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1 17:43:18

앵겔라르 드 시고니

성명 앵겔라르 드 시고니
Engelard de Cigogné
생몰년도 미상 ~ 1244년 3월 10일 이후
출생지 프랑스 왕국 켄트주 투르 주 시고니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직위 글로스터셔와 헤리퍼드셔의 고위 순회판사, 윈저 성주, 군 사령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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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군인.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에 존 왕헨리 3세 부자 편에 섰다.

2. 생애

프랑스 왕국 투르 남쪽의 작은 마을 시고니 출신이다. 삼촌 제라르 다테는 투르의 기사로, 존 왕이 잉글랜드 국왕이 된 직후 대다수 투르 귀족들이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를 노르망디 공작 및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한 것과는 달리 존 왕을 지지했으며, 노르망디 공국을 침략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 맞서다가 로슈 성 공방전에서 생포되었다. 1205년 존 왕이 1,000 ~ 2,000 마크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면서 풀려난 제라르는 자기 가족과 조카 엥겔라르를 비롯한 친척들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넘어갔고, 1208년 글로스터셔와 헤리퍼드셔의 고위 순회판사로 선임되었다.

엥겔라르는 1210년 제라르의 뒤를 이어 글로스터셔와 헤리퍼드셔의 고위 순회판사로 임명되었다. 1212년 귀네드 왕국허웰린 압 요르웨르스가 존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팔케스 드 브레오테와 함께 이에 맞섰다. 당대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는 엥겔라르를 왕의 형편없는 조언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했다. 존 왕이 영주들 대신 특별한 영지가 없던 총신들에게 여러 특혜를 부여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강한 반감을 품었다. 1215년에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존 왕을 압박하여 합의한 마그나 카르타 제50조에는 엥겔라르가 여러 사람과 함께 왕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간신으로 거론되었으며, "본인과 그의 모든 후손은 앞으로 잉글랜드 내에서 재산관리직을 가질 수 없게끔 완전히 대관직에서 추방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축출된 엥겔라르는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한 뒤 존 왕에게 재차 기용되었고, 1216년 4월 오디함 성과 윈저 성주로 선임되었다. 잉글랜드 반란군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된 루이 왕자는 8일간의 공방전 끝에 오디함 성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엥겔라르는 느베리 백작 에르베 4세의 공세에 맞서 2개월간 윈저 공방전을 치른 끝에 윈저를 지켜냈다. 1216년 10월 존 왕이 사망한 후 헨리 3세가 9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섭정을 맡은 윌리엄 마셜은 1216년 11월 12일 마그나 카르타의 개정판을 발행했는데, 여기에서는 엥겔라르와 그의 친척의 해고 요구가 삭제되면서 엥겔라르가 계속해서 윈저 성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남작 전쟁이 종결된 뒤 헨리 3세 정부에서 반란 진압에 기여한 공로 덕분에 상당한 위세를 떨쳤지만, 대법원관 휴버트 드 버그와 교황 특사이자 노리치 주교 판둘프는 1221년 4월 왕실이 소유히던 성의 수입을 횡령하고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엥겔라르를 고발했고, 엥겔라르는 이로 인해 1223년 말에 윈저와 오디함의 성주 직위를 상실했다. 그는 이에 분개해 휴버트 드 버그의 정적인 팔케스 드 브레오테를 지지했지만, 팔케스가 1224년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가담하길 거부했기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헨리 3세의 신임을 잃지 않았으며, 1225년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의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했다.

1233년 옥스퍼드셔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으며, 1234년 윈저와 오디함 성의 성주, 윈저 숲의 감시자, 버크셔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다만 그는 대리인에게 해당 직함의 임무를 맡겼고, 본인은 궁정에 그대로 머물렀다. 1236년 버크셔의 보안관직을 사임했고, 1242년 오디함 성의 성주와 윈저 숲의 감시자 직에서도 물러났다. 1243년 크리스마스에 헨리 3세로부터 충성스럽고 귀중한 왕실 신하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와인을 선물받았다. 1244년 3월 10일 왕에게 오스퍼드셔에 있는 벤슨 영지와 자금을 선물받았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