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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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대체역사, 빙의 |
작가 | 간절히 |
출판사 | KW북스 |
연재처 | 문피아 ▶ |
연재 기간 | 2024. 12. 09. ~ 연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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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삼국지 대체역사물 웹소설. 작가는 간절히.약칭은 유비쟁패.
2. 줄거리
촉빠였던 곽선호
유원지에 생긴 싱크홀에 빠져 후한 말 군웅 중 한 사람인 유비의 몸에 빙의하게 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략
강대한 조조, 견고한 기반을 가진 손권과 대결해 천하쟁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유원지에 생긴 싱크홀에 빠져 후한 말 군웅 중 한 사람인 유비의 몸에 빙의하게 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략
강대한 조조, 견고한 기반을 가진 손권과 대결해 천하쟁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4년 12월 9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2025년 2월 3일부터 유료화 되었다.4. 특징
중국 중세사 석사 학위까지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20년 진성 촉빠 곽선호가 웹상에서 촉빠들이 위빠와 오빠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상황을 한탄하다가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 직전의 유비에 빙의하는 소설.[1]이전 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요 등장 인물들의 행동 양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조가 말년에 찬탈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손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유비를 배신하는지, 관우는 왜 무리를 감수하고 북진을 했어야만 했는지 곽선호가 빙의한 유비가 백년 뒤의 참극을 막기 위해 당장 비효율적인 선택지를 고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적절한 사례와 함께 설명한다.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익주 가맹현에서 한중의 장로를 친다면서 출병은 안하고 와병하는 척 군대와 물자를 모으던 건안 17년(212년)쯤 시점이다. 빙의한 곽선호는 일견 보기엔 제갈량의 융중대가 주장한 입촉이 합리적 전략 같지만 실제론 단점이 명확하다는 점을 파악하고[2][3] 입촉 대신에 유장과의 약속대로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삼국이 완전히 정립되고 마주칠 전선이 굳어진 이후의 이야기인 내마속은 유비-조조 시대에 활약한 쟁쟁한 무장들은 소수만 남기고 전부 퇴장한 대신 초반부터 1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고 한 번 전투에 수만씩 맞부딪치는 데 반해 삼국 정립 직전에 시작되는 본작은 쟁쟁한 1세대 네임드들이 활약하는 대신 조조군 본대를 제외하면 한 번에 동원하는 병력 규모가 적은 편이었다가 북원 대치에서 유비군 5만, 조조군 8만이라는 대군 동원이 이루어졌다.[4][5]
213년에 시작해서 219년의 집중 호우를 하이라이트로 잡고 있다보니 진행 속도는 간절히의 이전 작품들의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다. 제목이 천하통일이 아니라 '쟁패'고, 작가의 전작인 내마속과 헉조괄에서 주인공 대에 비통일 엔딩을 낸 사례가 있다는 점, 조조와 유비의 수명 문제 때문에 유비 생전에 천하를 통일하지는 않을 거라는 가설이 있다.#
5. 등장인물
5.1. 유비군
주인공 유비의 세력권. 동오와 함께 얻은 형남 삼군에서 시작해 세력을 키운 다음 한중을 차지, 한중을 기반으로 해 다시 서량에 영향력을 뻗치고는 형남과 한중에 있는 주력군 대부분을 동원해 입촉한다. 즉 213년 기준 현재 세력권은 한중과 형남. 익주 북쪽인 파군과 서량 일대도 점령하거나, 동맹을 통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15년 기준으로 형남을 2군 분할, 익주를 정복했다.세력으로서의 목표는 당연히 조조 격파와 한실 부흥. 이를 위해 실행중인 대전략은 제갈량이 세운 융중대. 입촉 직전의 동원력은 한중에서 2만. 형남 2군에서 3만. 익주에서 7~8만명 가량이다.[6][7] 조위 혹은 동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3만여의 병력이 형남에 남겨졌다.
익주 정복 후 조조의 역적 짓에 저항하는 이들을 받아들여 모병군을 편성하고, 수송선을 위주로 200척이 넘는 대선을 건조해 수군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다.[8]
내부 계파는 유관장 삼형제를 필두로 거병 초기, 객장 시절에 합류한 이들[9], 형주계[10], 익주계[11]로 구성된다.
5.1.1. 익주
한중을 먼저 차지하고 서량에서 마초 구원에 성공한 뒤 관우, 장비를 소환하고 위연을 한중태수로 배치한 후 입촉을 시작했다. 임상대치 이후 유장의 항복을 받아 근거지를 성도로 옮겼으나 북벌의 중심지로는 거리가 먼 성도보다는 3주를 잇는 교통 요지 한중이 적합하기에 익주가 안정화되면 다시 한중으로 치소를 옮길 예정이다.원 역사에서 조조가 장로를 정벌한 이후 한중 백성들을 몽땅 이주시키는 바람에 유비가 점령 이후 한중을 처음부터 재개발하느라 시간과 돈이 빨려들어 형주 쪽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유비 생전에는 개발이 안 되서 제갈량 시기에 가서야 군사도시로 자리잡는데 여기서는 한중을 먼저 차지한 덕분에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마초가 이끄는 반조조 군벌을 지원하거나 상용으로 넘어온 악진군을 영격하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입촉 직후부터 유비의 후원 아래 익주인들이 주도하는 대대적인 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원 역사에선 촉한 말기에나 안정 되는 남중 지역도 일찌감치 수혜를 입을 전망이며 형주계와 익주계의 대립도 유비라는 중재자 아래 없거나 원역보다 크게 완화될 전망이다.
유비는 융중대 실행 시 한중의 수로를 이용해 상용-양양으로 이어지는 북벌을 계획하고 수군을 대거 양성한다.
- 유비(곽선호)
- 방통
유비군의 책사. 정략과 군략 양측에 뛰어나 빙의 직후라 정신없는 유비 대신에 군사 작전 시에 총지휘를 담당한다. 본래 유비의 명령대로 입촉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전략을 바꿔 한중 정벌을 주장하자 그쪽이 마음에 든다면서 바로 찬동한다.[12][13] 한중 공략에서 전황을 읽고 공격을 정하는 등 활약하고 이후 서량 진출에도 유비의 책사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동참한다.
자기 눈으로 전장을 봐야 하는 현장파 책사라서 아직 전투 중인데도 말을 몰고 적진 가까이 가는 등 위험한 면모를 보여서 유비가 늘상 호위를 붙여놓는다. 원 역사에서 어이없이 유시에 맞아 죽은 이유도 마음이 급한 데다가 이런 성향의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담백한 성품으로 상용 전투에 종군할 군사로 법정을 추천하며 먼저 양보해주었다.
상용에서 귀환한 유비가 본격적인 익주 정벌을 시작하자 다시 종군을 시작. 정예 병력으로 빠르게 친다는 전략을 완벽히 성공시키며 부성, 백마관, 낙성을 연달아 함락시킨다.
성도 정복 이후 유비가 유파를 불러 회의하는 자리에서 동탁의 사례를 우려해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직백오수전 발행 이야기를 끊어버리지만 이어진 회의에서 유파가 보다 상세한 근거로 논의를 전개하자 수긍한다. 군사제도 논의에서는 법정이 제안한 병호제를 지지했으며 손권이 조만간 배신할 것이라는 유비의 예견에 법정, 황권과 함께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다.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는데 익숙한 참모들 생각에는 손권이 조조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 한중 도착 후 진군로를 두고 회의할 때는 기산도를 밀었다.[14] 유비의 의중대로 야곡도->위수 도하에 성공하자 법정과 합을 맞춰 장안을 직공하는 척 하며 진창을 치는 기만전술을 펼친다. 두 참모의 기만 전술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유비조차 긴가민가 할 정도. 진창 공방전에서는 법정이 전선에 가있는 동안 후방에서 유비를 보좌한다. 유수구의 역병 확산에 더해 황권과 관우가 조홍을 격파하고 지원오자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확신한다.
- 장비
입촉을 준비하던 유비가 관우와 함께 불러들인다. 명사를 우대하고 교류하기 좋아하는 성격답게 서량으로 떠난 마초를 만나지 못한 것을 크게 아쉬워한다. 평소 상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갖고 있을 정도로 서예에 능해서 발굴된 죽서기년을 필사하는 일을 맡게 된다.[15] 단순한 둘째 형과 달리 용맹하면서도 때론 약삭빠르게 행동할 줄도 알아 부하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 말고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장.
익주 공략이 시작되자 기병 200기로 샛길을 타고 부성을 우회, 백마관에서 지원오던 양회와 고패의 4천 병력을 급습한다. 훈련도가 낮은 익주군 보병이 대열을 갖추기 전에 난입해 진용을 무너뜨린 다음 양회를 참살하고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다. 백마관의 군사를 깨뜨린 뒤에도 퇴각하는 대신 길목을 차단한 채 아군의 수를 많아 보이게 하는 기만 전술로 부성에서 후퇴하는 유순의 군대를 붙잡고 있었고 유비가 뒤따라와 이들마저 격파해 백마관을 손쉽게 함락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관우가 법정의 초토화 전술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자칫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끼어들어 수습해낸다. 유비가 파괴 행위는 지양하되 기병을 활용한 흔들기 자체는 시행하고, 동주병이 요격을 위해 출진하면 야전에서 격파하는 전략을 택하자 둘째 형과 나란히 자원했고 전력을 숨기는 낚시 전술을 통해 부금과 상존의 동주병을 대파한다. 그 이후 유비와 관우가 동오의 통수를 막기 위해 급히 형주로 가면서 1만 5천 병력으로 낙성을 지키며 유장군을 견제한다.
식자나 호족들에게 (설사 그럴 의사가 없어도)말이 거칠게 나가는 둘째 형에게 걱정이 많아 충고해주곤 한다.[16] 반대로 관우는 병사들의 작은 과실 하나까지 넘어가주는 일 없이 꾸짖고 처벌하는 동생에게 걱정이 많다.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고,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틀어질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함께 다닐 때 시너지가 무척 좋다. 자신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1만 동주병을 형과의 협격으로 가볍게 박살내어 유장과 동주병의 군심을 뒤흔들어 놓는다.
사람을 대할 때 능력에 따라 급을 나눠서 대하는데 자질이 인정할 만한 수준이라면 유파처럼 유비한테 대놓고 충성을 안 하는 인사라도 숙이고 예를 차리지만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명사건 뭐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17] 다만 이 때 상대를 향한 배려가 부족해서 원역사처럼 유파와 험한 말 오가는 상황을 막고자, 유비가 특히 주의를 주었다.
서량으로 출병할 때 황충, 위연과 함께 참전했으며 오환족을 유인해 위연의 도하가 쉽도록 돕는 한 편 유비에게 정예기병 300기를 받아 병주로 탈영했다 사로잡히게 생긴 오환왕 노석을 구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시킨다.
- 황충
유비군 장수. 형주목 유표의 중랑장으로 조조에게 형주가 넘어간 이후 형남 공방전 때 유비 산하로 들어온 인물. 노장임에도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서 한중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도 서량의 기성에 일꾼으로 위장하고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내는 활약을 보인다. 천성이 선량한지 악행을 저지른 호족들과 조조군을 상대할 때 유독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굉장한 명궁으로 화재현장의 난장판 속에서도 언뜻 보이는 실루엣으로도 활을 쏘아 준수한 명중률을 보이고, 제대로 쐈을 때는 막는 것이 아니면 빗나갈 일이 없다. 입촉에서도 앞장서서 군을 이끌며 여러 성을 점령하고 있다.
입촉 이후 익주인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서량 전쟁에서도 유비를 수행한다. 진창성 전투 시점에서는 주장이 되어[18] 원역사 한중 공방전에서 함께 한 법정과 절묘한 호흡으로 적장 하후연을 참수한다. 이후에도 서황이 두번을 속을 인물이 아님을 눈치채고, 진창성 입구를 차단해 조조군의 항전 가능성을 끊는다. 이후 조조의 본대가 당도하자 유비에게 병력 1만을 받아 법정과 함께 오장원을 지킨다.
- 위연
형주 출신의 유비군 장수. 뛰어난 무예와 전술안을 가진 맹장으로 어지간한 무인이나 병사 몇 명 정도는 혼자서도 가볍게 참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호전적인 성격으로 한중군 정벌에 활약하고는 마초가 유비군이 서량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자 유비가 미리 준비한 보군 2천을 데리고 마초를 끓리겠다고 호언장담할 정도.[19] 이후 기성에 황충과 함께 잠입해서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을 베어버리고 마초의 가족들을 구한 뒤 유비와 마초의 원군이 올 때까지 기성을 지켜낸다. 서량에서 귀환한 후 유비가 익주를 정벌하는 동안 한중을 지킬 장수로 낙점된다.[20] 한중에 도착한 유비군 수뇌부가 진군 방향을 두고 진창도와 야곡도를 두고 씨름할 때 자오도를 제안했다가 장비를 위시한 상관들에게 한 소리 듣고 바로 꼬리를 내린다.
그대로 유비에게 합류해 서량으로 출진. 유비가 북원을 점령할 도하 부대를 보낸다고 하자 직접 나서서 부대를 지휘해 도하한다. 도하한 후 뒤늦게 달려온 오환 정찰병 2백기를 격파하고, 왕이 부재한 오환족이 주력군을 보내지 못한 사이에 진지를 설치해 그대로 북원을 점령해버린다. 이후 북원 방비 임무를 맡아 진창성에는 함께 가지 못한다. 공세지향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즐기는 점은 나이들어서와 같지만 하늘 같은 상관들이 우르르 줄 서 있는 시절이라 언성 높아지면 끽소리도 못 하는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 유봉
유비의 양자. 형주에 있다가 두 숙부와 함께 한중에 들어온다. 상용에서 관우를 보좌할 부장으로 천거되었으나 원 역사의 행적이 찜찜했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 관평
관우의 아들. 상용으로 출병한 아버지를 보좌해 보병대를 지휘한다.
- 요화
관우의 부장으로 등장. 처음에는 주창이었는데 정사 베이스면서 왜 연의에서나 나오는 가상인물을 등장시켰냐는 지적에 요화로 수정되었다.[21] 다만 요화는 한중 공방전 당시 합류했기에 이 시점에 오랫동안 관우의 부장을 했다는 서술과 함께 등장한 것은 오류다. 차라리 조루였으면 기록이 없어 작가가 얼마든지 이력을 창작할 수 있어 오류가 아니였을 텐데 아쉬운 부분.[22]
- 왕평
파군으로 진군한 관우와 인연이 닿아 유비군에 사관한다.
