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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휴버트 드 버그 Hubert de Burgh | |
생몰년도 | 1170년경 ~ 1243년 5월 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버그 앤 터팅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서리주 반스테드 | |
아버지 | 월터 드 버그 | |
어머니 | 앨리스 | |
형제 | 윌리엄, 제프리, 토머스 | |
아내 | 베아트리체, 이사벨라, 마거릿 | |
자녀 | 존, 휴버트, 마거릿 | |
직위 | 켄트 백작, 푸아투 세네샬, 5개 항구의 감독관, 아일랜드 보안관, 잉글랜드 대법원장, 잉글랜드 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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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에 존 왕과 헨리 3세 부자를 따랐으며, 헨리 3세 치세 초기에 섭정을 맡아 잉글랜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2. 생애
1170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버그 앤 터팅턴에서 노퍽과 서퍽의 소규모 토지 소유주인 월터 드 버그와 앨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 윌리엄 드 버그는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리머릭의 총독을 역임했으며, 향후에 아일랜드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버그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또다른 형제 제프리와 토머스는 각각 노리치 대주교, 노리치 성주를 역임했다.그는 일찍이 존 왕자의 궁정에 들어가서 하급 관리로 일하다가 1198년 존 왕자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1199년 존 왕이 잉글랜드 국왕에 오른 뒤 본격적으로 중용받아 1201년 웨일즈 국경지대의 중요한 요새들인 그로스몬트, 스캔프리스, 화이트 성을 수여받았다. 또한 도싯, 서머싯, 헤리퍼드셔 및 버크셔의 보안관을 역임했으며, 론서스턴과 월링포드 성의 성주가 되었다. 1202년 존 왕에 의해 도버 성의 순경으로 임명되었고, 노르망디 공국에 속한 팔레즈의 영주가 되었다.
1202년 브르타뉴 공작이자 존 왕의 조카인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와 존 왕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아르튀르 1세는 미르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생포되어 팔레즈 성에 감금되었고, 휴버트는 아르튀르의 간수가 되었다. 아르튀르는 1203년경에 실종되었는데, 코그스홀의 수도사 라울은 휴버트가 존 왕으로부터 의회의 동의를 받았으니 아르튀르를 거세해 왕위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에 따랐고, 아르튀르가 거세된 직후 사망하자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생앙드레 드 구페른의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휴버트가 정말로 아르튀르를 죽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필리프 2세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노르망디를 석권할 때, 그는 시농성에서 1205년부터 1년여 간 농성했지만 끝내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1207년까지 포로로 잡혀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그에게 주어진 작위와 토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그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존 왕으로부터 동앵글리아, 잉글랜드 남서부 및 기타 지역의 여러 영지를 수여받았다. 1212년 푸아투 세네샬로 선임되었고, 1214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할 때 동행했다.
1214년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 왕은 잉글랜드 귀족들의 대규모 반란(제1차 남작 전쟁)에 직면했다. 이때 그는 존 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다. 존 왕은 런던 시민들에게 반란군에 맞서 항전하라고 촉구하고자 휴버트를 커번트리 주교와 함께 런던으로 보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반란군에게 성문을 개방했고, 휴버트는 왕실 대법관이자 기사 필립 도비니와 함께 로체스터에서 왕실군을 모았지만, 존 왕은 반란군의 압력에 못 이겨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다. 그는 마그나카르타에서 왕에게 서명하도록 조언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며, 그의 형제이자 엘리 주교였던 제프리는 증인을 맡았다. 또한 그는 왕이 국외에 있을 경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할 인물로 거론되기도 했다. 마그나 카르타 발표 직후, 휴버트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수석 재판관으로 선언되었다.
그 후 반란군이 존 왕에 맞서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휴버트는 켄트와 서리의 보안관이자 캔터베리와 도버의 성주로서 존 왕의 대의를 따랐다. 그는 1216년 7월 19일 ~ 10월 14일, 1217년 5월 12일 ~ 9월 11일까지 이어진 도버 공방전에서 루이 왕자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루이 왕자에게 물자와 병력을 보급하려던 프랑스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휘하 함대를 파견해 1217년 8월 24일 샌드위치 해전에서 적 수송함대를 섬멸하고 적 함대 지휘관인 수도자 외스타슈를 처형했다. 결국 루이 왕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1217년 9월 11일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대신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는 내용의 램버스 조약을 체결한 뒤 프랑스로 귀환했다.
1219년 펨브로크 백작이자 섭정인 윌리엄 마셜이 사망한 후, 휴버트는 헨리 3세의 새로운 섭정으로 등극해 나라를 자기 뜻대로 통치했다. 1227년 헨리 3세가 성년이 되었을 때, 휴버트는 웨일스의 포이스 지역에 있는 몽고메리 성의 통제권을 수여받았으며, 초대 켄트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당시에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뜻에 반하여 집행되는 정책은 단 하나도 없었다. 1228년 4월 27일, 휴버트는 종신 대법원장으로 선포되었으며, 1232년 6월 16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아일랜드를 실제로 가지는 않고 그 해 8월에 아일랜드 보안관에서 물러났다.
