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3 18:02:41

유비의 입촉(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유비의 입촉
장소
익주
기간
213년 ~
교전세력 유비군 유장군
지휘관 유비
관우
장비
황충
법정
방통
유장
유순
황권
장임
냉포
상존
부금
양회
고패
병력 2만 4천 약 5만[1]
피해 규모 피해 불명 2만 이상

1. 개요2. 배경3. 진행
3.1. 부성~백마관3.2. 면죽관3.3. 낙성~성도 평야 전투3.4. 동오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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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원 역사 유비의 입촉을 다듬어 완벽한 명분과 밑준비를 끝낸 유비의 입촉을 위한 유장과의 전쟁이다.

2. 배경

유비는 서량 전투와 상용 전투로 마침내 한중 일대의 정리를 완성했다. 장완의 보조를 받는 마초는 점차 서량을 장악하고 있었고, 유비와의 동맹도 굳건해 스스로 자식들 둘을 맡기고, 명목상 동격인 것과는 달리 사적인 자리에서는 유비를 상사로 대우했다.

조조 역시 상용에서 악진이 무승부를 거두고 돌아오자, 굳이 무리해서 유비와 2차전을 벌이기보단 위공국 건국이나 유수구 전투 등 자신의 왕조 개창을 위한 정치적 행위에 집중했다.

또한 원 역사보다 훨씬 강력한 명분이 생겼으니, 바로 조조의 위공 즉위 행위였다. 유장의 선대 유언은 종친 직위를 이용해 익주를 차지했고, 유장과 유비의 우호 관계도 둘 모두가 한실의 방계라는 공통점에 기반했기에 유비가 조조에 맞서자고 요구하면 유장은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방통은 유장이 받아들인다면 5만 정병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고, 거부한다면 이를 명분삼아서 유장을 공격하기로 한다. 당장 인접한 장로를 치는데도 주력군을 동원하지 못한 유장이, 대 조조 동맹에 대군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전쟁은 시작된다.

3. 진행

3.1. 부성~백마관

상용에서 귀환한 유비는 관우에게 일군을 주어 파군을 뚫고 낙성에서 합류하게 하고 자신은 이미 준비를 마친채 대기중이던 2만 4천을 이끌고 빠르게 남진한다. 첫 관문인 부성을 지키던 유순은 8천 병마로 저항하나 아무리 공성전이라지만 병력 차이가 3배에 정예병인 동주병의 수가 너무 적었다. 백마관에서 지원오던 양회와 고패는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에게 역격당해 지원마저 끊어지자 사기가 떨어진 유순은 부성을 버리고 백마관으로 퇴각한다.
그러나 퇴각도 순조롭지 못했으니 양회와 고패를 격파한 장비의 계략에 넘어가 다수의 유비군이 길을 막은 줄 알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로 놓여있다 쫓아온 유비에게 잡힐 위기에 놓인다. 장임의 분투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나 기존의 관을 지키던 양회와 고패가 부성을 지원하려다 크게 패하고, 유순도 간신히 패잔병을 수습해 들어온 백마관이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을리 없었다. 다소 무리하는 걸 감수하고 즉시 공격한 유비군에게 백마관도 맥없이 함락. 파죽지세로 면죽관까지 나아간다.

3.2. 면죽관


성도가 가시권에 들어오고 면죽관이 열리면 성도의 방어 유지력도 무너지는 상황이 된다. 이 때 유비군과 각지에 조조의 복씨 일가 참살 소식이 들려온다.
면죽관 앞에 도달한 유비는 조조에게 살해당한 복황후를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명분을 강화한다. 이에 유비군의 기세와 조조의 찬탈이라는 유비의 경고가 사실임을 깨달은 인근 호족들이 유비에게 붙는다. 유장은 그런 유비를 영격하러 이엄에게 1만 군을 맡겨 보낸다. 그러나 남양 출신이라 지인들이 전부 유비 쪽에 있는데다, 한 황실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까지 등에 업은 유비와 싸울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즉시 투항하고 지원군이 항복하는 걸 본 면죽관도 백기를 든다.