- 풍습, 부융, 장남, 조융
원 역사에선 이릉대전에서 전사하는 유비군 2세대 장수들. 시작 시점에선 부장으로 잡다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휘력은 검증되지 않았으나 무예와 용맹은 다들 뛰어나서 소규모 단병접전에선 탁월한 면모를 보이며 하후연의 기병대에 기습당했을 때도 방통의 지휘 아래 악착같이 버텨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후 입촉에도 종군. 부성부터 낙성까지 주요 전투에 쭉 종군하며 공을 세운다. 풍습은 관우, 장비를 보좌해 성도를 위협하는 별동대로 활약하고, 부융은 방림과 광한을 공격하는데 투입되는 등 꾸준히 지휘 경험을 늘려가고 있다.
- 오란, 뇌동, 진식
유장 휘하에서 유비측으로 넘어온 항장들. 원역에서는 셋 다 한중 공방전에서 적은 병력으로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가 오란, 뇌동은 전사하고 한중에 이릉까지 거치며 구사일생한 진식만 제갈량의 북벌 시기까지 살아남아 음평, 무도 병합에 공을 세웠다. 이민족 기병을 지원받은 염행이 공세를 시작하자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떠나게 된 황권의 부장으로 임명된다. 유비는 원역에서 죽거나 패했던 셋을 내보내기 망설였으나 익주 출신 중에 주장급인 황권과 장임을 빼면 이 위치에 들어갈 다른 사람이 딱히 없고 원역사처럼 불리한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에 믿고 내보낸다.
- 방림
방통의 아우. 부융과 함께 군마 2천을 끌고 광한에 고립된 황권에게 낙성 함락 소식을 전하며 항복을 권한다. 낙성과 달리 성곽의 견고함이나 방어 시설이 열악한 광한성을 서둘러 공격하는 대신 천천히 옥죄는 전술을 택하는데 하필 손권이 유비의 뒤통수를 치면서 계획이 어그러진다.
- 법정
유비와 협력하는 익주의 참모. 방통과 달리 위험하겠다 싶으면 즉시 뒤로 빠지는 성격이다.[23] 유비가 서량에 가있는 동안 혹시 모를 유장의 배반에 대비해 백수관을 지키고 있었으며 유비가 한중으로 돌아온 후에 익주 정벌 논의를 위해 불러들인다. 이때 악진이 장로를 데려오기 위해 상용으로 오자 상용에 파견할 장수로 관우를 추천했으며 방통의 양보로 상용으로 가 유비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후 상용 전투에서 관우에게 밀리는 척하면서 함정을 파는 악진의 움직임을 즉시 파악하고 보병대를 이끌고 대응해 무승부를 이끌어낸다. 상용에서 귀환한 뒤 입촉에 동행해 방통과 함께 군사참모로 활약하는데 이때 낙성을 앞에 둔 유비에게 정예 기병대를 샛길로 침투시켜 성도 인근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초토화시켜 싸우지 않고 낙성을 무너뜨리는 계책을 알려주나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자 한 발 물러선다.
보복 정신의 소유자로 유명한 것과 별개로 자신이 유비군에 갓 임관한 외부인사임을 잘 알고 있어 기존 유비군 중진들, 특히 최고참 관우와 마찰 빚을 일은 최대한 피한다. 관우, 장비가 별동대를 이끌고 떠난 뒤에 황충과 함께 낙성 공략에 참여했고 입촉 성공 이후에 군사 정책 논의에서 조조의 청주병을 본딴 병호제를 지지하며 기존의 동주병을 병호로 발전시킬 것을 조언하나 유비는 그것이 효율적인 대책임을 알면서도 거부한다. 서량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진군로를 두고 갑론을박할 때 진창도를 제안했다.[24] 유비의 의중에 따라 야곡도로 나아간 다음에는 방통과 협력해 군략을 총괄하며 진창성 전투에서는 원역사의 한중 공방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황충과 움직인다. 원역사의 한중 공방전과 같은 차륜전으로 하후연, 서황과 격전을 벌이던 중, 조조의 발목이 묶이고 위수를 따라 원군이 들어오자 승리를 확신한다. 이후 일부러 물러나는 척해서 하후연을 끌어낸 다음 완벽한 역공으로 하후연을 참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조조군의 본대가 서량으로 향하자 황충과 함께 오장원에 파견된다.
- 장완
유비 휘하의 문관. 본래는 유비의 익주 정복 이후 두각을 드러낼 인물이나 이번에는 유비의 한중 정복에 따라와 행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비는 장완의 존재를 안 이후 빨리 승진시켜 중하게 쓰고 싶어했지만 주변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위험천만한 기성 주둔을 자원하도록 유도한다. 그러자 유비의 기대대로 마초의 속내를 파악해 먼저 방통에게 보고했고, 이후에도 마초군에 종군하며 의견을 올려 활약한다. 유비의 평가에 따르면 현령처럼 '심심한 일거리'보다는 실수하거나 늦으면 죽는 전쟁 보급처럼 스릴 있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인재라고 한다.[25]
장리천 전투에서 마초에게 조언하면서 그에게 인정받아 전투 이후엔 빈객으로 초대되어 책사 역할을 맡게 된다. 마초의 말에 따르면 장완이 없으면 천수군의 일처리가 안될 정도라고 하니 원역사에서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 습정, 뇌공
유비 휘하의 문관. 뛰어난 행정가로 이 둘과 휘하의 장완 등을 비롯한 서기들 덕에 유비는 마초와는 달리 행정적으로도 서량을 잘 흡수하고 있다. 다만 경험과 인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지라 둔전 등의 업무는 잘 진행되지 못했으나 장리천 전투를 계기로 많은 강족과 저족이 합류하면서 둔전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될 여지가 생겼다. 여담으로 습정은 습착치의 조부인 만큼 죽서기년을 보고서 바로 그 가치를 알아챘다.
- 반준
형주의 유력 인사. 제갈량에게 영릉 태수를 맡길 만한 인물로 학보와 나란히 추천받으나 오나라에 투항하는 그의 행적이 마음에 걸린 유비는 대신 등지를 파견한다. 임상 대치가 마무리 된 후 미방, 부사인과 함께 유비를 따라 입촉한다. 장사, 계양을 양도하며 형주에 필요한 일손은 줄었는데, 성도를 점거한 뒤 익주 전체를 관할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셋은 자신들을 입촉 대상으로 지목한 것에 의혹을 품진 않았다. 관우전과 여몽전의 기술이 달라 적극적 배신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부사인과 달리 반준은 적극적 배신자는 아님이 유력하고 문무 양도에 뛰어난 인물이라 무난하게 관직 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 미방, 부사인
강릉, 공안을 수비하던 유비군 장수들. 미방은 미축의 동생이므로 유비와 사돈이고, 부사인은 관우가 아끼는 측근이다. 원 역사상 둘의 배신에는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는데 유비는 상황에 떠밀렸을 뿐이라 여기면서도[26] 아예 익주로 데려가 배신의 싹을 잘라 버린다. 끝이 안 좋긴 했으나, 어쨌든 유비군에서 한 개 성이나 수천 단위 병력의 군사,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이라서 무난하게 관직 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 양앙
장로 휘하의 장수. 제대로 된 정병이 없는 한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병력을 이끌고, 병법을 아는 장수라고 한다. 그래서 유비가 붙인 별명이 오두미도 팔라딘. 그러나 유비의 한중 급습 당시 유비가 익주를 노릴 거라 생각한 장로에 의해 수천 병력과 같이 마초를 도우러 북상한 상태여서[27] 한중이 넘어가는 동안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량에 발이 묶인다. 이후 유비가 서량에 진입하자 유비와 대면하게 되며 유비는 한중군민들의 편지를 주면서 양앙을 포섭한다.
- 유파
유장 정권의 관료. 본래 유표의 객이다가, 유표 사후 유비를 따르지 않고 조조 산하에 속했다가, 적벽대전 이후 조조에 의해 형남에 파견된 차에 지원도 못 받고 유비한테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다시 성까지 바꿔가며 교주까지 도망쳤다가 촉에 들어왔다. 그러나 유장이 패한 이후 결국 유비 산하에 들어오게 된다. 원 역사에서도 입촉 직후의 혼란을 잠재우는 데 공헌한 사람으로, 유비는 유파만 믿고선 성도의 보물, 물자 창고를 싹 다 포상으로 털어버렸다.(...)
민생 관련 논의해서 텅 빈 재정을 채울 대책을 찾는 유비의 질문에 직백오수전을 발행하자는 안을 올린다. 오수전의 100배 화폐를 발행하자는 소리에 주변인들이 동탁의 사례를 들며 전부 반대하지만, 유파는 민생을 생각하면 안하는 게 맞지만, 군비를 짜내려면 이게 맞다. 익주는 기초적인 경제기반(농사,비축물자)이 튼튼해 장안과 경우가 다르다.[28]고 대답해 모두가 인정한다.
원래 역사의 직백오수전은 대규모 전쟁으로 텅 비어버린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익주를 수탈한 촉한의 대표적 학정으로 평가받으며, 본역사의 유비도 결국은 수탈이라고 인정한다. 다른 점은 형주 상실과 이릉대전 참패로 그렇게 얻은 예산을 다 날리고 날개가 꺾여버린 촉한과 달리 더 신속하게, 적은 피해로 익주 정벌 + 조조가 먼저 한중을 점령해 백성을 전부 이주시켜버려 바닥에서 재개발해야 했던 원 역사와 달리 한중을 선점 + 이미 서량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빠른 확장이 용이한 상태라는 것. 당장 백성들이 힘든 건 사실이나 받아가는 쪽에서 할 말이 있고, 내는 쪽에서도 성과가 보이니 한 발 물러서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확보한 예산을 군비에만 다 쓰지 말고 익주 전체의 개발에도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도 덧붙이고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시장 개설과 도강언 개보수 등 각종 사업을 벌여 중하급 관료 1,200여명을 추가 선발케 하고 이들을 뽑고 사업을 진행하는 역할을 익주 토박이들에게 맡겨 인심을 산다.
유비가 싫지만 그렇다고 그걸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신념형은 아니고,[29] 싫은 티 내면서도 시키는 일은 꼬박꼬박 해내며 비지니스 관계를 구축한다. 유비의 병호제 거부에 익주 출신이나 기존 측근들 모두가 우려하는 와중에 혼자만 무표정으로 있으면서 유비가 징병제 관련 일을 시키자 알겠다고 답하며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아마 유비에게 충성심이 전혀 없어서 뭘 어쩌든 관심이 없는 탓에 그랬을 것이라 이를 눈치챈 유비가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 장예
유장 정권에서 일하던 관료. 유파를 잇는 경제 관련 전문가로, 촉한 시대 그의 활약을 알고 있는 유비는 장예를 불러 촉금 생산량을 늘리라고 명한다. 장예는 익주-동오의 수요로는 공급을 늘려봤자 팔 곳이 없다고 진언했지만, 원 역사에서 조조가 말년에 사치를 유행시키면서 조위가 이후 수십년간 촉금에 막대한 돈을 쓴다는 걸 알기에 걱정하지 말라면서 생산량 증대를 실행시킨다.
- 장위
장로의 동생. 오두미도 대좨주. 고령인 형 장로를 대신해 한중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 유비군이 쳐들어오자 2만 병력으로 양평관을 틀어막았으나, 사관계층이 부족하고 정병이 부족했던 탓에 유비군의 기습을 막지 못하고 퇴각한다.[30] 이후 정군산에서 군세를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해온 황충에 의해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포로가 된다.
5.1.2. 형남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주유를 위시한 동오의 지원을 받아 얻은 땅. 인구가 많은 북부는 조위의 영역에 있으나, 유비가 기반을 다지고 여러 인재들을 모은 중요한 지역이다. 원 역사처럼 손유간 분란이 될 소지가 높은 땅인데 유비(곽선호)는 익주를 오롯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조조 사망에 맞춰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 진격하기까지 몇년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여기며 영영 자기 것으로 만들 생각은 최소한 217년 시점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형주 절반 가량만 차지한 상태에서 관우, 장비, 유봉을 한중으로 소환하여 전력이 더 줄었다. 전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지리적 이점을 거머쥔 손권이 언제든 쳐들어 올 수 있고, 이걸 격파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함을 아는 유비는 최대한의 대비책을 마련한다.
거리상 동오의 대군이 닿기 전에 구원이 불가능한 장사와 계양 방어는 포기,[31] 형주 서남쪽 끝의 영릉엔 심지 굳은 등지를, 익양 끝의 임상현으로 이어지는 개울에 보루를 세우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다. 결국 215년에는 원 역사보다 동오쪽에 가까운 임상에서 벌어진 임상대치로 동오의 공세를 격퇴하면서 원 역사보다 대등한 상황에서 장사, 계양군을 분할하고 후일을 대비하여 쇠사슬 작전 등을 입안했다.
- 조운
관우와 장비가 한중으로 소환되면서 형남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무관으로 선임된다. 이후 임상대치 때 유비와 재회하여 마침 임상으로 직접 파견된 관우를 대신해 유비를 보좌했다. 인재가 부족한 유비군에서 모병, 훈련, 호위, 감찰에 손부인에게 납치당한 아두 구출작전까지 온갖 실무를 다 도맡아 수행하며 혹사당하고 있었는데 임상 대치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대별산맥 인근에 숨어둔 반 조조 반란군을 훈련 시켜주라는 지시까지 받는다.[32] 이후 서량 전쟁 시기에는 망명 인사와 반군들을 받아들여 형남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자 일부 업무를 줄이고 조운은 소수 병력으로 형북 양양성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몇번 양양성을 찔러보지만 조인의 방어가 너무 굳건해서 지상군 단독으로 꺾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제갈량에게 전달한다.
- 진도
관우와 장비가 한중으로 소환되면서 형남에서 조운과 함께 제갈량을 보좌할 무관으로 선임되었으며 조조를 피해 도망오는 여남군 유민들을 동향 출신의 지식과 인맥으로 위장귀순이 아닌지 조사하거나, 군에 받아들여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는다.
- 등지
장래 촉한의 중신이 되는 인물. 죽서기년 발굴을 위해 위나라 땅인 하내군에 가야 하기에 유비가 비밀리에 불러내어 밀정 임무를 맡긴다. 도적떼와 부딪히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33] 인원 손실 없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때의 공과 외교, 군사 양쪽에 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상용에도 동행, 신씨 형제와 유비 사이를 오가는 사자 역할을 맡는다.
