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20:22:57

피에르 데 로슈

파일:피에르 데 로슈.jpg
성명 피에르 데 로슈
Pierre des Roches
생몰년도 미상 ~ 1238년 6월 9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투렌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서리주 웨이벌리 파넘
직위 윈체스터 주교, 잉글랜드 대법원장, 햄프셔 보안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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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 주교.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헨리 3세의 편에 서서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한 잉글랜드 반란군과 대적했으며,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잉글랜드 정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생애

출생년도와 부모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푸아투 출신으로 여겨졌지만, 현대 학자들은 투렌 출신이고 투아르 성을 영지의 중심지로 둔 로슈 가문 출신일 거라고 추정한다. 같은 가문 출신으로 앙주의 세네샬로 본래 존 왕을 따랐다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편으로 돌아서서 필리프 2세가 앙주를 확보하는 데 기여한 기욤 드 로슈가 있었다. 1197년 4월 투르에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헌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는 투르와 주변 지역에서 많은 직책을 맡았다. 로슈의 원장이자 앙제의 성 마르틴 교회의 교장이었고, 푸아티에의 생힐레르르그랑 교회의 재무이자 사실상의 수장을 역임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는 그가 젊을 때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보다 전쟁에 훨씬 더 능숙했다고 지적했다. 이로 볼 때 그의 군사적 명성은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던 듯하다.

1200년 왕실과 함께 잉글랜드로 이주했고, 존 왕이 프랑스 북부에서 군사 작전ㅇ르 벌일 때 참여했으며, 1201년과 1203년 2월에 앙주의 왕실 영지에 대한 후견인이 되었다. 1204년 노르망디 공국이 프랑스에 넘어간 뒤, 피에르는 완전히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헤일스 교회, 커비 미스퍼턴 교회를 포함한 다양한 성직을 맡았다. 그는 다트퍼드, 링컨 대성당의 프리벤드[1]이자 선창자[2]였으며, 뱀버러 성당의 평생 본당 신부를 맡았다. 또한 1204년 4월에 주교가 공석인 치체스터 교구의 임대권을 맡았으며, 임대료를 처분할 권리 역시 누렸다.

1204년 9월, 윈체스터 주교 고드프리 드 루시가 사망했다. 피에르는 존 왕에 의해 윈체스터 주교 후보로 제안되었다. 그의 입후보는 윈체스터 성직자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지만, 윈체스터와 서리의 대 집사들은 솔즈베리 대성당의 학장 리처드 푸어가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윈체스터 주교 선임 문제는 1205년 봄에 교황청으로 넘어갔고, 교황청은 존 왕의 자금 지원을 받고 피에르의 선출을 승인하고 9월 25일에 주교로 서품했다. 피에르는 1206년 3월 24일에 교구의 행정을 맡았고, 3월 26일 종려주일에 공식적으로 주교좌에 올랐다.

하지만 피에르는 윈체스터 교구엔 대리인을 세워놓고, 본인은 궁중에서 계속 활동했다. 1206년 ~ 1214년 왕실 재무부장을 맡아 성 건축 및 군사 작전 비용을 담당했고, 프랑스, ​​​​스페인 및 교황청 대사를 맡았다. 이 시기에 쓰여진 풍자시는 피에르를 "윈체스터의 전사, 재무부에서 일하며 재정에 관심이 있지만 글쓰기에는 부주의한 인가"이라고 묘사했다. 한편, 교황청에서는 그를 윈체스터 주교로 승인하면서, 그가 교황 본인이 아닌 다른 성직자에 의해 임시 정직당하거나 파문 당하는 걸 면제했다. 교황청은 그 대가로 "성 베드로의 데나리우스"[3]을 잉글랜드에서 정기적으로 거둬들일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피에르는 교황의 서신 덕분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할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1206년 존 왕의 푸아투 원정에 참여했으며, 1211년 웨일스를 상대로 파견된 군대의 일부를 직접 지휘했다. 또한 막대한 부를 소유했던 그는 잉글랜드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을 후원했는데, 특히 노르망디, 푸아투 및 투렌 출신 인사들이 피에르의 주교 궁전에서 봉사했다. 1208~1213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잉글랜드에 성무금지령을 내렸을 때, 피에르는 파문당한 존 왕에 궁정에 남아있던 두 명의 잉글랜드 주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존왕의 수행원으로서 사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예술을 후원했으며, 유대인에게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고 궁정 비용을 주민들로부터 징수하는 데 관여했다. 존 왕은 자신에게 이렇듯 충실한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했고, 아들 헨리 3세의 교육을 맡겼다.

