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보스턴 셀틱스 No.6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13 |
빌 러셀 "Bill" Russel | 윌트 체임벌린 "Wilt" Chamberlain |
[clearfix]
1. 개요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의 라이벌리를 다룬 문서.2. 상세
1999년 5월 26일,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 |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은 10년 동안 무려 143경기나 맞대결을 펼쳤다. 평균적으로 1년에 약 열네 번 이상 대결을 펼친 셈이다. 상대전적은 러셀이 86승 57패로 우세하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둘의 맞대결에서 체임벌린은 평균 28.7득점 28.7 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러셀은 평균 14.5득점 23.7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체임벌린이 더 우세하다.
1.빌러셀은 압도적인 우승 반지를 가졌다 [팀 적으로 강한 팀/선수들의 기량 밸런스가 매우 좋은 팀농구의 정석]
[다만,개인기록은 윌트 체임벌린에게 커리어 내내 라이벌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밀렸다/샐러리캡 제도가 없었으며
좋은 선수들은 보스턴이 독점하던 시절이였기에,체임벌린이 있는 팀이 그나마 비볐을 뿐,다른 팀들의 경우,보스턴에게 감히
비빌 수가 없을 정도
심지어 당시 파이널에 항상 진출하던 레이커스 조차 체임벌린 팀의 연고지가 서부로 바꼈던 시절,체임벌린이 이끌던
64년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게 막혀 파이널 진출을 못한 적이 있다/60년대 레이커스가 파이널 단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빌러셀과 체임벌린이 동부에 몰려 있었고,체임벌린을 보스턴이 정리해줬기 때문에,매번 파이널에 올 수 있었다/그로 인해
준우승 기록도 굉장히 많다]
2.윌트 체임벌린은 그 누구도 범접못할 기록들을 보유했다
[다만,우승 기록이 2개뿐,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스텟이 상대적으로 낮았고,심지어 레이커스 시절
체임벌린이 웨스트+베일러+체임벌린 빅3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늙고 병든 보스턴에게 졌었다
물론 그 이유는 위에 말했다시피 60년대는 보스턴에게 선수들이 집중되었기 때문
체임벌린이 빅3를 구축해도 보스턴 셀틱스는 그 늙고 병든 보스턴이라는 라인업이 빌러셀+샘존스+하블리첵+하웰
빅4 라인업이였다
60년대는 팀간 파워 밸런스가 비정상적으로 보스턴에 몰려있던 시절이다
플옵 스텟 또한,자신의 시즌 스텟 대비 낮은거지,전체적으로 보면 범접가능한 선수가 없다
전성기 시절 플옵 스텟 평균이 대략 35득 20리바 야투 50정도였으나,시즌 평균 40 20리바 50야투
단일 시즌으로 보면,50득 20리바를 기록한 시기가 있는데,플옵 스텟이 35득 20리바다 보니 억까를 당하는 것
결국 이 둘의 차이는
기량 vs 우승이다.
3. 구체적인 비교
윌트 체임벌린NBA 챔피언 2회 (1967, 1972)
NBA 파이널 MVP (1972)
NBA MVP 4회 (1960, 1966-1968)
올-NBA 퍼스트 팀 7회 (1960-1962, 1964, 1966-1968)
올-NBA 세컨드 팀 3회 (1963, 1965, 1972)
NBA 올스타 13회 (1960-1969, 1971-1973)
NBA 올스타전 MVP (1960)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2회 (1972-1973)
NBA 올해의 신인상 (1960)
NBA 올해의 득점왕 7회 (1960-1966)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1회 (1960-1963, 1966-1969, 1971-1973)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1968)
빌 러셀
NBA 챔피언 11회 (1957, 1959-1966, 1968-1969)
NBA MVP 5회 (1958, 1961-1963, 1965)
올-NBA 퍼스트 팀 3회 (1959, 1963, 1965)
올-NBA 세컨드 팀 8회 (1958, 1960-1962, 1964, 1966-1968)
NBA 올스타 12회 (1958-1969)
NBA 올스타전 MVP (1963)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1969)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4회 (1958-1959, 1964-1965)
윌트 체임벌린의 경우 압도적인 개인기량 vs 빌러셀의 경우 압도적인 우승
이 둘은 개인능력과 우승 커리어의 끝판왕들이다
4. 여담
- 뉴욕 닉스의 전설 월트 프레이저가 이둘이 NBA의 기반을 만든 장본인이라며 70년대 닉스가 NBA 최고의 팀이였을 당시에도 사람들은 윌트와 빌밖에 몰랐었다며 그 둘이 없었다면 오늘날에 NBA는 없었을 것이라 장담했다.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가 맞붙었던 1969 파이널 7차전에서 체임벌린은 43분을 뛰며 27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무릎 부상 때문에 4쿼터 막판에 벤치를 지켰고[1], 그 경기에서 제리 웨스트가 트리플 더블을 하며 분투했지만 끝내 보스턴 셀틱스가 2점차로 승리했다.[2]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해 몰랐던 러셀이 체임벌린이 벤치를 지키고 있던 것을 비난하면서 20년이 넘게 둘의 인연이 끊겼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국 노년이 되어 화해를 하기는 했고, 윌트는 그 후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5. 관련 문서
[1] 사실 48분을 전부 뛴 러셀과 웨스트, 존 하블리첵에 가려서 그렇지 체임벌린도 적게 뛴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당시 45.3분을 뛰면서 리그 1위를 기록했던 그가 우승이 결정될 수 있는 7차전 승부처에 뛰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던 것. 평상시 체임벌린 같았으면 당연히 48분을 다 뛰었을 것이다.[2] 이로 인해 제리 웨스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자팀에서 나온 파이널 MVP가 되었다. 물론 웨스트 본인은 그 수상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