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3:23

유보(서진)

劉寶
(?~301)
1. 개요2. 소개3. 일화

1. 개요

서진의 인물로 자는 도진(道眞).

2. 소개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노래를 잘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아름다운 악곡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하였다고 한다. 그 조상인 유우는 태축령을 지냈다. 출신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270년에 사마준이 진서대장군 도독옹량등주제군사가 된 이래로 관중을 진수할 때 사마를 지내고 있었다. 장사 환습 등 여러 관리들과 제갈량에 대해 논했는데, 다수의 관리들과 함께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해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해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곽충이 제갈량의 뛰어난 점을 얘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에 관한 5가지 일을 제시했는데, 유보를 포함해 다른 관리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 변경을 지켰으며 문장도 잘하고, 특히 경사(經史)에 능했다.《유보문집》 3권과 《역대사서고이》 두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중국학자 담정벽의 저서 '중국문학가대사전'은 유보를 문학가 반열에 올려 문무를 겸비한 역사적 명사로 평가하고 있다.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시와 글을 잘 썼으며, 진나라 황제는 태자에게 강해(講解)를 부탁했고, 《한서박의(漢書駁議)》 2권을 저술했다. 안사고가 쓴 《한서서례(漢書敘例)》에 따르면 중서랑, 하내태수, 어사중승, 태자중서자, 이부랑, 안북장군을 역임했다고 한다. 서진 영강 2년(301년), 산양군 고평인에서 죽었다.

1974년 3월, 유보의 묘지는 산둥성 쩌우청시에서 출토되었고 직위는 시중, 사대절, 안북대장군, 영호오환교위, 도독유병주제군사, 관내후로 써있다. 묘지는 국가일급문화재로 뼈로 만든 자나 바둑판, 청자(青瓷)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현재 이 유물들은 쩌우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 일화

세설신어 덕행편에는 죄를 지어 도형에 처해지면서 노역을 하다가 사마준이 오백 필의 베로 대속시켜 줬다가 종사중랑으로 기용하자 사람들이 훌륭한 일이라 여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임탄[1]편에는 유보가 젊었을 때, 초택에 가서 고기를 잡곤 했는데, 그는 휘파람과 노래 부르는 것을 잘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지 않은 자가 없었다. 어떤 노부인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고, 또 휘파람과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여 돼지를 잡아서 그에게 주었다. 유보가 돼지를 다 먹었는데도 조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으니, 노부인은 그가 아직 배가 부르지 않았다는 싶어서 또 돼지 한 마리를 그에게 주었다. 유보는 반만 먹고 나머지는 노부인에게 반납했다. 후에 유보가 이부랑을 지냈을때 노부인의 아들은 직위가 낮은 영사였는데, 유보가 그를 승진시켰다. 영사는 원인을 몰라서 어머니께 물었는데, 어머니는 그전 일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영사는 쇠고기와 술을 들고 가서 유보에게 감사를 표했고, 유보는 "가라! 가라! 다시 내게 보답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간오[2]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장화육기, 육운 형제에게 마땅히 찾아봐야 할 인사로 유보를 말했는데 육기가 그를 찾아갔을때 유보는 아직 부모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유보는 술을 매우 좋아하여 육기 형제와 상견례가 끝나자 애초에 다른 말은 꺼내지도 않고 '그대의 고향에는 목이 긴 호리박이 유명하다던데 그 씨를 가져오지 않았소?'[3]라고 다짜고짜 물었고 육기 형제는 매우 실망하여 그를 찾아간 걸 후회하였다.

어림에서 말하길 그의 나이 16살에 문앞에 있으면서 흙장난을 했는데 콧물이 드리워져 가슴까지 내려왔다. 소년들이 수레를 타고 지나가면서 저 소년은 심히 추회(塠𡋙)[4]하다 하니 유보가 곧 수레를 따라가면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잘못된 짓을 했는지 좋은 짓을 했는지를 물었고 너희 부모도 어렸을 때 추회(塠𡋙)했다고 했다.

태평광기에서는 계안록에서 가져와 유보가 어떤 노파가 노를 젓는 것을 보고 베틀에서 북을 놀리지 않고 강가에서 노를 젓냐고 조롱하자 자부가 말 타고서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 강가에서 배를 끄냐고 조롱당했다.

또한 다른 사람과 함께 초가에서 소반을 그릇에 담아 먹고 있다가 어떤 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천한 사람이 있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유보가 푸른 양이 새끼 양 2마리를 데리고 간다고 조롱했다가 돼지 2마리가 한 구유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고 조롱당하자 유보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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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림칠현을 중심으로 그들의 거리낌 없는 제멋대로 방임, 허탄한 방종스런 행동을 일삼는 것을 적은 편이다.[2]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고 오만하다.[3] 그러니까 상을 치르는 중에 술을 마시려고 술병으로 쓸 호로박이나 가져오란 소리다.[4] 𡋙는 여기서 무슨뜻인지 알 수 없다. 오늘날에는 민어방언으로 店앞에 붙여 자기상점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塠는 쌓을 퇴(堆)와 같기 때문에 심히 흙놀이를 하고 있네 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이에 유도진이 너희 아버지, 어머니도 어렸을 때 흙놀이를 하면서 지냈다고 말했을 수 있다. 또는 너희 아버지, 어머니도 어렸을 때 나처럼 콧물 흘리면서 흙장난하면서 심히 더러웠다고 했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