상용에서 돌아와 익주 정벌에 나서기 직전, 동오의 형남 공격에 대응할 담력 있는 지휘관을 물색하던 유비는 원역사에서 익양대치 당시 항복해버린 학보를 대신해서 마침 공도 세운데다 남양 출신이기까지 한 등지를 영릉 태수로 파격 승진시킨다.[34] 이후 유비가 등지에게 딱 한 달만 버티면 항복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당부하자, 등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릉을 지켜낼 것을 다짐한다. 태수가 된 후 유비의 지시대로 군사 훈련 및 성을 수리하는 일을 철저히 챙겨 영릉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치던 중 여몽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을 잘 다독여 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 학보
형남의 유력 인사. 반준과 함께 영릉태수 직을 맡을 만한 인물로 제갈량이 추천하나 익양 대치를 대비하던 유비는 (적극적 배신은 아니지만)오나라에 투항하는 반준과 학보 대신 등지를 파견한다.
- 요립
장사태수. 익주와 남군 방면으로 주력군이 차출되어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 밖에 없었던 장사군에서 어렵사리 2천 군사를 모아 여몽측에 맞서보려 했으나 훈련이 전혀 안 된 오합지졸이라 금새 흩어져 버렸다. 주력군이 다 빠진 상황에서 성을 못 지키는 게 당연함을 아는 유비는 죄를 청하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 관우와 함께 임상현을 수복하게 한다. 이때 진짜 쌓인게 많았는지 수복전에 의욕적으로 참여해 임상성 성문에 대놓고 나서서 당장 문 열라고 외쳤다고. 이렇게 수복한 덕인지 서량 정세가 흔들려 이뤄진 타협으로 임상성이 동오에 넘어가게 되자 분함을 숨기지 못한다. 사서에서는 모난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유비는 그렇게 된 게 순전히 천성이 못 되어서라기보단 평판 꼬이고 승진 경쟁에서 밀린 스트레스 탓도 있다고 봐서 일부러 임상 수복에 동행시켜 공을 세우게 하고 체면을 살려줬다.
5.2. 서량
관도대전에 승리한 조조 산하에서 통치되다가 마초가 이끈 관중제장의 난을 통해 독립을 원했으나 결국 패배해 조조에게 굴복한 지역. 그러나 마초가 재차 거병해 유비와 동맹을 맺고 계속되는 전투 끝에 다시 반 조조 진영으로 돌아섰다. 유명한 기병 산지로 이민족 병사들과 부대끼면서 쌓인 군사력이 강점이나 경제력이 부족하고 대대로 자립성이 강해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력 토호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이미 패배한 마초를 포기하고 조위파로 돌아선 호족들도 많고 한수처럼 양측을 오가며 이득을 탐하는 군벌들이 많기 때문에 그 강력한 군사력을 온전히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유비는 혹여 조조가 공세를 가해오면 무리하게 야전을 벌이지 말고, 성을 이용해 수비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면서 그동안 달려올 한중의 유비군과 협격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일단 마초는 기성에 머무는 한편 서량에서 천수군 다음가는 요충지인 상규성을 유비군에게 넘겨주며 방어 체계를 구축한다. 이후 한수가 죽고 염행이 서량으로 돌아오면서 유비가 관우를 파견했고 그 결과 위수 북쪽의 군현들은 모두 조조를 지지하게 되었지만 기성과 상규 근처의 호족들은 계속 유비와 마초를 지지하며 안정적인 기틀은 마련된 상태다.유비군은 관우, 장비, 조운 같이 우수한 기병 지휘관들이 포진해 있음에도 기병 전력이 열세해 이를 살리기 힘들었는데 서량과 연대해 우수한 군마를 제공 받게 되면서 숨통이 틔였다. 군마 한 마리가 아쉬운 손오와의 외교에도 쏠쏠한 역할을 한다.
215~217년에 벌어진 서량 전쟁의 무대로, 조조의 친척인 하후연, 오자양장 서황을 진창에서 포위하고 대파하면서 결국 승리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물력이 소모되고 조조군이 퇴각 직전 위수 북쪽 호족들을 대거 살해하고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켜 매우 큰 피해를 입는다.
- 마초
서량의 반 조조 군벌.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서량연합군 5~10만을 이끌었으나,[35] 한수를 비롯한 다른 군벌들이 마초를 견제한다고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전력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조조의 공세로 인해 위수 전투에서 끝내 조조에게 패배했다. 그 후 2년만에 재차 거병해 1만 병력을 몰아 위강과 하후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고 천수군을 점령한다. 그러나 양부와 서량 호족들이 대적하며 들고 일어나자 출병해 끝없는 싸움 끝에[36] 몰려서 후퇴하게 된다. 본래는 이 시점에서 기성의 조구에 의해 가족들을 잃고 서량에서 쫓겨났으나, 유비가 원군을 보내준 덕에 가족들을 구한데다 친조조 호족 연합까지 격파하며 서량을 평정할 기회를 얻게 된다. 유비에게 아내와 자식들의 목숨을 구원받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데다 노성 전투에서 패하며 하나의 세력으로서는 아직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등한 동맹 같지만 실제로는 유비에게 서서히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여담으로 유비는 마초를 실패한 버락 오바마에 비유했다.[37]
이후 장완을 책사로 두고 서량을 재차 평정하던 중 유비가 익중 정벌에 나설 낌새를 보이자, 한중의 유비군이 빠지면 자신의 후방과 명분이 불안해지기에 급하게 한중까지 와서 자신의 병주 우회를 통한 장안 공세 계획을 밝힌다.[38] 이에 유비가 위연을 한중에 남겨 원호하겠다는 답을 해주자 안도하며 두 아들을 한중에 남겨두고 떠난다. 자신을 믿지 못해 인질을 남기는 거라 생각한 유비는 좋은 말로 거절했으나 이내 마초가 자신에게 아들들을 맡기는 진의가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임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기성에 웅거한 채 한수의 세력을 대부분 흡수한 염행과 위수를 경계로 대치하다 조조군 본대와 대치하는 유비에게 합류한다.[39] 이후 유비 산하의 최정예인 장비와 같이 조조군의 예봉을 꺾으러 출격한다.
- 마대
마초의 종제이자 부하 장수. 한중을 점령한 유비에게 사신으로 와서 군량 지원을 요청해 승낙을 받았다. 이후 호족들의 배신으로 가족들이 다 죽었다고 절망하던 차에 유비군이 지원을 와서 가족들을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듣자 진심으로 감격한다. 이후 유비의 익주 점령 뒤 서량의 현 상황을 보고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 방덕
마초 휘하의 장수. 마초 못잖은 맹장으로 유비가 욕심내고 있는 인재이다. 일단 유비가 마초를 서서히 종속시키고 있는 만큼 방덕도 자연스럽게 유비에게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 조구
반마초 파벌 호족. 마초가 천수군을 점령한 이후 끌어들여 부관으로 삼아 기성을 맡겼으나, 사실 친조조 파벌이었기에 양부의 반란으로 마초가 출병하자 거병해 마초의 일가를 전부 죽여버리려 했다. 그러나 황충과 위연이 매복한 유비군과 같이 반격하면서 몰린 끝에 패배해 황충의 활에 맞아서 죽는다.
- 양부
반마초 파벌의 맹주 호족. 조조가 직접 찍어서 자기 파벌로 만든 호족으로 직전 량주자사 위강의 패배 시 마초가 살려줬음에도 사촌 강서와 조조파 호족들을 모아 마초를 배신했다. 기성의 마초를 노성까지 끌어내어 야전을 벌이고 사촌형제 7명이 전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끝에 다른 호족들의 가세로 끝내 마초를 몰아냈으나 정작 자기 가족이 있는 역성은 유비가 점령해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렸고, 기성에도 황충과 위연이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냄은 물론 조구 파벌을 참살해버리며 일이 제대로 꼬인다.
이를 전혀 모르고 7천 명이 넘는 대규모 호족연합군을 데리고 천수군의 치소인 기성을 공격했으나 황충과 위연이 버티는 사이 달려온 마초와 유비가 후방을 휩쓴 탓에 패배하고 포로가 된다. 그 시점에도 조조를 향한 충성을 유지했으나, 유비가 조조가 위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승상이야말로 한실을 위한 충신"이라는 양부의 논리를 박살내버리자 "위공께서는 할 만큼 했다"고 말을 바꾸는 추태를 보여준다. 결국 양부가 답이 없다고 여긴 마초와 유비는 양부를 처형한다.[40][41]
또한 원 역사에서 마초를 반역도라 비난하다 죽었던 양부의 고모는 여기서도 마초를 반역자라 비난했으나 유비가 의대조 사건과 조조의 협천자의 위선을 꼬집자 말문이 막혀서 비웃음을 사며 연금당했다.[42]
- 한수
서량 제2의 군벌. 마등, 마초 시절부터 서량군벌 연합의 실세로 군림한 노회한 인물이다.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마초를 맹주로 추대했으나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멋대로 굴며, 다른 호족들과 서량인 장병들을 충동질해 마초의 패배에 단단히 일조했다. 그 탓에 213년에 다시 거병한 마초도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대가 유비를 불러오기 그렇다면 한수라도 부르자고 충고했음에도 한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마초 동맹이 위수 아랫쪽을 장악했을 무렵에 하후연과 장합의 맹공을 받게 되고[43] 한수의 능력으로는 하후연과 장합을 막는게 불가능 하다는 걸 알고 있던 유비-마초 동맹이 구원을 위해 출전하나 유비가 하후연의 기습에 당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다.
유비군이 최대한 많은 주민들을 대피시켰고, 장합의 유도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주변의 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서쪽으로 가서 주민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을 하거나, 유비군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마초의 움직임도 계속 반대하다가, 혹여 마초와 유비군이 비어있는 마을들의 재산을 탈취할까봐 걱정해 합류했다. 하후연을 몰아낸 후에도 자신의 세력을 빼앗길 수 없다는 고집에 유비를 최대한 빨리 내쫓으려 한다. 평가에 의하면 아예 무능한 놈보다 더 악질인, 알면서 저지르는 유형. 마초와 함께한 관중제장의 난 당시부터 곧 독이 되어 돌아올 선택지를 뻔히 알면서 여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쫓거나, 여론을 얻기 쉬운 선택지만 고르는 식으로 관중제장의 파멸을 초래했다. 이것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도 극혐 캐릭터로 낙인찍힌 상태. 그러나 유비는 그렇다고 섣불리 죽이려들면 무슨 부작용이 날지 모른다며 참았고, 거기다 2년 뒤에는 사망하기 때문에 유비는 2년만 참으면 된다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임상대치가 진행되던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조조는 염행을 조문 사절 명목으로 파견해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고 하후연, 장합의 지원 아래 다시 서량을 뒤흔들려 한다. 결국 역사대로 사망한 뒤 그의 세력 대부분은 염행이 흡수하게 된다.
- 염행
한수의 사위.[44] 일찌감치 조조에게 귀순해 허도에서 작위를 받고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가 한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에 의해 2천 병사를 받아 서량으로 파견된다.[45] 젊은 시절 마초와 일기토를 벌여 죽일 뻔한 일화가 유명한데 제갈량은 이 일화를 거론해 마초가 염행을 두려워하니 미염공이 나서 도와줘야 한다고 관우를 살살 녹여 놓는다. 장안의 하후연의 지원을 받으며 서량으로 돌아와 한수의 세력을 대부분 흡수하고 경고 삼아 송건 같은 소군벌들도 토벌하는 등 순조롭게 위수 북부 지역을 장악하지만 마초와 관우가 버틴 기성, 상규 장악에는 실패했고 이후로도 둘과 위수 일대에서 대치한다. 유비는 216년 4월에 있을 조조의 위왕 즉위를 명분 삼아 216년 연말에 염행을 칠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에 조조 측에서 먼저 오환족을 비롯한 이민족 기병 수천을 지원해 마초와 관우를 압박했으나 유비군이 출병해 북원이 함락되면서 후방이 끊기고 전황이 역전된다.
서량의 민속놀이[46]나 다름없는 맹주 암살을 잘 아는 염행은 조홍을 찾아와 북원이 함락되어 서량 호족들이 동요 중이니 자신을 호위할 비서량 출신 병사 2백명을 내달라[47] 요청하나 곽회가 서량인을 이끌어야 할 염장군이 서량의 동포를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신망을 잃을 것이라며 훼방을 놓자 자기 목숨을 운에 맡기는 처사에 분노해 멱살잡이를 시전하지만 곽회가 제대로 된 논리로 설득하자 납득한다.
- 국연, 장석, 전악
한수 휘하에 있다가 염행에게 흡수된 위수 북부의 서량 호족들. 염행이 조조를 뒷배로 복귀하자 순순이 그를 따라 남부의 마초를 압박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벌어진 서량 전쟁이 유비-마초 동맹의 승리로 기울어가자, 상사로 모시던 염행을 이상한 눈빛으로 봐서 염행은 공포에 질렸다. 결국 위수 수전과 진창 전투가 조조군의 대패로 끝난 이후 조조군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는다. 국연은 두어달 정도만 말을 들어주다 그 이후엔 이길 게 분명한 유비와 마초 측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으나, 조조 측이 밀서로 먼저 선수를 쳤고 유비와 마초가 차지할 서량의 호구를 줄이기 위한 의도로 연회에서 모조리 참살당한다.
5.3. 익주(舊유장)
후한 13주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주. 풍족하고 크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낙양에서 내려온 유언의 뒤를 이어 유장이 통치하고 있다. 유장이 외부 진출을 하지 않은 데다가 폐쇄적인 곳이다보니 외부에선 이 곳의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유장의 친위부대인 동주병은 유비가 바짝 경계할 정도로 정예병이나 익주 토병들의 전투력이나 사기는 평범하다.
유비의 공세 방식이 원역보다 훨씬 치명적으로 바뀌면서 부각되지 않았던 동주병들의 약점도 드러나고 있는데 잘 훈련되었다곤하나 결국 보병이라 기병에게 전략적 우위를 양보할 수 밖에 없고, 지방 호족군대나 이민족들과 싸워본 경험 밖에 없는 동주병 지휘관들은 대기병전, 패배 후 재수습 등 실전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갈고 닦을 수 밖에 없는 부분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다. 원역에서야 똑같이 보병인 적과 관문 끼고 싸워 약점이 상쇄되었지만 유비가 서량에서 기병을 보충하고 기병 운용 노하우가 풍부한 숙장들을 동원해 샛길을 활용해 찌르고, 다소 위험을 감수하며 빠르고 몰아치자 이상의 약점이 두드러져 고전을 면치 못 한다.