1214년 존 왕이 푸아투 원정을 재차 떠난 동안 잉글랜드의 대법원장으로 선임되어 왕을 대신해 통치했다. 그는 본인이 발행한 헌장에 대해 별도의 등록부를 만들었으며, 왕의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귀족들로부터 방패세를 강제 징수했고, 왕실 지지자들을 빈 주교구와 수도원의 자리로 승진시켰으며, 런던시의 특권을 상당히 제한했다. 귀족과 런던 시민들은 이에 격양되었고, 이는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한편, 그는 요크 대주교로 선출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존 왕이 더럼 교구로 옮기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1215년 6월 15일 마그나 카르타가 공포되었을 때 증인 중 한 사람이 된 그는 이후 대법원장에서 해임되었고, 휴버트 드 버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피에르는 1215년 9월 도버에서 교황을 대신하여 존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파문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을 반란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혐의로 직위에서 해임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비록 그의 교구인 윈체스터가 반군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그는 잉글랜드 서부의 톤턴에 새 거점을 마련하고 존 왕에게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216년 10월, 존 왕이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 후 1216년 10월 28일 헨리 3세가 글로스터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석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9살된 왕의 후견인을 맡았다. 1217년 5월 20일 잉글랜드 섭정 윌리엄 마셜의 지휘하에 링컨 전투에 참여해 반란군을 섬멸하는 데 일조했다. 13세기 연대기인 <윌리엄 마셜의 이야기>에 따르면, 피에르가 링컨 성의 비밀 통로를 통과해 링컨 성을 지키고 있던 여성 성주 니콜라 드 라 아예를 만나 적군의 포위가 곧 풀릴 거라고 알렸다고 한다. 또한 링컨 시 북서쪽에서 돌과 잔해로 뒤덮인 북문을 발견하고 왕실군이 도시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이들은 그가 지휘하는 분견대였다.

매튜 파리스에 따르면, 피에르는 샌드위치 해전에도 참여했지만 피에르, 윌리엄 마셜, 및 여러 귀족들이 수도자 외스타슈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접근할 때 이를 공격하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윌리엄 마셜의 이야기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해 9월, 루이 왕자가 런던을 떠난 뒤, 피에르는 시민들과 런던 탑 수비대의 항복을 받기 위해 도시에 들어간 최초의 왕실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궁정과 재무부로 복귀했고, 햄프셔의 보안관이 되었으며, 여러 왕실 소유 성과 숲을 통제했다. 1219년 잉글랜드 섭정 윌리엄 마셜은 임종을 눈앞에 뒀을 때, 아들 윌리엄에게 헨리 3세를 피에르에게서 떼내어 노리치 주교이자 교황 특사 판둘프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피에르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이 결정에 저항했으며, 그 결과 5월 14일 윌리엄 마셜이 사망한 후에도 헨리 3세의 양육권을 유지하고 휴버트 드 버그, 판둘프와 함께 왕국의 통제권을 공유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을 후원해 잉글랜드 귀족들의 반감을 샀고, 다른 권력자들과 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는 점차 고립되었다. 1221년 초 왕실군이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든 것으로 간주된 제3대 오말 백작 윌리엄 드 포스를 비프함 성에 가두고 포위 공격할 때 참여했다. 이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순례를 떠났다. 이때 휴버트 드 버그가 피에르가 부재한 틈을 타 피에르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던 팔케스 드 브레오테 등에 대한 정치 공세를 벌였다. 그 중 한 사람인 피에르 드 모레이는 피에르 주교와 함께 잉글랜드를 프랑스 왕국에 넘기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직위에서 해임된 뒤 한동안 감옥에 갇혔다. 피에르는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그 혐의가 거짓이라는 걸 입증했지만, 헨리 3세에 대한 그의 후견권은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제5차 십자군이 이집트 원정 도중에 접수한 다미에타의 대주교로 선임한다는 통보를 받자, 즉시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헤리퍼드 주교, 팔케스 드 브레오테와 함께 다미에타로의 여정을 떠났다. 그러나 십자군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여정을 중단하고 1221년 겨울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왕실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교황 호노리오 3세를 설득해 헨리 3세가 성인이 되었다고 선포하도록 했다. 그러나 1223년 로마에서 피에르의 정적인 휴버트 드 버그와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이 받은 편지가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고, 피에르는 햄프셔 보안관 지위와 왕실 성 관리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1223년 12월, 피에르는 한 달 전에 휴버트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런던 탑을 접수한 제6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 제5대 허트퍼드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팔케스 드 브레오테와 레스터에서 회의를 열고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킬지 논의했다. 새로운 내전은 요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의 중재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양자간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에게 반기를 들려 한다는 이유로 파문을 선고하겠다는 위협이 전해지자, 그들은 반란을 포기했다. 그 후 호노리오 3세는 1224년 1월 18일에 헨리 3세에게 피에르를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1224년, 피에르는 베드퍼드 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팔케스 드 브레오테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휴버트와 힘을 합쳐 주변 땅을 약탈했따. 그너나 그는 이후로 모든 왕실 회의에서 제외되었고, 햄프셔 보안관 재직 기간 동안 모든 회계 기록을 전부 보내서 횡령한 사실이 있는지를 검증받아야 했으며, 1227년에는 왕실 재무부의 누적된 부채에 대한 책임을 지고 500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1227년 6월 또는 7월, 피에르는 엑서터 주교 윌리엄 브루어와 함게 제6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청이 갈등을 벌이자, 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했다. 그는 원정 기간 동안 잉글랜드군을 지휘해 시돈, 아슈켈론, 텔아비브의 십자군 성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229년 3월 예루살렘 입성을 허락받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피에르는 성 스테판 문과 다윗의 탑을 포함한 예루살렘 요새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을 외교적인 수단으로 되찾은 것에 공개적으로 지지했다가 예루살렘 총대주교로부터 비난받았고, 교황청은 그를 일시적으로 해임했다. 1229년 5월, 피에르는 황제와 함께 이탈리아로 향했고, 7월 29일에 로마에 입성한 뒤 교황과 프리드리히 2세 사이의 평화 조약 체결을 도운 뒤 복위했다. 그 후 2년간 교황청에서 지내다가 1231년 7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피에르가 잉글랜드를 떠나 있는 동안, 잉글랜드 왕국 행정은 휴버트 드 버그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수많은 적을 양산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3세의 불만까지 샀다. 피에르는 이 시기에 잉글랜드에 돌아온 뒤 헨리 3세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회복한 후, 최근 프랑스와 웨일스에서 벌인 원정이 실패한 건 휴버트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헨리 3세에게 새로운 재정 전략을 채택하고 통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헨리 3세는 1231년 크리스마스에 윈체스터에 찾아가는 등 피에르를 극진히 총애했고, 1231년 1월에 피에르를 왕실 재무부장으로 선임했다.