3.3. 낙성~성도 평야 전투

어정쩡한 중책을 골라 3년이나 걸린 원역보다 훨씬 빠르게 낙성까지 도달하여 강주, 파군 일대를 돌파한 관우와 합류한다.[2] 이 때부터는 유장도 유능한 황권의 전략을 받아들여서 동주병을 주력으로 한 방어선을 치고, 외부에서 조조, 손권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 이 작전은 원 역사에서도 먹혀서 유비가 낙성과 성도 포위전에서만 연 단위로 고전하게 만든 전술이라서 유비도 난감해하며 군의를 여는 데 법정이 계책을 올린다. 우군의 기병 1500기를 우회시켜 성도 평야를 약탈하자는 것. 동주병의 재산과 가족들이 있는 성도 평야가 약탈당하면 동주변들이 방어로 일관할 수 있을리가 없다는 점을 찌른 간편하고 좋은 계책이었다. 그러나 관우가 정색하고 반대하고 장비가 중재하면서 일이 복잡해진다.
유비는 하룻밤을 지샌 고민끝에 원역사의 유비가 걸은 인의의 길을 선택. 법정의 계책대로 우군의 기병 1500기를 우회시키되, 약탈은 하지 않고 관우와 장비를 내세워 동주병을 끌어내 야전으로 격파한다는 정공법을 설립한다.
관우와 장비를 우회시킨 이후, 유비는 2만여 병력으로 낙성 공성전을 시작한다. 방통의 조언대로 동주병들이 실전에서 멀리 있었고, 충성심도 없는 이상 군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노려 가벼운 견제를 지속시킨다. 그러기를 며칠. 낙성을 우회해 성도 평야에 들어선 기병들이 짚단을 대거 모아서 불을 지르면서 수십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물론 이건 진짜가 아니었으나 낙성의 동주병들은 모두 과거 비슷하게 당하고 익주로 피난와 익주인들에게 비슷한 짓을 저지른 이력이 있었기에 패닉에 빠진다. 유비군이 이 때를 노려 진심으로 공격해오자, 동주병의 군기는 급속히 무너졌다.
1500기의 기병과 관우, 장비가 성도로 진격해오자, 동주병 지휘관 부금과 상존, 책사 정도는 대군을 출격시켜서 요격하고 그대로 낙성까지 합류시키는 것을 제안한다. 본래는 3만명 대부분을 동원하길 원했으나, 유장이 불안함을 느껴서 1만명만을 내준다. 부금과 상존은 1만 동주보병을 지휘해 성도평야에서 야전을 벌인다.
부금의 선발대 3천은 장비의 기병 1천기가 공격해오자 수레와 장창, 강노 부대로 반격에 성공한다. 잠시 후 상존의 본대가 합류하자 부금과 같이 준비를 해서 다시 유비군과 싸움을 벌이나... 관우가 몰아온 짐승떼에 의해 보병부대의 진열이 흔들리는 사이에 기병 돌격에 구멍이 나버린다.

사실 장비는 선발대와의 초전에서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덕분에 동주병의 진열은 자신들의 대기병 전술이 더 조밀하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을 모른 채로 유비군과 승부를 나서고 만 것이다. 상존은 대열을 뚫고 난입한 관우에게 목이 떨어지고 부금은 관우, 장비가 일부러 놓아준 줄도 모르고 낙성으로 달아난다. 수비를 책임진 장임이 제지하기도 전에 유순이 독단으로 이들을 성에 들였고 가뜩이나 후방 걱정에 침체되어 있던 동주병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다. 며칠간 느슨한 공격으로 시간을 끌며 낙성의 허실을 찾던 방통은 오랜 평화로 생겨난 사각지대[3]들을 찾아내었고 황충이 이끄는 공격부대는 손쉽게 성벽에 다가가는 데 성공하고 성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함락시킨다.

3.4. 동오의 개입

낙성이 열린 이상 성도성까지 대군이 사용할 길이 열렸고, 광한성도 2천 정도의 병력으로 포위한 이후 유비군은 천천히 익주를 차지할 방안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때 형주에서 급보가 전해지는데 다름 아닌 동오군의 침공이었다. 제갈근이 익주에 사신으로 와 형주 반환을 요구했고, 대도독 노숙이 여몽, 감녕 등을 지휘해 3만 대군으로 장사, 계양을 들이치고 있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장비와 법정, 방통을 1만 5천 병력과 같이 낙성에 남겨서 유장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2만 병력을 이끌고 관우와 함께 형주로 떠난다. 남형주 임상 방면에서 대치가 길어지며 익주 전선은 암묵적인 휴전 상태에 들어간다. 유비가 자리를 비운 3개월 간 낙성을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성도의 수비병 2만 남짓에 쫓겨온 패잔병이 가진 세력의 전부인 유장은 이미 동주병을 야전에서 크게 깨뜨린 유비군을 상대로 도박을 거는 대신 가만히 지키는 쪽을 택한다.


[1] 정예 동주병 약 3만.[2] 부성에서 백마관-면죽관-낙성&광한성-성도 순으로 쭉 이어진다.[3] 성 주변 땅을 고르게 다져 엄폐할 수 없도록 해야 하는데 오랜 시간 정비하지 않은 동안 야트막하게 경사진 부분이 생겨나 그 아래 몸을 숨기고 성벽 아래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