근거지가 성도 인근이고, 그 주변에도 험한 관문이 많다보니 미묘한 관계인 익주 호족들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보단 근거지 인근 관문에서 지키면 된다는 생각에 퇴각이란 선택지를 너무 쉽게 고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문제점.
- 유순
유장의 아들. 부성에 일부 정병을 데리고 출진해 유비군을 가로막는다. 유비는 마지막 여론 조성용으로 어차피 조조가 찬탈에 성공하려면 군사를 가진 유씨들은 전부 죽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결국 전쟁이 시작된다. 장임, 유괴 등과 함께 부성에서 유비를 상대하나 유장의 늑장 대처로 수적, 질적으로 다 밀리며 당해내지 못하고 동주병들만 수습해 퇴각한다. 퇴각로에서는 장비의 허장성세에 넘어가 지체되는 유비의 친위부대에 따라 잡혔고 장임과 동주병들의 분전으로 간신히 백마관에 도착했으나 농성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쉴 틈 없이 달려든 유비군에게 백마관마저 내줘버린다. 이후 낙성 전투 중에도 전선을 지휘하는 장임에게 묻지도 않고 패잔병들을 받아들이는데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낙성 수비군의 군기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 정도
유장의 책사. 한중 전투 이후 유비에게 유장의 답례품인 촉금 1만필을 전하며 한중을 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당연히 유비가 핑계를 대며 거부하자 유비의 속내를 읽고, 유장에게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관우, 장비가 기병대를 이끌고 성도 인근에 침입하자 부금과 상존을 지지해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우,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 1500을 상대로 겨우 보병 6천 딸려주려는 유장을 설득해 간신히 1만을 내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으론 부족하고 동주병 3만 전원을 내보내는 게 올바른 계책임을 본인도 알지만 이를 유장에게 납득시키는 건 무리였다.
- 장임
익주 토착 가문 출신 지휘관. 황권, 엄안과 뜻을 같이 해 부성에 전력을 모아 영격해야 한다 주장하나 유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부성을 지키던 유순을 수행했고 부성에 이어 백마관마저 떨어지자 유순의 안위를 위해 후위를 자처했다. 포위해서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었으나 황권처럼 그의 능력을 탐낸 유비의 배려로 남은 병사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간다. 장임과 엄안은 정사에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작가가 창작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은데 본작의 장임은 익주 토박이와 동주병을 통틀어 황권 다음으로 유능하게 묘사된다.
이후 광한을 지키러 간 황권과 역할을 나눠 낙성 방어를 실질적으로 이끌게 된다. 유비는 하필 방통이 죽었던 낙성에 유능한 장임이 자신이 살려준 덕에 배치된 것에 당황하며 법정을 앞세웠다. 사기가 떨어진 동주병을 수습해 어떻게든 낙성을 사수하려 노력하나 기량이 떨어지는 유순, 냉포와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아 고생했고 결국 성을 빼앗긴다. 광한성에 갇힌 황권을 대신해 강경론을 주도하며 유비가 형주에 가 있는 3개월 동안 성도에서 나가 장비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장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 사이 유비가 돌아오며 유장이 항복하자 원역사와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 처형되지 않고 자연스레 유비 휘하에 편입되어 황권과 함께 주요 정책 회의에 참여한다. 서량 전쟁에선 뒤에 남았다 후발대를 이끌고 유비군에 합류하는데 이때 전력 질주를 해서 시의적절하게 도달해 유비의 칭찬을 들으며[48] 이후 작전 회의에서 익주 사람이 뜻을 모으면 강하다는 걸 보여줄 기회라는 유비의 말에 좌장군의 뜻을 따르겠다며 호응하고 진창 공성에 앞장선다.
- 엄안
익주 토착 가문 출신 지휘관. 황권, 장임과 뜻을 같이 해 부성에 전력을 모아 영격해야 한다 주장하나 유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 양회, 고패
백수관을 지키던 익주 무장들. 서량 출병을 위해 원역처럼 참수하는 대신 돌려보냈다. 유비가 한중을 점거하고 서량, 상용을 오가는 동안 백마관을 지키고 있었다. 유비가 부성을 공격하며 익주 정벌의 신호탄을 울리자 익주 토착민들로 구성된 보병 4천을 이끌고 구원하려다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의 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고 양회는 장비와 일기토를 시도했다 단 5합만에 목이 떨어진다.
- 유괴, 냉포, 부금, 상존
동주병 주요 지휘관들로 등장한다. 굴러들어온 돌이고, 동주병과의 알력으로 발생한 조위의 난을 겪어봤다 보니 멀리 나가기 보단 근거지인 성도 주변을 지키면서 싸우려는 성향이 강하다. 관우와 장비가 기병 1,500기를 이끌고 성도 인근을 흔들자 부금과 상존은 군심이 이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가 싸워야 한다 주장하지만 군사적으로 무능한 유장은 한참 망설이다 성도에 남은 병력의 3분의 1인 1만만 딸려준다. 전원 보병인 군사들로 오환과 서량 출신 기병에 맞서기 위해 수레와 궁노수를 동원해 애를 썼으나 대기병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무너진다.
부금과 상존은 원 역사에서 겨우 곽준과 수백이 지키는 가맹관을 1만으로 1년간 넘지 못하고 격파 당한 일로 졸장 취급 받는데 본작에서는 무능한 유장이 아무 대책을 못 내놓는 상황에서 가맹관을 공격해 허를 찌를 정도로 전략적 식견은 있는 장수들로 재해석 되었다. 문제는 짚어낸 바를 실행하는 전술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 상존은 전열을 수습하기도 전에 단기로 자신을 죽이러 달려든 관우에게 호위병들과 함께 목이 떨어졌고 부금은 간신히 살아서 낙성으로 도망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로 인해 가뜩이나 후방 걱정으로 낮았던 낙성 수비군의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린다.
- 이엄
남양 출신 망명인사.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할 때 익주로 넘어온 굴러들어온 돌로 벗이나 동문들이 대거 유비 쪽에 사관한 터라 유장 입장에선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장은 그에게 일군을 맡겨 면죽관을 구원하게 한다. 동주병은 정예이나 지휘관들은 관문에 의지해 방어전은 할 수 있어도 야전에서 유비군을 영격하기에는 자질이 모자란 인사들 뿐이고, 군재가 뛰어난 황권과 장임은 익주 토박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맡길 만한 인사가 이엄 뿐이었기 때문.[49]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유비측 인사들의 집중적인 회유를 받아 면죽관에 도달하자마자 투항해 버린다.
- 장송
익주 토박이 호족. 유비와 내통하던 인물로 본래 유비의 형주 복귀 뻥카에 낚여서 서신을 썼다가 걸리는 바람에 죽었으나, 여기선 유비가 이중 낚시를 한 덕에 살았다.[50] 이후 유비와 싸워야하는 현실을 부정하고픈 유장의 심리를 이용, 조위의 난을 언급해 부성에 전력을 집중하자는 황권의 헌책을 거부하도록 은근슬쩍 돌려놓는 활약을 한다.
유비가 한중과 서량에서 싸울 때까진 약속한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장송 쪽에서 유비를 끌어들인 건 자신의 죄라고 순순히 인정한 데다, 성도 인근 관문을 지키면서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자는 발상은 익주 사람이라면 흔히 할 법한 생각이라 황권도 배신자로 몰아붙이지 못하는 상태. 낙성이 함락되고 성도가 전쟁터가 되는 게 확실해지자 유장에게 항복을 권해 피해 없이 전쟁을 매조지 짓고 유비 세력 안에서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유장이 장송의 생각보다 훨씬 무능한 인간이라 장송이 설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항해버렸다. 당연히 장송도 유비 세력에 편입되었고 유비 휘하에서 도강언 보수나 경제 회복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원래 역사에서는 적벽대전 이전 유장의 명으로 조조한테 칭신의 의사를 밝히러 갔다가 푸대접을 받고 돌아온 뒤 유비를 찾아가 익주 정복을 권유한 인물이다.
5.4. 동오
손유동맹을 유지하는 양주의 세력. 200년대 후반부터 적벽대전-남군 공방전-유수구 전투까지 조조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는 조조측 사정 때문에 말미암은 것인데 차근차근 찬탈 작업을 진행중인 조조는 장기간 조정을 비우거나, 적벽 이후 다시 패배해 권위가 하락하는 일을 지양해야 했다. 큰 피해 없이 명분 챙겨서 빠르게 복귀할 수 있는 WWE 상대가 필요했는데 주요 세력 중 조조의 본거지인 기주 업성에서 가장 가까우며 기병 전력이 약해 반격을 통한 전과 확대에 한계가 분명한 동오는 가장 적절한 상대였다.과거 형주 공방전 이후 남형주의 남군 일대를 유비에게 빌려줬으나 이는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언제든 마찰이 될 수 있다. 압도적인 수군 전력에 파구의 물길을 쥐고 있어 유비측은 동오가 한 번 칼자루 거꾸로 잡기로 마음 먹으면 급소에 베이고 생각해야 하는 처지. 유비는 장사와 계양군까지야 빼앗기더라도 무릉, 영릉이라도 지켜서 형익병진에 필요한 안전성을 확보하려 한다.[51]
- 노숙
손유동맹을 추진한 동오의 대도독. 유비가 계속 손권의 심기를 거슬러 면목이 없는 상황이었으나[52],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고 유비가 한중에 진출해 서량까지 연결되면서 장안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안도하며 이를 속히 조조군에 퍼뜨려 그들을 동요시키자는 계책을 제시한다.
노숙 본인은 헌제를 끼고 있어 선양받을 수도 없고, 유씨 종친도 아닌 손권이 황제가 되기 위해선 반 조조 토템으로 쓸모 있는 유비와 당장 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나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면 너무 강해진다며 반발하는 강경파들의 여론에 손권이 동의하면서 본의아니게 익양 대치를 이끌게 된다. 기왕 벌어진 일 유비와 제갈량이 부드럽게 장사와 계양군을 포기해주길 원했으나 유비의 2만 군대가 몰려오자, 어쩔 수 없이 감녕을 보내서 익양을 막게 한다. 그러나 감녕이 패하고 여몽도 천릉성 공세를 실패해 육로로 연결된 임상에서 관우와 대치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지리한 대치 중에 조조가 염행을 서량에 파견한 것을 계기로 장사, 계양을 넘겨 받는다.
- 여몽
노숙의 후계자인 동오의 장군. 동오의 형주 진입 작전에서 지상군 주력 2만으로 등지가 지키는 영릉군의 치소 천릉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갖은 허세와 협박에도 등지가 수비 태세를 지키자, 천릉성의 방위력, 감녕의 전사와 유비군의 영릉 진입으로 인한 장사, 파구의 위기를 막기 위해 퇴각한다. 그러나 남겨둔 여대가 출병한 사이 기어이 관우가 임상을 탈환해버려 여몽과 2만 병력이 파구로 돌아갈 길이 막혀서 대치만 해야 했다. 합비 공방전에서 대패한 이후 손권을 위로하면서도 속으로는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던 형주 공방전에서도 작전에 실패해 감녕을 잃었고, 수만 대군을 몬 합비에서도 겨우 7천의 적에게 패배하면 이제 동오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좌절한다. 이후 손권이 조조의 남하에 엉뚱하게 유비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걸 보고는 손유 동맹이 조만간 깨질 것을 직감한다. 본래 유비를 배신할 때 앞장섰던 인물이나, 이번엔 임상대치에서 성과를 못 낸 데다가, 유비군의 철저한 대비를 실감하고, 유비군의 형주 사령관이 치밀하고 리스크를 남기지 않는 성격인 제갈량으로 바뀌었기에 배신에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란 감상이 있다.[53]
- 여대
익주로 파견된 유비를 만나러 온 동오의 사절. 유비에게 조조를 견제해 줄 것을 부탁하러 왔으나 빙의의 여파로 아직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유비를 보고 정말 아픈 것임을 깨달아 당황한다. 이후로도 손권의 사신이 되어 양측을 뻔질나게 오간다. 동오의 형주 공격에도 참전하나, 장사군의 치소 임상을 지키던 중 다른 현을 점령하러 갔다가 관우가 일군을 몰고 빠르게 공격하는 역 빈집털이를 해오는 바람에 허무하게 임상현을 다시 뺏긴다.
- 장소
손가의 원로대신. 적벽대전을 앞두고 항복을 권한 일로 발언권이 많이 약해진 상태임에도 옳다고 믿는 일에는 간언을 아끼지 않는다. 진무의 애첩을 순장하려는 손권을 유학자로서 저지하려 하나 자신들의 사병을 끌고 와 저택을 포위해 버린 고옹과 육손에 의해 저지당한다. 서주 출신이라 강동 토착 호족들 사이에서 묘하게 겉도는 인상이 있으며, 사병도 없어서 손가의 총애에 의존해야 하기에 세력에 한계가 명확하다. 임상 대치 이후 손권이 조조의 남하를 두고 유비를 질투하자, 일단은 유비와 힘을 합해야 조조를 막을 수 있다면서 말린다.
- 고옹
손가의 대신. 오의 사성이라 불리는 거대 호족 고씨의 일원. 순장을 반대하려는 장소를 반강제로 붙들어 세운다. 중원 왕조에 예속되지 않는 강동의 독립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로 이를 위해 손권이 다소 비열한 짓을 해도 용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육손
손가의 장수. 강동 명가 육가의 가주. 어린 시절 부친이 중앙에서 온 관리에게 모욕을 당하는 걸 보며 자랐으며 때문에 선대 손책에게 가문의 사람들을 많이 잃었는데도 강동의 독립을 위해 손가를 지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제갈근
제갈량의 형이다. 방통은 손권이 제갈근을 내세워 협상해오면 제갈량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나, 제갈량의 충성심을 잘 아는 유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원 역사보다 빨라진 익양대치를 앞두고 유비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형주 일부라도 즉시 내놓으라는 손권측 의사를 전하나 결렬된다.[54] 임상대치가 끝난 후 손권군의 깃발과 갑옷을 빌릴 때 유비측과 동행하며 유비의 블러핑에 힘을 실어주고 손권이 동맹으로서 유비의 입촉을 도와줬다는 명분을 세운다.
