조앤
자녀 조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토머스(사생아)
직위 포콘버그 남작, 켄트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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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말기에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했고, 장미 전쟁 시기엔 요크 왕조 편에 섰다.

2. 생애

1405년경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에서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딸인 조앤 보퍼트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캐서린[1], 엘레노어[2], 리처드[3], 로버트[4], 조지[5], 앤[6], 조앤[7], 에드워드[8], 세실리[9]가 있었다.

1422년경, 윌리엄은 5대 포콘버그 남작 토머스 포콘버그의 딸 조앤과 결혼했다.토머스 포콘버그의 외아들 존 포콘버그는 140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토머스 포콘버그는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2년 후 사망했다. 이후 포콘버그 남작 작위는 왕실에 회수되었다가, 그가 조앤과 결혼한 뒤 포콘버그 남작에 새로 선임되었다. 포콘버그 남작의 영지는 네빌 가문의 중심지인 노스 요크셔에 위치했다.

1426년 5월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35년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서 복무했다. 1436년 처남이자 노르망디 총독인 요크의 리처드의 휘하에서 노르망디 전선에 복무했다. 1439년 존 탈보트, 토머스 스케일스와 함께 야전 사령관이 된 그는 1440년 존 탈보트의 아르플뢰르 탈환 작전에 참여해 작전 성공에 기여했으며, 뒤이어 모를 공략하고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낸 공로로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세가 프랑스에게 기우는 걸 막지 못하고, 1442년 3월 요크의 리처드가 총독직에서 해임되자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443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의 로스버그 성주에 선임되어 스코틀랜드에서 1,000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받았다. 1449년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다시 프랑스에 보내졌고, 1449년 5월 노르망디의 퐁드 라르슈 요새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에 맞섰지만 끝내 요새가 함락되자 항복한 뒤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당시 그는 로스버스 성을 유지하기 위해 2년간 사비를 지불해야 했고, 이로 인해 1451년까지 4,109 파운드의 빚을 졌다. 이에 정부에 몸값을 대신 마련해달라고 요청했지만, 1449년 당시 권력자였던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거부했다. 그는 1453년이 되어서야 8,000 에쿠스의 몸값을 겨우 마련하고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1453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를 순행하던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가 정신 질환에 걸려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요크의 리처드가 왕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게 되었고, 그는 의회에 소환되어 리처드를 보좌하게 되었다. 1455년 세인트 올번스 전투 당시 헨리 6세를 따르던 신하들과 함께 있었지만, 리처드가 헨리 6세를 사로잡고 권세를 쥐자 그의 편에 선 뒤 윈저 성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형제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함께 칼레로 이동해, 칼레의 대장을 맡고 있던 조카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부관이 되었다.

1458년 잉글랜드에 돌아갔다가 그해 5월에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에 의해 런던 탑에 잠시 투옥되었지만, 조카 리처드 네빌이 압력을 가한 덕분에 풀려나 칼레로 돌아갔다. 1458년 6월 리처드 네빌과 함께 런던에 입성한 그는 7월 3일 리처드 네빌의 휘하에서 1만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7월 10일 노샘프턴에서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험프리를 주살하고 헨리 6세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리처드 네빌이 잉글랜드에 남아있는 동안 그가 칼레 대장에 선임되어 칼레로 이동했다.

윌리엄이 칼레에서 방위 임무를 수행하던 1460년 12월 30일, 요크의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뜻밖의 참패를 당하고 피살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1461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런던에서 새로 즉위한 에드워드 4세와 합류했다. 3월 11일에 요크파 북부군 선봉대를 이끌었고, 3월 29일 타우턴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와 함께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이그는 랭커스터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에드워드 4세는 승리에 공헌한 그를 왕실 의회 의원 겸 북부 국경 사령관으로 선임했으며, 11월 1일 켄트 백작으로 선임하고 왕실 청지기를 맡게 했다.

1462년 7월 잉글랜드 제독이 되었으며, 그 해 8월에 서부 지역에 46개의 영지를 부여받았다. 그는 노섬벌랜드 일대에서 에드워드 4세의 통제권을 점진적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461년 여름 수비대 120명을 뉴캐슬에 파견했고, 1462년 11월 안윅 공방전에 참여했다. 또한 1462년 8월 칼레로 돌라와서 브르타뉴 해안을 습격한 뒤 브레스트 인근의 르 콩크를 불태우고 레 섬을 공격했다. 1462년 1월 9일 포콘버그에서 사망했고, 기스버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윌리엄은 생전에 포콘버그의 조앤과 결혼해 세 딸 조앤[10], 엘리자베스[11], 앨리스[12]를 뒀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뒤 아내 조앤이 영지를 관리하다가 1490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켄트 백작과 포콘버그 남작은 왕실에 회수되었다. 한편, 일명 '포콘버그의 사생아'로 일컬어진 토머스를 뒀는데, 이 인물은 1471년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과 함께 에드워드 4세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1] 1397 ~ 1483,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와 초혼, 기사 토마스 스트랭웨이즈와 재혼, 초대 보몬트 자작 존 보몬트와 삼혼, 기사 존 우드빌과 사혼.[2] 1398 ~ 1472, 4대 베르게르시 남작 리처드 디스펜서와 초혼, 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재혼.[3] 1400 ~ 1460,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의 딸이자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타구와 결혼한 뒤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4] 1404 ~ 1457, 더럼 주교[5] 1407 ~ 1469, 초대 라티머 남작[6] 1408 ~ 1480, 초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의 부인[7] 1412 ~ 1453, 성 클레어 수도회 수녀[8] 1414 ~ 1476, 베르게베니 남작.[9] 1415 ~ 1495, 요크의 리처드의 부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리처드 3세의 어머니[10] 1434 ~ 1472, 기사 에드워드 베담의 아내[11] 1435 ~ 1488년 이전, 기사 리처드 스트랭웨이즈의 아내[12] 1437 ~ 1490년 이전, 기사 존 코니어스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