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17:55:20

윌리엄 2세 마셜

파일:윌리엄 2세 마셜.jpg
성명 윌리엄 2세 마셜
William II Marshal
생몰년도 1190년경 ~ 1231년 4월 6일
출생지 노르망디 공국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윌리엄 마셜
어머니 이사벨라 드 클레어
형제 마틸다, 리처드, 길버트, 월터, 안셀름, 이사벨라, 시빌라, 에바, 조안
배우자 앨리스 드 베순, 잉글랜드의 엘리노어
직위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아일랜드 보안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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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아일랜드 보안관. 윌리엄 마셜의 장남이다.

2. 생애

1190년경 노르망디 공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며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로 칭송받은 윌리엄 마셜이고, 어머니 이사벨라 드 클레어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딸이자 제4대 펨브로크 여백작이다. 1203년 11월 6일 볼드윈 드 베순의 딸인 앨리스 드 베순과 결혼했다.

1205년, 존 왕은 윌리엄 마셜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하자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윌리엄 마셜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장남 윌리엄을 인질로 잡기로 했다. 이후 1212년까지 붙들려 있다가 풀려났고, 1214년에 앨리스와 결혼했고, 아내의 지원에 힘입어 풀크 피츠워린, 르 그로스 형제 4명, 볼드윈 드 베순 등이 포함된 개인 기사단을 창설했다.

1215년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 윌리엄 마셜이 존 왕을 따른 데 비해 그는 반란 귀족들 편에 서서 1215년 2월 스탬퍼드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고, 그 해 6월 마그나 카르타의 25인 집행자 중 한 명이었다. 그 해 12월 1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존 왕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키고 마그나 카르타를 강요한 귀족들을 파문할 때 함께 파문되었다. 이후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받들어 존 왕에 대적했다. 1216년 루이 왕이 우스터를 점령한 뒤, 그는 아버지로부터 성에서 도망치라는 경고를 받았고, 제4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이 우스터를 탈환하기 직전에 도주했다.

1217년 3월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편으로 귀순해 파문이 풀렸고, 1217년 링컨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루이 왕자를 따르는 프랑스군과 반란군을 섬멸하는 데 일조했다. 1219년 5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펨브로크 백작과 잉글랜드 왕실 마셜이라는 칭호를 물려받고 영지도 물려받았다. 그는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큰 영지를 보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223년 4월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된 그는 1220년 웨일스 통치자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가 웨일스 국경지대의 여러 성을 점령하고 1223년 초 키니어리와 휘팅턴 성을 공략한 것에 보복하고자 군대를 소집했고, 웨일스에 상륙한 뒤 카디건과 카마던 성을 점령했다. 또한 육상에서 그를 지원하는 잉글랜드군도 몽고메리 성을 점령했다. 그 해 10월 몽고메리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윌리엄은 허웰린에게 점령한 땅을 돌려줬고, 허웰린은 슈롭셔에서 탈취한 영토를 돌려줘야 했다.

1224년, 얼스터 백작 휴 드 레이시가 윌리엄의 아일랜드 영지를 습격했다. 이에 윌리엄은 아일랜드로 가서 휴 드 레이시를 격파했다. 1225년 킬케니에 도미니코회 삼위일체 수도원을 설립하고 칼로우 성과 펀스 성을 지었다. 1226년 왕실의 명령에 따라 허웰린으로부터 빼앗은 카디건과 카마던 성을 왕실에게 넘겨야 했고, 1226년 코나흐트에서의 잉글랜드군 작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보안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1227년 7월, 콘월의 리처드는 왕을 섬기는 용병이었던 "독일인 웨일런"을 콘월 백작령에서 쫓아내려 했다. 웨일런은 즉시 헨리 3세에게 항의했고, 헨리 3세는 리처드에게 재산을 웨일런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는 이에 화가 나 왕실을 떠난 뒤 레딩에서 윌리엄 2세 마셜과 함께 왕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체스터, 글로스터, 워렌, 헤리퍼드, 더비 및 워릭 백작들이 동맹에 나중에 합류했다.

리처드가 속한 반란군은 스탬퍼드에 집결한 뒤 왕과 왕실 대법원장 휴버트 드 버그에게 사절을 보내, 왕실 숲 경계를 재검토하고 수정할 것이며, 휴버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니 줄이라고 요구했다. 또한 리처드 본인은 베캄스테드 성에 대해 순회 판사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고, 1227년 7월 휴버트 드 버그의 조카 레몽에게 이 성을 넘겨야 했다. 그 후 헨리 3세가 형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1227년 8월 11일 협상을 위해 노샘프턴에 찾아간 뒤, 어머니가 과거에 맡았던 잉글랜드 영지를 헨리 3세로부터 받았다. 이후 리처드와 윌리엄 마셜은 헨리 3세와 화해했고, 반란은 수그러들었다.

1230년 헨리 3세와 함께 브르타뉴 원정에 참여했고, 헨리 3세가 귀국한 뒤 잉글랜드군을 계속 지위했다. 1231년 2월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제5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미망인이며 자신의 여동생인 이사벨라 마셜과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던 1231년 4월 6일에 런던에서 41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는 초대 켄트 백작 휴버트 드 버그가 절대 권력을 손에 넣는 데 방해가 될 그를 독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는 생전에 자녀를 낳지 못했기에, 남동생 리처드 마셜이 그의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