- 감녕
익주 태생으로 유표와 황조를 거쳐 손권에게 임관한 항장. 형주의 중요한 길목과 물목을 전부 꿰고 있어 원역사에서 그랬듯 익양과 임상현 사이에 있는 개울가를 틀어막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병 300에 노숙에게 1천 군사를 받아 출병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으나 개울에는 유비의 지시를 받은 제갈량이 보루를 2개나 세우고 다른 곳에 투입해야 할 물자와 인력까지 끌어와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상태였다. 불길함을 직감하면서도 항장 출신이라 성과 없이 물러서면 출셋길이 막힌다는 생각에 정찰도 없이 무리하게 공격을 개시하나 신속한 이동과 점거를 위해 경무장에 변변한 공성장비도 없던 감녕군이 보루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감당하는 건 역부족이었고 본인도 교전 중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감녕의 전사에 동오군은 물론 유비, 제갈량조차 당황했으나 아직 동오에서 중용받기 이전이고, 성품도 나쁜 탓에 딱히 언급되지 않고 묻힌다.[55]
5.5. 조위
작중 시작 시점에는 위공 즉위 이전이므로 조조군이었으나 213년 위공으로 즉위했다. 하북 4주(유,기,병,청) 서주, 예주, 낙양, 장안을 차지한 작중 최대세력. 작중 유비는 초반의 전 병력이 5만여 내외, 손권 역시 7~10만 언저리의 병력을 동원하면서 큰 부담을 느끼는데, 조조는 애당초 승부를 낼 생각도 없는 유수구 전투에만 수만의 병력을 동원하거나, 1만 정도의 병력은 가볍게 찔러보는 식으로 투입한다. 또한 본인들의 부담은 최소화되는 이민족 징발도 적극적으로 행해서 본군은 2, 3만 정도만 동원하고도 서량에서 4~5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유비군을 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유비는 이를 두고 후일 중원이 흔들리면 감당 못할 짓을 벌인다고 평하는데, 조조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이 이민족 토벌로 인한 국경 안정인데, 본인의 공을 덮고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조위 시절부터 서진 시대까지 이렇게 이민족과 척을 진 것이 후일 영가의 난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56]
찬탈을 위해 국내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황족 살해, 상식을 벗어난 공국 선포, 무의미한 전쟁 등 갖가지 폭거를 벌이고 있다. 유비는 원 역사 유비군이 이 시기에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승천할 수 있던 이유 중에 일부는 조조의 이런 폭주에 있다고 설명할 정도이며, 본작에서는 원 역사의 거진 1.5배에 달하는 대성장을 거두어 조위의 대적자로 떠오른다.
5.5.1. 조정
- 순욱
상서령. 조조군의 책사로 수십년간 조조를 도와온 거물. 그러나 조조의 위공 즉위 이후 실의에 빠져 자결했다.[57] 이 소식을 들은 유비 세력과 손권 세력은 그 순욱이 죽었냐며 조조의 위공 즉위로 인해 조조 진영 내부에서도 극심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놀랐다. 이후 순욱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한 손권의 편지를 보면서 유비가 분노하는 척하며 조조는 역적이라고 선동하는데, 실 역사에서도 유비가 순욱의 죽음을 손권에게 전해듣고는 '늙은 역적 놈이 죽지 않으니 천하가 아직도 혼란하다'는 식으로 욕을 했었다.
- 가후
조조군 책사. 과거 동탁, 이각, 장수의 책사였으며 야심보다는 안위를 중요시하는 인물. 때문에 조조에게는 남들보다 더 대하기가 편한 인물이다. 순욱이나 다른 책사들처럼 가후 본인에겐 뒷배경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고 원한을 산 적이 많아서 여차할 경우 제거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풍등을 날리며 조조 정권을 공격하는 유비에게 대응할 방법을 조언해준다. 평판이 낮아서 대놓고 친교를 맺진 않아도 지모방략은 모르는 이가 없어 은밀하게 조언을 구하러 오는 이들이 많은데 혹시 모를 분란에 말려드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절대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 않고 불가의 선문답처럼 두루뭉실한 말만 해준다. 조조의 속내를 가장 잘 읽고 있지만, 순욱이나 정욱처럼 조조가 속내를 숨기거나 반목하진 않는다. 고향인 서량을 조조가 박살낸 데다가, 그 막장스러운 젊은 시절 이력 탓에 세력이라 할 것도 없어서 생각이 달라도 문제가 없기 때문. 조조 曰, 숙청하고 싶어지면 적당히 주위를 부추기기만 해도 살해당할 정도로 적이 많다고... 조조가 방치한 사이 유비가 급격히 세력을 키워 서량 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근본적인 조조의 전략(유비 아래 결집한 반대세력의 일소)은 변한 게 없다고 조언해준다.
- 정욱
조조군 책사. 순욱의 자결, 가후의 처세로 인해 조조군 제일의 책사에 가까운 인물. 위왕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집중하며 당장 유비 쪽에 대군을 동원하고 싶지 않은 조조의 속내를 짐작하고 상용으로 도피한 장로를 이용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후 유비가 입촉을 시작한 시점에도 대군을 내서 유비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후 임상대치가 길어지도록 염행의 파견은 미루자는 조언을 하나 역시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비군이 익주를 차지한 이후 정말로 대군을 동원할 강적이 되었다고 판단해 경계한다. 성격은 조조의 정치전략에 이견이 있어도 한번 거절당하면 바로 물러서는 타입으로 할 때는 하면서도 눈치를 잘 보는, 가후와 순욱의 중간이라 볼 수 있다. 서량 전쟁에 조조가 친정할 때 함께하나 유비군의 방어선을 보고 뚫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 화흠
조조군의 책사. 유비를 상대할 방법을 묻는 조조에게 유엽이 대군을 동원하자는 계책을 내자 이를 반대한다. 사실 조조 역시 찬탈을 위한 전쟁이 더 급했기에 화흠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 진군
젊은 시절 유비의 막료로 출사했었다 보니 유비가 화제에 오르면 발언을 삼간다. 유비에 대해 묻는 조조에게 유비의 대국을 보는 시야는 일개 촌부와 다를 것이 없다고 비위를 맞춘다.[58] 사실 본편 시점의 유비는 다른 사람이 빙의한 상태라서 사고방식이 달라진 탓에 유비 생각을 못 읽는 게 정상이다.(...)
- 종요
전직 사례교위. 서량을 오랫동안 다스리며 마초 등도 막아낸 유능한 인물이다. 위공 즉위 시점에는 업성으로 이동해 출세가도를 밟고 있었으나, 원 역사에서는 자진 진압될 서량의 난이 유비의 가세로 장기화되어 사실상 서량을 상실하자 불안해한다. 원역처럼 서예가로서 명성이 높아서 그의 글씨는 익주 호족들 사이에서도 귀한 보물로 여겨진다. 유능한 관료면서 예술가 기질도 있다 보니 장비가 쓴 죽서기년의 사본을 보곤 글씨 좋다고 속 편한 소리를 해서 조조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 유엽
마초가 재기하고 유비가 입촉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고심하는 조조에게 크게 패한 뒤 아직 세력을 회복하지 못 한 서량과 익주에 2번에 걸쳐 전력을 차출해 전력이 약해진 형주를 치면 된다고 조언하나 마음이 딴 데 가있는 조조는 듣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 재차 조언하려 했으나 사마의의 제지로 멈춘다. 이후 사마의와 함께 가후를 찾아가 조조의 진의에 대해 조언을 듣는다. 214년 조조가 복씨 일가를 처형하는 걸 보면서 공포에 질리나, 사마의가 유씨인 자신이 조조를 지지하는 것은 아주 유용할 거라는 말을 듣고 안심한다. 217년 서량전쟁에도 조조를 따라 종군하나, 유비와 장안 근처에서 싸우는 상황에 한고조를 떠올리고 얼어붙는다.
- 사마의
서량과 형주를 쳐야 한다는 헌책이 거부당했음에도 거듭 나서려는 유엽을 제지한다. 후일 위를 찬탈하는 인물인 만큼 유비의 생각 속에서도 자주 비중을 보인다. 조조를 모방해 찬탈을 성공했으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은 악행으로 인한 성공이 후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줘 결국 팔왕의 난을 유발했고 이후에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고 평가한다.[59] 그와 별개로 주인공은 사마의는 조조의 수법을 따라하기만 했지 조조와 같은 창의성은 없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 최염
조조군 관료. 전선에 가깝단 이유로 형북과 회남 주민들에 대한 역이 과하다고 줄일 것을 제안하나 찬탈을 위해 하북과 중원의 민심이 중요했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조에게 반기를 든 적도 없고 오히려 정국을 조조 뜻대로 이끄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모든 사람을 한 번씩 의심해보는 지경에 이른 조조는 그가 나중에 찬탈을 두고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사적으로 사돈인 그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이후 낭야왕 유희의 회상에서 속전속결로 제거되었음이 드러난다. 조조는 본래 작은 오점이라도 찾아 죽이려 했으나, 그런 것도 없어서 그냥 죽여버렸는데 이는 추후 조조의 큰 아킬레스 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 모개
조조군 관료. 최염처럼 조조에게 충성하는 관료였으나, 나중에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만으로 숙청 명단에 올랐다. 최염이 결백히 죽었기 때문에 모개까지 죽이면 민심이 이반할 걸 우려해 우선 옥에 갇혀있다고 한다.
- 왕랑
회계태수로서 막 거병한 손책과 맞서 싸우다 패하고 북쪽으로 달아나 조조에게 봉직해온 중신. 최염, 유희를 연달아 제거해 공포정국을 조성한 조조가 오래전에 폐지된 육형을 부활시킬 뜻을 내비치자 반대할 엄두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는 신하들 사이에서 "죽을 죄 지은 놈들은 다 죽여야지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시국도 어수선한데 봐주지 말고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얼핏 조조편을 들어주는 것 같으면서 육형 부활에 명확히 반대하는 의견을 내 일단 보류되게 만든다. 교사들은 왕랑마저 잡아도 고문할 것을 건의했으나 말을 잘해서인지 조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5.5.2. 군부
- 악진
수년 전 남군 공방전에서 관우를 패퇴시킨 이력이 있어[60] 조조의 명에 따라 7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용을 침공한다. 전장이 좁기에 악진은 이전을 부관으로 삼아 상용에서 관우와 정면으로 격돌한다. 관우의 괴력에 당황하면서도 유인책으로 끌어들이는 노련함을 보였으나 법정의 개입으로 계책이 어그러졌고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대치만 이어가다 신씨 형제의 신속 선언을 명분으로 퇴각한다. 물론 악진이 뛰어난 장수지만 관우, 법정, 유비라는 유비군 최상위 전력과 무승부라는 점에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후 악진의 7천 병력은 조조군 중에서도 가리고 가린 정병들이라고 언급되며 엄밀히 말해 관우군은 정예 1천은 유비가 후방을 견제하느라 빼놓고 전투엔 거의 끼지 못하는 등 어느 정도 보충설명을 하긴 했다. 이후 합비 공방전에서 장료, 이전과 같이 손권을 기습해 대패시킨다. 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오랜 동료인 이전이 전염병으로 급사하고, 본인도 장례식에 갔다오면서 불길한 현기증을 느낀다.[61]
- 서황
유비가 당초 조조의 예상과 달리 한중과 양주 쪽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주둔하던 장안에서 나와 서량과 장안 사이의 요충지인 진창으로 급히 진출해 이곳에 성을 쌓고 있다는 서술이 있다. 진창에서 길이 험하긴 하지만 한중을 칠 수도 있기 때문에 유비도 서황을 경계해서 한중에 있는 주력을 못 빼고 육천 정도만을 동원해 서량에 나가야 했다.
5년여 후인 216년에도 진창성에 주둔하며 유비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유비군이 기성(마초), 상규성(관우), 오장원(유비) 세 방향에 주둔하고 있자 하후연에게 오장원의 유비군은 위수를 넘기 어려울 테니까 자신들은 가까이에 있는 상규성의 관우를 견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으나, 그 직후 유비군이 오환족의 협조로 위수를 넘어서 북원을 끊어서 장안과의 보급로를 막아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워한다.
결국 진창성에서 하후연과 함께 유비군의 공세를 받게 된다. 전투 도중 약체인 익주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진하나, 장임과 황충에게 반격을 당하며 위기에 놓이지만 하후연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귀한다. 그러나 조금씩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조조가 늦을 거라는 진의가 담긴 밀서가 도착하고, 군사들에게 허장성세를 부리며 버텼음에도 결국 조홍을 격파한 관우와 황권군이 유비에게 합류하는 걸 보게 된다. 결국 전투 중에 하후연이 전사하고 본인은 패잔병에 가까운 위군만 남은 채로 진창에 완전히 포위 당해 처지가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진창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고자 다시금 역습을 시도하지만 황충의 적절한 대처로 무위로 돌아가며 결국 눈물을 머금고 철수한다. 그러나 이미 지칠대로 지친 위군을 관우와 황권이 추격하자 후위를 맡아 추격을 막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관우가 내가 잘 말해줄테니 유비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유비가 허도에 당도해 황제를 모신다면 역으로 황제가 더 위험해질 것이라 항변한다. 더는 약탈할 수 없을 때까지 약탈하다 파멸하는 미래만 기다리던 자신을 구제해준 조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며 그가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하고 있었다.
관우에게 유비는 절대 제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란 말을 끌어내 추후 유비 세력 내에 분란의 씨앗을 심어둔 것에 만족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관우와 일기토에 임한다.[62] 완전히 지친 몸으로 50여 합을 버티며 선전했으나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목이 베이며 원 역사보다 10년이나 빠르게 삼국지 무대에서 퇴장했다.[63] 이때 오랫동안 함께한 고참 노병들도 투항을 거부하고 서황을 따라 죽음을 택했다. 이를 보면서 독자들은 서황에 전작 내마속의 진군을 대입해서 보기도 했다.
- 하후연
조조의 친위세력으로 조조의 동서이자 하후돈의 친척동생.[64] 조조가 강동정벌에 나선 사이 호군장군으로 서황, 장합의 보좌를 받으며 장안에 주둔해 있다. 관중제장의 난 이후 재기한 마초에게 격파당했다는 식으로 초반에 잠깐 언급된다.
유비와 마초가 서량 호족연합을 격파하고 숨을 고를 즈음에 기습적으로 출병. 한수의 군세를 격파하기 위해 현친현으로 출격한다. 원역사대로 한수의 조잡한 강족 연합군 따위는 야전 한번에 대파할 수 있다고 비웃으나, 한수가 흥국성에 들어가 버티자 인근 부락을 파괴하며 야전을 유도하고자 하지만 유비가 이 작전을 간파하며 조조군의 기병대만 피를 본다. 그러나 동요하는 일 없이 장리천의 지형을 활용해 기병으로 유비군을 기습했으나 방통이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마초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유비를 잡는 데는 실패한다.