휴버트는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 제거에 힘을 기울였다. 1221년 4월 교황 특사이자 노리치 주교 판둘프와 함께 앵겔라르 드 시고니가 왕실이 소유히던 성의 수입을 횡령하고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고발했고, 엥겔라르는 이로 인해 1223년 말에 윈저와 오디함의 성주 직위를 상실했다. 또한 1221년 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난 윈체스터 주교이자 재무부장 피에르 데 로슈가 피에르 드 모레이와 함께 잉글랜드를 프랑스 왕국에 넘기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했고, 피에르 드 모레이를 직위에서 해임한 뒤 감옥에 가뒀다. 피에르 데 로슈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그 혐의가 거짓이라는 걸 입증했지만, 헨리 3세에 대한 후견권은 회복되지 못했다.
1223년 11월, 그의 권세를 질시한 팔케스 드 브레오테, 제6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 제5대 허트퍼드 백작 클레어의 길버트가 런던 탑을 접수하고 휴버트를 타도하려 했다. 새로운 내전은 요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의 중재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12월 양자간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에게 반기를 들려 한다는 이유로 파문을 선고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팔케스는 12월 30일 궁정으로 복귀하여 허트퍼드 성과 보안관 직책 일부를 내줘야 했다.
나머지 직책 및 성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1224년 1월 18일 휴버트와 그의 동료들로부터 베드퍼드와 플림튼 성까지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팔케스는 두 성이 아내의 지참금 일부라며 항의했지만 무시당하자 두 성을 내주길 거부했다. 이에 헨리 3세의 궁정은 1224년 6월 20일 팔케스를 반역자로 성토하고 군대를 일으켜 베드퍼드 성을 포위했고, 사이먼 랭턴은 팔케스와 그의 모든 군대 구성원들을 파문했다. 공방전은 8주간 지속되다가 결국 수비대 전원이 항복 후 처형되었다. 이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팔케스는 8월 19일 모든 재산을 내주는 대가로 사면을 요청했다. 8월 25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재판에 회부되는 대신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렇듯 강대한 권세를 누리던 휴버트였지만,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수많은 적을 양산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3세의 불만까지 샀으며, 프랑스와 웨일스에 대한 원정 실패로 위신이 꺾였다. 피에르 데 로슈는 프랑스와 웨일스에서 벌인 원정이 실패한 건 휴버트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헨리 3세에게 새로운 재정 전략을 채택하고 통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헨리 3세는 1231년 크리스마스에 윈체스터에 찾아가는 등 피에르를 극진히 총애했고, 1231년 1월에 피에르를 왕실 재무부장으로 선임했다.
그 후 피에르는 휴버트의 영향력 감소를 이용해 친척 피에르 드 리보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했다. 피에르 드 리보는 1232년 여름에 여러 수익성 있는 부동산에 대한 많은 직위와 관리권을 받았다. 휴버트는 이에 대응해 1232년 7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대법원장으로서의 임를 보장하는 왕실 헌장을 발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휴버트가 잉글랜드 내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공모했다는 비난이 일었고, 헨리 3세는 7월 29일에 휴버트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스티븐 세그레이브를 새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1232년 말, 헨리 3세의 총신들이 왕을 부추긴 끝에 모반을 꾸민 혐의로 휴버트를 체포하게 했다. 휴버트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뒤 데비지스 성에 투옥되었다. 1233년 제3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샬이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휴버트는 간수들이 석방해 준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뒤 반란에 가담했다. 1234년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먼드 리치의 중재로 왕실과 반란 세력 간의 화해가 이뤄졌다. 휴버트는 1234년 5월 28일 공식적으로 재판관직을 사임하는 대신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롤리에 의해 작위 박탈이 취소되었다.
1236년 휴버트의 딸 마거릿과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결혼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논란에 휩싸였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아직 미성년자여서 왕의 후견 아래 있었는데, 결혼은 왕의 허가 없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휴버트는 결혼식이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왕에게 벌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마거릿이 사망하면서 논쟁은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1243년 5월 5일 서리주 반스테드에서 사망했고, 런던 홀본의 블랙 프라이어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휴버트는 본래 제5대 데번 백작 윌리엄 드 레드버스의딸 조안과 약혼했지만,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고 나중에 리처드 1세, 존 왕, 헨리 3세 세 왕을 모신 저명한 행정가이자 판사 윌리엄 브루어의 장자이자 상속인인 윌리엄 브루어 21세와 결혼했다.
- 베아트리체(? ~ 1214년 12월 12일 이전): 워미게이 남작이자 왕의 재판관을 역임한 윌리엄 드 워렌의 딸.
- 존: 기사. 후손인 마거릿은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오그 드 버그의 부인이 되었다.
- 휴버트: 기사. 에드워드 4세의 시종이자 내각 고문을 역임한 게인즈버러의 토머스 버그의 조상이다.
- 글로스터의 이사벨라(1173 ~ 1217): 글로스터 백작 윌리엄 피츠로버트의 딸. 휴버트와 재혼하기 전에 존 왕의 첫번째 왕비였다.
- 스코틀랜드의 마거릿(1193 ~ 1259):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의 딸.
- 마거릿(1223 ~ 1237):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부인.
휴버트의 두 아들 존과 휴버트는 켄트 백작령을 상속받지 못했는데, 백작령 상속은 휴버트와 그의 세번째 아내의 후손에게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헨리 3세가 휴버트가 스코틀랜드 공주와 결혼할 때 대우를 맞춰주기 위해 백작령을 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1] 성역을 찾는 휴버트 드 버그, 13세기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의 <잉글랜드의 역사(Historia Anglorum)>에 첨부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