그 후 피에르는 휴버트의 영향력 감소를 이용해 친척 피에르 드 리보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했다. 피에르 드 리보는 1232년 여름에 여러 수익성 있는 부동산에 대한 많은 직위와 관리권을 받았다. 휴버트는 이에 대응해 1232년 7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대법원장으로서의 임를 보장하는 왕실 헌장을 발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휴버트가 잉글랜드 내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공모했다는 비난이 일었고, 헨리 3세는 7월 29일에 휴버트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스티븐 세그레이브를 새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새로운 왕실 관리들은 곧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용병 부대를 고용했고, 피에르는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과 함께 이들을 진두지휘했다. 1232년 말, 휴버트는 반역을 꾸민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뒤 데비지스 성에 투옥되었다. 뒤따른 숙청 과정에서 휴버트의 지지자들은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피에르의 추종자들이 빈 자리를 채웠다. 또한 1233년 초에는 친척 피에르 드 리보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헨리 3세는 피에르의 조언에 따라 휴버트에게 토지와 지위의 영구 소유를 보장하는 여러 헌장을 취소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피에르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모델로 삼고 잉글랜드에서 폭정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숙청을 자행하는 와중에 피에르의 동맹자였던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의 가까운 동료인 길버트 바셋이 해임되자, 리처드 마셜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1233년 봄 길버트 바셋이 반란을 일으켰고, 리처드 마셜도 곧 합류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1년 동안 내전에 휘말렸다. 여기에 피에르 드 리보가 재무부장으로서 몹시 무능한 바람에, 내전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결국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먼드 리치 및 여러 잉글랜드 주교들이 헨리 3세에게 리처드 마셜과 협상하라고 권고했고, 헨리 3세는 그들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그해 4월 초, 피에르는 왕실 업무에 간섭하지 말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몇 주 후 피에르 드 리보도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1235년 봄, 피에르는 해외로 떠난 뒤 프리드리히 2세와 합류해 로마 시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원정에 참여했다. 1236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중재 덕분에 헨리 3세로부터 잉글랜드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9월 29일에 도착했지만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죽음이 입박하자 유언장을 만들었다. 이후 생애 마지막 18개월 동안 라틴 제국을 구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설교했으며, 헨리 3세에게 시몽 드 몽포르의 권세에 대적하는 귀족들을 지원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1238년 6월 9일 파넘 사유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심장은 웨이벌리 수도원에, 시신은 윈체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검은 대리석 이미지로 장식된 그의 무덤은 오늘까지 살아 남았다. 그의 재산은 유언장에 따라 여러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빈민들에게 기부되었고, 그를 위한 추모식이 잉글랜드 전역과 투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 Prebend, 교회 사무실에서 수입을 관리하는 직책[2] Precentor, 앞서 예배를 원활하기 위해 앞서 노래하는 사람[3] 일부 국가에서 부과되는 교황을 위한 연례 의무 공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