그 후 조조가 서량을 장악하려 보낸 염행에게 가세해서 장안의 군을 이끌고 나온다. 서황이 있는 진창성에 주둔하며 유비군과 분전하나, 예상 못한 오환족의 실수로 위기에 처하자 조조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 곽회의 의견대로 전 병력을 이끌고 진창으로 출병한다. 이후 유비군이 보루를 쌓는다는 소식을 듣고 시간을 벌었다며 안심하면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데 황충과 법정이 철저히 급습에 대비해둔 것을 보고 싸움이 어려워지겠다며 입맛을 다신다.
유비군의 차륜전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 목책 가까이에 깃발을 올리고 나서거나, 서황을 돕기 위해 직접 출격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지휘한다.[65] 그러나 약체인 익주군의 대응이 만만치 않고, 조조가 늦는다는 밀서가 온데다, 위수의 수전에서 조홍이 지고, 그에 따라 황권과 관우의 군사가 배를 타고 진창에 들어오는 걸 보게 된다.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나 법정의 유인책에 걸려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고 지쳐버린 상황에서 쌩쌩한 몸으로 달려오는 황충에게 원역사보다 2년 빠른 죽음을 맞는다.
- 조인
조조군 인척이자 장수. 조조군의 에이스로 형북 양양성에 주둔하고 있다. 양양성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고 상대중인 조운의 평가로는, 육로로 약간 약간 찔러보는 병력만으론 도저히 조인을 밀어낼 수가 없다고 한다.
- 조홍
조조군 서량전선 사령관. 장합, 곽회를 부장으로 두고 현친현에서 주둔하며 관우-마초와 맞서고 있다. 유비의 북원 점령 이후 곽회의 의견대로 진창에서 결판이 날 것을 깨닫고 최대한 전선을 유지하면서 진창에 원병을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진창 공방전이 계속되던 와중 관우와 황권에게 수전에서 패배하고 만다.[66] 이후 조조의 지시를 받아 서량의 친조조 호족들을 직접 숙청한다.
- 장합
조조군 장수. 하후연의 부장을 하고 있으며, 조조의 친위 세력인 하후연에게 아부한다. 한수의 군대를 동요시키기 위한 하후연의 명령으로 인근의 강족을 5천명 정도 죽이려고 했으나, 조조군의 이 수법을 알던 유비가 보낸 유격대에 의해 조조군의 기병대만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유비군이 방패로 의지하는 장리천을 역이용해 유비군을 따라잡아 마침내 전투를 벌이게 되고 오자양장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유비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방통의 책략과 타이밍 맞게 도착한 마초의 지원 탓에 결국 유비를 잡는 데는 실패한다. 216년 위수 북쪽 현친현에서 염행을 도와 관우-마초와 대치하고 있다. 조홍 대신에 염행의 요청을 상담하다가 그가 곽회에게 화를 내자 말리고, 곽회에게 해명할 기회를 준다.
- 곽회
조조군 장수. 서량 전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염행이 서량인들의 동요를 느끼고 비서량인 호위 병력을 요청하자 서량인들을 이끌어야할 염 장군이 이래선 안된다고 정론으로 맞섰다가 멱살을 잡힌다. 그러나 유비군이 수적한계로 장안과의 연결을 전부 막지 못할 것이며 유수구에서 손권과 대치하는 조조가 6주면 도착한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전술을 묻는 조홍에게 유비군은 진창성으로 올테니 본인들도 주력군으로 이를 요격하자고 조언한다.
- 문빙
과거 유표 산하에 있던 장수로 조조 산하 최고의 수군 장수이며 현재 형북에 주둔하고 있다. 과거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를 격파한 전적이 있었으며, 217년 시점에서도 한수 연안을 방비하면서 제갈량을 고뇌하게 만들고 있다.
5.5.3. 기타
- 유희
유씨 방계 왕으로 낭야왕. 원 역사에서 말년의 조조의 대숙청에 휘말려 죽은 인물이다. 유희의 죽음은 복황후의 죽음과 함께 조조가 한실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고. 특유의 생존력으로 난세에서 가늘고 길게 살아남았으나, 조조가 사돈인 최염을 죽이며 폭주를 벌이자 위기감을 느끼고 봉지를 버리고 도주한다. 우선은 가까이에 있는 손권에게, 만일 여의치 않으면 종친인 유비를 찾아가 의탁할 생각으로 재산도 거의 포기한 채 가족들과 일부 호위만 데리고 도망치나 장강에 도달해서 조조의 부하인 조달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 노홍, 조달
교사의 수령들. 감시와 숙청으로 조조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비밀경찰 역할을 수행하며 봉지를 버리고 도주하던 낭야왕 유희를 잡은 게 이들이다. 이후 최염과 모개 등도 잡아넣으면서 업성의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조조에게 허도나 낙양에도 교사를 배치하자고 건의해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려 하지만, 조조는 허도와 낙양에선 학살을 해서 깔끔히 치워버릴 예정이라서 거절했다.
- 조엄
관중 호군. 군인이라기보다는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나 원역사에서 관우의 공격에도 정확한 판단을 내렸을 정도로 군재를 가진 인물이다. 관중 호군으로 장안을 수비해야 할 장군 은서가 장비와 오환족의 남하에 당황할 때도 침착하게 인근 수비병력을 모조리 끌어모으고 중원에서 올 조조의 원군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 신속하게 결정을 내린다. 법정도 적장이 보통이 아니라고 감탄했으나, 사실 장안을 찔러볼 수 없어서 아쉬울 뿐 애당초 작전 자체가 장안 방면 병력이 전부 수세로 일관하게 만들어 진창을 치는 유비군의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조엄이 유비군의 의도에 넘어간 셈이다.
- 노석
조조 산하의 오환왕.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서량에 와서 미현에 주둔하며 유비군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태원군에 있는 아내가 그리운 나머지, 몰래 아내를 만나러 가는 대형 사고를 쳤다. 이는 원역사에서도 있었던 일로, 이를 아는 유비는 이 기회를 노려 위수를 건넜고 왕이 없는 오환족 수천명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이후 원역사대로 양습이 파견한 군대에 쫓기다가 장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 진거
여남의 호족. 숙부가 원소의 문객으로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지시를 받고 조조의 후방을 어지럽혔다. 원가가 패망한 후 숙부는 책임을 지고 자결했고 조조는 겉으로는 용서했으나 관원들을 보내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관원들이 찾아올 때마다 금품과 접대를 요구하는 바람에 가산을 탕진하고 나앉을 지경에 이르자 반란을 결심, 217년에 대별산맥을 타고 형남의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이때 어찌나 열받았던지 제갈량을 접견한 자리에서 유수구 일대의 역병은 하늘이 역적에게 내린 벌이라며 증오를 감추지 않았을 정도. 그래도 위장 귀순을 우려한 제갈량은 진도에게 뒷조사를 맡겨 하인들까지 전부 조사한 다음 받아들였다.
- 왕찬, 사마랑, 진림
217년 2차 유수구 전투 와중에 싸우지도 않았는데 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조위의 중진들. 왕찬과 진림은 건안칠자 중 1인. 사마랑은 그 사마의의 맏형으로 이미 예주자사를 역임하던 고관이다. 이런 거물들에 이전 같은 고위 군관들도 연달아 병으로 쓰려져나가자 유수구의 조조군은 그대로 마비되어 버리고, 이 사실은 형주를 거쳐 사방으로 퍼져나가서 반 조조 정서를 부추기게 된다.[67]
5.6. 형북
남양과 양번을 중심으로 조조가 차지했으나, 한중군 동쪽의 삼군(서성, 상용, 방릉)을 뜻하는 동삼군은 상용을 중심으로 지형적 이점을 통해 명목상 조조의 영토일 뿐 반자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중의 안정성과 형주 공략을 위해 요긴한 지역으로, 장로는 유비군을 피해 상용으로 도피했고, 조조도 상용을 통해 한중을 위협하려 해서 유비 역시 상용을 중시했다. 결국 유비와 조조군의 일전 이후 암묵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중립 지대가 된다.유비가 형주 남쪽을 문제가 되리라 알면서도[68] 유지하는 건 이 형북의 세력구도 때문이다. 형주와 중원을 가로지르는 대별산맥과 한수에는 과거 중원에서 조조를 피해 도망친 잔당들이 매우 많아 조조의 영역인데도 반 조조 여론이 드높다. 조조 역시 긴 시간을 들이거나 이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토벌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세력이다. 형주에서 북진할 때 이들과 연결만 된다면 사기높은 대군과 현지의 민심을 거저 얻어 바로 중원의 허도, 낙양, 여남 같은 핵심지역을 위협할 수 있다. 유비는 임상대치 기간 동안 이들과 연락하는데 성공해 반 난민에 불과한 이들을 제대로 된 게릴라군으로 조직한다.
본래의 융중대가 서량에서 장안을 향한 공세였다면, 유비는 익주에서 한중을 통해 상용과 양양으로 이어지는 동북전선 공세를 계획한다.
- 장로
한중을 장악한 오두미도 교주. 본래 유언의 지원을 받아 한중을 장악했음에도 유언의 뒤를 이은 유장과 대립하며 자치를 하고 있다. 당시 명사들은 익주의 군사력이 만만하지 않은데도 장로가 밀리지 않는 걸 보고 장로가 상당한 강병을 보유했다고 착각했으나 사실 유장이 동주병을 동원하지 못해서 2급 전력만 쓰다 보니까 밀린 것이다. 장로는 군벌보다는 교주로서의 성격이 강해서 종교서적을 편찬하거나 백성들에게 재정을 풀어 복지를 제공하는 등의 종교활동에 바빠서 그다지 눈여겨볼 정예군이 거의 없었다.[69] 이 사실을 미래지식으로 아는 유비의 급습으로 인해 패해서 한중을 빼앗기고 상용으로 도피한다.
이후 당시 한중군민 대부분이 오두미도 교도인 것을 의식한 유비가 민심을 얻기 위해 장로를 달래서 한중군에 돌아오게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비는 간옹이 파견해 설득을 진행하고, 찬탈에 집중하느라 유비에게 시간 쏟아부을 여유가 없었던 조조는 장로를 움직여 상용에서 한중을 찔러보려 하면서 일종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 그러나 조조가 곧 장로를 끌어들이기보다는 악진과 군사를 보내 강제로 데려오려 하면서 위기에 처했고 이에 유비가 급히 상용으로 향하게 된다. 조조, 유비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관망하려는 신씨 형제의 견해를 지지하며 아들 장성을 유비측에 볼모로 보내 일단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 괴기
상용군의 대표 호족. 제갈량의 누나와 혼인해 제갈량과 인척 관계이지만 계속 유비에게 뻗대다가 결국 맹달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원역사를 알고 있던 유비가 본인이 직접 가서 그를 설득하고자 했으나 현지 민심이 양쪽을 저울질하기로 한 가운데 악진을 꺾는데 실패하며 1차 설득 시도는 실패했으며 이후 유비의 관심이 익주와 서량 쪽으로 돌려지며 존재감은 없어졌으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상용에서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일단 유비에게 적대는 하진 않는 모양.
- 신의, 신탐
상용군의 대표 호족. 유비, 조조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간을 본다. 유비 쪽에서 등지를 파견해 신호를 주자 조조, 유비 양쪽에 신속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두 세력이 상용에서 물러날 명분을 준다.
6. 개변된 역사
- 유비의 한중 진출
당시 외부에선 거의 알지 못하는 한중-익주 및 서량의 세력 구도를 정확히 파악한 유비의 결단으로 유비군은 한중으로 출진해 장로를 격파, 그대로 서량의 마초와 연결되면서 형익병진의 실현 가능성이 대폭 올라갔다.
- 유비-마초 동맹
원 역사에서는 양부의 배신으로 패배해 몰락한 마초였으나, 여기서는 유비의 원군으로 인해 역으로 호족연합군을 대파하고 천수군을 안정적으로 점령한다. 이후 유비는 치소 기성을 넘기고 상규성으로 거점을 옮기기는 했으나, 마초는 병력이 3천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징병할 명분과 군량, 행정적 업무까지 전부 유비군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 사실상 서량의 주도권은 유비군이 쥐고 있다. 유비는 형주와 한중이 연결되지 않아 당장 동원가능한 인력이 부족한 만큼 마초에게 서량의 지분을 보장하고 대 조조 동맹에 끌어들일 계획이다. 장리천 전투 이후 강족과 저족의 민심을 크게 얻고, 한수의 세가 위축되면서 두 동맹이 서량을 장악하고 있다. 이후 조조는 염행을 파견하거나 이민족 기병들을 동원해 파견하는 등 장안의 하후연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지만 위수 이남의 마초의 영역권을 쉽게 넘보지는 못하고 있다. - 장리천 전투
하후연군 8천명이 유비군 4천과 마초군 1천, 한수군 등과 벌인 전투. 유비군의 가축떼를 이용한 유도책으로 강족 마을을 대부분 피난시키고 학살을 위해 소규모로 들어온 하후연군 기병을 역습하는 데 성공했으나, 장합의 작전으로 장리천 상류에서 거의 다 보병인 유비군 4천이 포위당해 전투가 벌어진다. 방통이 강족 주민들을 동원해 벌인 소떼 난입 작전으로 기병에 쓸려나가는 상황은 막았으나 수적 열세로 점차 다시 몰리던 차에 마초가 한수군에서 빼낸 기병을 더해 3천5백 병력으로 하후연의 후방을 치면서 하후연과 장합이 퇴각을 결정. 유비군의 승리로 끝난다. - 서량 전쟁
- 형주 사령관 교체
원 역사에서는 방통이 사망한 후 유비가 제갈량과 장비를 불러들이면서 관우가 형주에 남아 형주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과 달리, 여기서는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불러들이면서 제갈량이 형주에 남아 형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조운과 진도가 보좌하게 되었다. 이후 임상대치 이후엔 유비는 형남의 업무 축소와 익주의 안정화를 위한 인력이라는 명분으로 원 역사에서 동오군에 항복했던 미방, 반준, 부사인 등도 익주로 이동시킨다. 이로서 형주는 제갈량, 조운, 진도에 등지, 요립 등 원역사와 많이 다른 수비진을 갖추게 된다.
- 유비-조조의 여론전 격화
210년대는 조조가 찬탈을 위한 준비에 속력을 내던 터라 역적질임이 분명한 여러 사건사고가 터졌다. 유비가 입촉을 미룬 것에는 이 시기에 조조의 발목을 잡기 위한 책략을 걸기 위해서였기에 유비는 위공국 분봉 이후 풍등에 조조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보낸다. 조조는 이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다가 가후의 조언으로 유비에게 마음대로 왕을 자칭하는 서량의 소군벌 송건을 토벌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내려서 자신도 유비의 약점을 쥐고 있음을 암시한다.[70] 결국 유비는 이를 그만두지만, 황명의 형식을 빌려 여론전을 멈춰야 했다는 것 자체가 조조 세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로서 기능했다.
이후엔 조조도 여론전을 펼치는데 자신의 휘하에 있던 명필 종요에게 요-순의 선양에 관한 글을 쓰게 해서 서량과 한중 곳곳에 뿌리고 다녔고 이는 당연히 그 두 곳에 거점을 두고 있던 유비에게도 포착된다. 이것이 후일의 찬탈을 위한 밑준비라는 걸 간파한 유비는 등지를 시켜 고대 역사서 죽서기년을[71] 발굴해 조조를 비난할 계획을 세운다. 이에 등지가 죽서기년을 가져오는데 성공하자 유비는 산하의 습정과 문관들, 그리고 나름 명필인 장비를 시켜서 죽서기년의 발굴을 각지에 알린다.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역사서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에 유비군과 거리를 두고 있던 각지의 호족과 학자들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해 몰려들었고, 장비가 필사한 죽서기년이 조조의 궁정에까지 흘러들어가면서 종요의 여론전을 잠재울 수 있었다.
- 상용 전투
늘그막에 찬탈을 위한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중이라 대규모 외정을 벌일 경황이 없던 조조는 적은 비용으로 유비를 흔들수 있는 패로 장로가 피신해 있는 상용 공격을 꺼내든다. 여전히 한중 백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를 조위로 데려와 유비의 근거지인 한중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버리려는 것. 이에 악진과 이전이 이끄는 7천의 병력이 상용을 향해 진격하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유비는 관우를 대장, 법정을 참모로 삼고 자신은 상용 현지에서 호족들의 인심을 사는 작업에 돌입한다.
유비군이 먼저 상용에 도착해 분지에 진을 펼쳤고, 악진은 상용 분지에 들어오자마자 군을 나누어 공세를 가한다. 악진은 본인의 장점인 빠른 실행능력을 충실히 살려, 5천 보병들로 차륜전을 펼치고 유비군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철기병을 이용해 삼복 전법으로 쉴새없이 관우를 공격했다. 돌격용 전기, 백병용 함기, 기동용 유기로 좋은 무장을 갖춘 조조군 기병의 공세에 유비군이 몰릴 때에 전기와 함기의 교대 타이밍을 파악한 관우가 오환돌기 50기를 선봉에 세운 기병 300기와 보병 700명을 데리고 돌격하며 반격에 나선다.
물론 삼복 전법의 약점이 교대 순간인 걸 악진도 잘 알고 있어서 미리 준비시킨 유기들을 출격시켜 함기를 보호하며 관우를 견제했으나, 선봉의 관우와 오환돌기들은 겁먹기는 커녕 더욱 속도를 내서 유기를 따돌린 채 그대로 함기를 덮친다. 이에 복귀하던 전기들이 관우에게 돌격하려 했으나, 이를 읽은 관우는 자신과 오환 기병들로 한발 빨리 전기를 공격했다. 수는 10배나 되지만 들고 있는 무기가 리치가 있는 장창이라 근접 백병전에선 취약한 전기 기병들은 관우의 무력에 그대로 돌파당하고는, 뒤를 따라온 요화의 보병 700명에게 붙잡혀 진흙탕 싸움에 빠진다.
유기를 제외한 악진군 기병들이 전부 혼란에 빠지자 악진은 관우에게 완전히 말려버린 전기와 함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유기 지휘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자 차륜전을 보조해줄 기병들이 없어진 보병들에게 관평이 이끄는 유비군 보병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보병들을 지휘하던 이전도 차륜전을 그만두고 정면으로 맞설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유비군이 밀리던 전황은 팽팽해진다.
그러나 악진이 지휘하는 유기 기병이 관우의 기병들 후방에 투창 공격을 해오자 관우도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러다 양쪽에서 눌려 당할 수 있음을 깨닫고 물러나야 했다. 악진이 유기를 지휘해 관우를 붙잡으려 했으나 관우는 이번에도 엄청난 속도로 포위를 벗어났다. 그리고 관우는 초반에 함께 돌격한 1천 돌격대를 다시 모아서 그대로 유기 뒤에 있는 악진을 향해 덤벼든다. 말 그대로 뭉쳤을 뿐 진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나, 관우의 무용에 힘입은 돌파력은 강력했고 이에 악진은 후퇴하면서 이전의 보병대 측으로 관우를 유인, 기보의 힘을 합쳐서 수적 우위로 관우를 잡으려 한다.
한편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유비는 법정에게 개입을 허가해, 법정이 보병을 지휘하던 관평의 예비대를 대신 지휘한다. 악진이 버텨서 관우를 끌어들여 포위하느냐, 관우가 따라잡아 악진의 부대를 격파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상황에서 법정이 가볍게 부딪히게 만든 경보병들은 당연히 반격당하기 전에 밀려서 퇴각하지만 그 광경을 보던 관우는 악진의 수작을 눈치채고 시의적절하게 물러날 수 있었다.
결국 회전은 서로 결정타를 넣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서로를 확실하게 끝장낼 역량이 없었던 양군의 지리한 대치가 이어진다.[72] 익주 정벌을 위해서 오래 붙잡혀 있을 수가 없었던 유비는 신씨 형제[73]에게 사람을 보내 조조, 유비 양쪽에 양다리를 걸쳐도 된다는 신호를 주고 이를 접수한 형제는 두 세력 모두에게 신속하겠다는 글을 보내 퇴각할 명분을 줬고 이에 두 세력 다 퇴각하며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다.
악진을 이기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치적 명분으로는 유비에게 득이 되었다. 한중을 점령한 후 유장이 한중을 점유할 욕심에 유비에게 형주로 퇴각할 것을 요구했는데, 유비는 조조에 맞서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절했던 것이 이 원정으로 빈말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중으로 귀환한 유비는 이미 충분히 벌어둔 명분, '온 힘을 다해 도와주었건만 역적 조조를 치는 데 병사 한 명 보태지 않은 불충하고 배은망덕한 유씨 일족' 유장을 향한 공세를 시작한다. 원 역사에서는 장로 견제는 하지도 않고 바로 익주에서 민심을 얻다가 점령전에 나섰기에 후세에 비난을 받았지만, 작중에서는 유장의 요청대로 장로를 상용으로 몰아낸데다 조조군과의 싸움까지 치렀는데 유장이(요청 외의 사항이라 도와줘야 했던) 조조군과의 싸움을 지원하지 않았으므로[74] 거꾸로 유장이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 임상대치
유비의 입촉이 쾌속으로 진행되자 유비 세력이 더 성장하면 동오에 위협이 될 것이란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손권이 이에 따르면서 원 역사보다 빠른 시점에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영토를 갈라주게 되더라도 형익양진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은 쥐고 있고자 영릉 태수로 등지를 파견하고 제갈량에게 임상현과 익양 사이 개울에 보루를 세워 지키게 했다.
파구의 물길을 쥐고 있는 동오군은 유비의 예상대로 여몽을 앞세워 장사와 계양을 휩쓸었고 지리적 불리함 + 2차에 걸친 익주로의 차출로 병력 자체가 부족한 형남 4군은 여기에 대응하지 못한다. 장사태수 요립이 어렵사리 끌어모은 2천 오합지졸은 변변한 싸움 없이 흩어지고 장사와 계양은 확보한 상태에서 유비는 2만 군사를 이끌고 장강 삼협을 통과해 익양으로 나아간다. 유비의 진격 소식이 노숙 측에 전해지자 감녕이 임상현과 익양 사이 요충지를 미리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 1,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나 그곳은 이미 제갈량이 방비를 마친 뒤였다.
출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과 경쟁을 하며 윗선의 눈치를 봐야 했던 처지의 제갈량은 유비의 지시를 120% 이행, 보루 2개를 나란히 세우고 주기적으로 병력을 교대해 만전 상태를 유지함과 동시에 원융노를 비롯한 군수물자들도 잔뜩 쌓아둔 상태였다. 빠르게 이동해 진지를 세울 생각에 경무장 공병부대와 300명에 불과한 감녕의 사병만 끌고 왔던 오군은 변변한 공성 무기도 없이 보루를 점거하려다 화살비만 쳐맞은 채 참패하고 감녕 본인도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본래 노숙은 영릉까지 점령했다가 선심 베푸는 척 돌려줄 생각이었으나, 감녕의 패배로 인해 유비군의 영릉 진입을 제때 막을 수 없었다. 2만 대군을 몰고 영릉성을 포위한 여몽도 유비가 형주에 올 수 없다고 허세를 부리며 항복을 종용했으나, 등지의 완고한 저항과 유비군 본대가 온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결국은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물론 여몽이 그냥 퇴각한 건 아니고 장사군 임상현에 여대와 일부 병력을 남기긴 했으나 유비군의 빠른 진격을 예상하지 못한 여대는 항복하지 않는 현들을 제압하러 출정했다가 감녕이 죽으면서 텅 빈 익양을 넘어온 관우에게 임상성을 빼앗기고 만다. 이렇게 해서 양 세력의 대치는 원 역사의 익양이 아닌 장사군의 치소 임상현 인근이 된다. 익양에 유비군의 보루가 쌓인 이상 임상성과 파구 항구의 싸움은 육군이 주력이 되기에 손권도 한발 물려야 했고 유비 역시 수군 전력으론 노숙보다 열세에, 임상현의 보급 부담을 덜기 위해 파구까지 가지 않고 그 앞에서 멈춘다. 거기다 두 세력은 대 조조 동맹이라는 근본을 아직 지켜야 했기에 더 이상의 충돌은 피해야 했고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수개월이 흘러 서량 군벌 한수가 죽어가자 조조는 과거의 서량 군벌이자 한수의 사위이며 지금은 조조에게 투항해 열후가 된 염행과 장안의 하후연, 장합을 동원해 서량에 손을 뻗으려 하고 이를 전해들은 유비는 지금이 빠질 때라 보고 계획대로 장사군과 계양군을 손권에게 넘겨준다.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었으나, 원 역사보다 손권을 훨씬 고생시켜 219년에 벌어질 두 번째 배신을 최대한 주저하게 만들기 위한 한 수였다.
유비는 임상대치 기간을 낭비하지 않고 충실하게 활용해 머무는 동안 조운과 공명을 시켜서 형북 대별산맥의 반 조조 세력을 지원해 세부적인 협조 체계를 짜내는 한편 관우를 서량에 원군으로 파견한다.
7. 평가
전작 '강감찬 천지를 껴안다'의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간절히가 비장의 수로 '유비 빙의'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많다. 간절히 작가의 경우엔 그 동안의 삼국지물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선택한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삼국 군주 중 하나인 유비 같은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75] 어쨌든 이 덕분인지 연재 15화만에 선작 1100명을 넘고 유료화 첫날 구매수 1000을 찍는 등 초반부터 화제는 제법 끌어 유지하는 중이다.다만 지금까지의 작품과 비교해도 유비가 워낙에 경박하고 격식없는 말투를 사용해서 원 역사 유비의 출생(유협 출신)에 현대 젊은이 곽선호의 영혼이 빙의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어색하다는 불평이 있다. 속으로 하는 거야 현대인 특이라 봐도 되니 상관이 없는데 양부의 고모를 대할 때처럼 대놓고 그러는 경우가 많다보니 문제로 삼는 것. 사실 이는 백이잇 시절부터 제기되는 작가의 고질적인 문제기도 하다. 결국 양부 고모 파트는 유비가 정중하게 말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1] 박사학위를 못 따고 빙의한 것에 자격지심이 있는지 임상대치 중에 박사였으면 또렷한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2] 유비가 유표 사후에 형주 장악에 실패하였고, 적벽대전에선 주역이 아닌 객장으로 참여하면서 손권에게서 남군을 빌리는 형식으로 형남 장악을 시작하면서 시작부터 꼬여버린 상태였는데, 입촉 과정에서 의인으로 소문난 유비의 평판이 크게 깎인데다 3년간 파촉 장악에 집중하느라 위-오 전쟁, 위-서량 전쟁 등 천하의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시점에 관여할 수 없었으며 유비가 파촉을 점령한 직후 위가 장로가 차지하고 있던 한중과 파동을 점령해버리고, 기껏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형남 4군 중 3군은 익양대치로 오에게 양보하는 등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봤다. 인재 시점에서도 손해인 게 유비를 따라 입촉을 보좌하던 책사 방통이 전사함에 따라 형주를 방어하던 제갈량과 장비를 불러들여야 해서 형주를 관우 1명에게 맡겨야 했고, 한중공방전의 주역으로 맹활약한 황충과 법정도 220년에 죽기에 210년대 초반에 3년이나 되는 시간을 파촉을 차지하는 일에 낭비할 수 없다.[3] 사실 일단 큰 틀에서는 제갈량의 전략도 어느 정도 따른 것이긴 하다. 제갈량은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고 서쪽의 융족(혹은 양주 군벌 마초)와 접촉하면서 관중으로 유비가 진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대전략 자체는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 사실 그렇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방통이 바로 유장 참수작전으로 입촉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유비가 그걸 거부하고 벌인 익주 정벌전쟁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익주에서 유비군을 관찰한 여대가 유비군이 대패해 백제성으로 도망갔다는 증언을 하는 등 유비 본인이 익주의 군사적 역량을 잘못 재는 실수를 한 것이다. 주인공이 이 점을 대놓고 지적하면서 원 역사 유비의 선택을 까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정한 것이나 유비의 군사적 능력이 대놓고 별로라는 서술한 것으로 보면 간절히 작가 역시 유비가 굳이 방통의 중책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책이라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4] 때문에 서량 전역이 격해질 무렵에도 양군은 합쳐도 5만 내외에 주력군은 3만 내에서 정리되는 데 반해 삼국지를 한번만 읽어봐도 기억하는 네임드들이 대거 출정해서(유비군만 해도 오호대장군 중 형남에 있는 조운을 제외한 4명(관우, 장비, 황충, 마초)외에도 방통과 법정, 위연 등도 네임드다. 조조군도 하후연, 서황, 장합, 조홍 등 삼국지연의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네임드 장수들이 출진한다.)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 정도다. 연의에선 10배 뻥튀기 된다.[5] 애당초 유비는 조조가 전력을 내지 못하는 빈틈을 노리고 있고, 조조는 조조대로 유비가 힘을 기르는 걸 방해하려는 걸 전제로 두고 있어서 서로의 노림수가 먹히는 바람에 이렇게 되는 것.[6] 중원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있는 조조군 수뇌부에서도 이제 유비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사실 익주와 한중도 점령된지 얼마 안된지라 개발도 제대로 안된 참인데도 이런 말이 나온 것.[7] 다만 조조는 유비의 세력은 과거 원소에 비견할만하나, 인구밀집지대가 많은 하북에 비하면 그 최대치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엄청난 행정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8] 원래 융중대는 익주 방면에서는 서량-장안으로 이어지는 공세를 주장하나, 본작에서는 서량을 이미 유비의 동맹인 마초가 차지했고, 유비가 할거와 세력 확장보다 본래 목표인 조조 격파에 더 무게를 두기에, 중원의 핵심 지역을 바로 칠 수 있도록 좀 더 공세 방향이 북동쪽으로 바뀌었다. 작품 외적으로 생각하면 이전작 내마속에서 옹양주-장안-홍농-낙양순으로 북벌을 진행했기에 중복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9] 조운, 진도, 간손미 등[10] 제갈량, 방통, 황충, 위연 등.[11] 황권, 법정, 장송 등.[12] 본래 역사에서도 방통은 유비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기보다는 군말없이 충성하는 측이었으나, 익주 정벌을 두고서는 유장의 장수들을 꺾고 부성에서 술에 취해 기뻐하는 유비를 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만을 보이는거 아닙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방통에게 화를 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봉합되긴 했다.[13] 방통이 입촉을 찬성했단 기록도 있지만 본래 방통의 상책은 정병만을 모아서 성도를 기습해 제압하는 것인데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백수관 등의 성도 주변부터 차례대로 제압하는 중책을 썼다. 방통 입장에선 속전속결하자는 상책도 이미지 관리, 도박수라는 이유로 거절하고는 시간 걸리는 중책을 채택하더니, 아직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입촉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자기의 상책이 채택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14] 물론 이는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인 기산도를 택했을 뿐, 방통이 생각하는 상책은 익주에서 4~5개월 더 시간을 들여서 5만 이상 대군을 단번에 동원해 여러 진군로에서 동시에 공격해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융족 등의 이민족을 대거 징병해서 먼저 가 있던 관우와 마초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겨우 2만 내외의 병력만이 준비된 상황이라 상책을 쓸 수 없어서 기산도를 선택한 것.[15] 당연히 무장인 장비가 서예사의 위인인 종요를 능가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개성있는 필체 + 일찍이 만인지적으로 조위와 손오 양쪽에서 인정받은 장군의 글씨라는 점에서 화제성은 충분했다. 이후에 종요가 장비의 사본을 보고 난 후의 반응을 보면 이런저런 단서 빼도 달필 소리 들을 수준은 되는 모양.[16] 실제로 법정의 계책에 관우가 대놓고 면박을 주자 앞장서서 분위기를 수습한게 장비였다.[17] 실제로 유파에 대해서도 능력 입증 전에는 실패하면 등뼈를 박살내겠다고 벼르는 모습을 보인다.[18] 유비는 노린 적도 없는데 일치한 우연에 감탄했다. 기병을 잘 다루는 장비는 병주로 보내고, 백병전에 강한 위연은 북원에 보내고 나니 우연히 황충이 남은 것.[19] 물론 유비는 그 보군 2천을 기성의 난을 틈타 잠입시켜 마초의 가족을 구출하는데 써먹을 계획이어서 사양했다.[20] 원역사에서도 위연은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21] 정확히 말하면 주창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정사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단순히 부장이라 나오지 이름은 안나온 탓에 주창이란 인물 자체는 정사에서는 허구 취급 받는다.[22] 다만 이에 대해선 이름 그 자체 때문에 못 쓴거 아니냐는 드립도 있다.[23] 다만 정사에서도 유비를 설득할 때 일부러 화살비 속으로 걸어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깡이 없는 건 아니다.[24] 물론 본인도 이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방통과 마찬가지로 5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여러곳에서 들이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있으나 조조의 발빠른 대처 덕에 대군 동원이 불가능해지면서 차선책으로 진창도를 제안한 것이다.[25] 실제 역사상으로도 한번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 군대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된 상용점령작전을 기획한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런 기책이나 도박을 즐기는 성격으로 작가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26] 형주 사람들은 수로의 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다고 한다. 미방과 부사인도 비슷했을 것이며 혹여 싸우고 싶었어도 아래 병사들 사기가 다 떨어진 마당에 뭘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27] 실제 역사에서도 213년, 마초가 기성을 공격할 때 장로는 양앙을 대장으로 삼아 마초를 돕게 했고 마초가 기성을 점령하자 그의 명령대로 위강 등 위나라의 관리들을 죽인다.[28] 유언과 동주병들이 들어온 이후, 중앙에 세금은 안 내고, 그들의 갑질로 인해 시장도 사라져서 물자가 거의 익주 안에서만 고이고 쌓였다. 때문에 익주민들은 100배 가치의 화폐가 발행되어도 연 단위로 쓸 식량을 창고에 쟁여둔 상태라 물가가 그렇게 폭등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29] 사실 그렇다고 조조에게 도망칠 만한 상황도 아닌 게 이미 한 번 형주에서 조조 밑에 들어갔다가 조조가 적벽대전 이후 유비군과 동오군이 밀고 들어오는 형남 4군을 복속시키라고 강제로 파견하는 바람에 그대로 다시 도망자가 되었다. 즉 대놓고 버려진 셈이니 조조한테 돌아가기도 애매했던 셈.[30] 원 역사에서는 아예 남진하는 조조군의 진입로에 토성을 쌓아버리는 대공사로 조조의 기를 죽였으나, 본작에서처럼 한중군민들이 경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패했다.[31]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조조의 위왕 즉위로 인해 폭발한 반조조 인사들이 형주를 통해 유비군과 협력하면 손해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역사에서 익양대치 이후 동오는 더욱 관우를 경계할 정도로, 유비군의 기세는 매서웠다.[32] 유비도 이에 대해 굴릴만한 장수가 많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며 속으로 미안해했다. 다만 이후 익주를 차지하면서 어느정도 인재를 분배하기로 한지라 중요순위가 낮은 임무 일부는 내려놓았을 걸로 보인다. 당장 신병 모집과 훈련, 그리고 귀순자 감찰 업무가 후술할 진도가 하고 있기도 했고.[33] 유비는 가는 길에 무장을 하고 여비를 넉넉히 써도 이상하지 않도록 돈많은 비단 장수로 위장시켰는데, 유비의 서량 개입에 의한 나비 효과로 인해 서량과 조조 세력권의 치안이 생각보다 나빴기 때문에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한다. 유비는 후일 이 일과 여러 정보를 통해 서량-관중의 인구 공백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는다.[34] 파구에서 내려오는 수로가 유비쪽에 압도적으로 불리해 당대의 명장 누굴 데려와도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는 구도라 거리상 동오에 가까운 장사와 계양은 포기하는 걸 상정하고, 남쪽 구석에 있어 구원이 가능한 영릉을 지켜내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 원 역사의 영릉태수 학보는 어찌어찌 버티나 싶더니 여몽의 블러핑에 넘어가 항복해버렸다.[35] 배송지의 기록으론 10만. 작중에선 5만 내외로 서술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전근대 병력 서술이 늘 그렇듯이 이 당시 10만을 호왈십만으로 본듯 하다.[36] 비록 적인 양부가 계속 호족의 지원을 받아 밀렸지만, 양부의 친척 일곱이 참살당하고 양부도 죽기 직전에 살아남는 혈전이었다.[37] 뛰어난 학력과 가문, 소수민족의 핏줄까지 가졌다. 마초는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며 강족의 피가 섞여 이민족들과도 연줄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재도 뛰어났다. 만일 동관대전에서 이겼다면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군주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다만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까지 되며 승승장구했지만 마초는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실패한 버락 오바마라 한 것.[38] 마초는 역사에서 거병 와중에 갑자기 병주목을 자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부터 조조의 방어라인을 우회해 병주를 통해 장안을 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39] 황권과 관우가 수군을 데리고 진창성에 가버린 판에 휘하 호족들이 위수 북부의 동포들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다고 한다.[40] 사실 양부 입장에서는 기성 전투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이제 와서 일족을 다 죽인 마초와 화해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하다. 애초부터 양부는 조예 시절까지 조위에 충성하면서 조예에게 온갖 충언을 아까지 않았던 골수 친조조파-조위 충신이기도 하니 일찍부터 한실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41] 원 역사의 양부는 조예 시기 구경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나, 끝내 조예가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자 홧병으로 죽는다. 즉, 여기서는 조예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셈.[42] 왜 그렇게 되냐면 양부 고모의 논리대로 조조가 충신이라면 헌제가 외척인 동승에게 몰래 조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의대조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 원역사에서는 마초가 이를 알지 못해 그냥 말없이 죽여버리지만 여기서는 의대조 사건의 당사자인 유비가 있다보니 완벽하게 카운터를 쳐서 양부의 고모를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버렸다.[43] 원역사보다 1년 빨리 침공이 벌어졌다.[44] 사실 둘의 사이를 일반적인 사위와 장인으로 보기 힘든 것이 한수와 반목하던 염행을 한수가 반강제로 화해 겸 붙들기 위해서 자기 딸을 줘서 사위로 만든 것이다. 염행은 결혼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에게 항복해 도망쳐버렸고, 이 때 한수의 딸을 데려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45] 명분은 사위로서 장인의 조문을 가는 것.[46] 툭하면 반란 일으켰다 특정인 한 명에게 덮어 씌우고 복속하기를 반복하다보니 역대 후한 조정도 서량 반란에 대해서는 당시 기준으로 관대하게 처우한 편이었다. 마등이 서량의 기반을 포기하고 일족 전부 이주하거나, 계속 서량에서 할거하는 대신 장남 마초를 서량에 두고 자신과 다른 일족만 입조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데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47] 명목상으론 8천명에 달하는 한수의 세력을 흡수했지만, 그들은 전부 한수 밑에 있던 호족의 사병일 뿐, 염행이 믿을 직속병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전부 분해되었다.[48] 물론 이때 낙오된 병력이 많아 합류에 성공한 건 5천 정도였으나 지금 당장 추가 군사가 필요했던 유비에게는 나중에 올 7~8천 보다는 당장 있는 5천이 더 중요했기에 칭찬을 들은 것.[49] 단순히 황권과 장임이 유비에게 투항할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며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는 것을 더 걱정했다.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면 그 공을 명분삼아 익주의 군권 자체를 가져갈 텐데 외부인으로서 성도 인근의 기름진 토지를 차지하고 토착 세력과 알력을 빚어온 동주병, 그 동주병의 주인인 유장 입장에선 침략이나 그거나 다를 게 없었다.[50] 유비가 장송에게 단순히 안부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경계 대상 1호인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니 황권은 이 기회에 장송을 조지고자 했다. 그러나 장송이 진짜 내통을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편지를 주고 받겠냐며 반박하자 황권도 아무 말을 못했고 일단 사형은 피한 채 옥에 수감된다. 이마저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풀어주면서 유장에게 해명하는 서신을 보낸 덕에 곧장 석방된다.[51] 장사, 계양군을 넘겨주는 선택지도 쉬운 게 아니다. 이 2군이 개발이 덜 된 무릉, 영릉과 달리 이때부터 형남의 곡창지대로 활용되고 있었고 여기를 내줘버리면서 형주에서의 북진이 보급 부담으로 힘들어졌다. 파구를 점거하고 있는 동오가 이쪽으로 들어가는 지원군을 손쉽게 차단하고 순식간에 대군으로 밀어버릴 수 있어 정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었다.[52] 실제 역사에서도 손권이 나중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의 도독들을 평가한 바가 있었는데 노숙이 여러 부분에서 잘한게 많으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줘서 통수를 맞은 건 실책이라고 평가하여 주노여육 네 도독 중 가장 평가가 낮았다. 물론 노숙도 할 말이 있는데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강동과 형주를 잇는 장강 수로가 동오에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막강한 수군으로 언제든 손쉽게 찔러 내려갈 수 있었고 수군이 약한 유비측은 여기 대응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호구라서 그냥 넘겨준 게 아닌 것.[53] 여몽은 본래 굉장히 신중하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을 선호하는 인물이다.[54] 유비가 장사, 계양 쪽을 양보할 생각이 있는 것과 별도로 아직 익주를 떨어뜨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영토를 할양해 버리면 아랫사람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뻔히 알면서 강짜를 놓은 것.[55] 원 역사보다 입촉이 빨리 진행되어 임상대치 역시 익양대치보다 빨리 진행되었을 터라 감녕이 분투했을 2차 합비 공방전이나 유수구 전투는 물론 (원 역사에서는 익양대치 이전이었던) 환성 전투조차 벌어지지 않아서 감녕의 활약상이 상당히 줄어들어 버렸기 때문.[56] 후조의 석륵이 조위-서진 치하에서 노예로 온갖 고생을 해서 조조-조비와 사마의-사마사&사마소 부자를 혐오한 기록이 있다.[57] 사실 이 부분은 본 소설의 시계열이 좀 꼬인 상태인데 본래 순욱의 자결은 한창 조조의 위공 즉위 논의가 진행되던 2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이 세계관에서는 소식이 뒤늦게 전달됐거나, 혹은 조조가 위공을 칭하자 순욱이 그제서야 죽은 듯하다.[58] 여기서 대놓고 유비를 추켜세웠다간 유비 소속 출신이던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져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니 어쩔 수 없긴 했다.[59] 서진은 영가의 난이라고 중국사 최초로 한족 통일왕조가 이민족 왕조에게 멸망당해 남북조시대 시즌1을 찍었고, 동진은 유유에 의해 최초로 왕조 교체 뒤 전대 왕조 멸족을 당했다. 나라가 내외적으로 각종 국가 막장 테크를 밟았던 것은 덤이다.[60] 관우는 변수가 적은 힘 승부, 단일전장에서는 강하나, 변수가 많고 분산되는 전장에서는 약한데 하필 형주가 딱 이런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조조군은 이통, 문빙 등의 우수한 지휘관을 대거 동원했다.[61] 원 역사에서도 유수구 전투 1년 뒤인 218년에 사망한다.[62] 다만 이에 대해선 서황이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고 보는 독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유비 세력은 당시 대다수 군웅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데 당장 유비군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황권이 관우를 보고 저 사람 왜 저러냐며 이해를 못할 정도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유비가 조조와 같으면 애당초 판이 이렇게 전개됐겠냐며 조소하면서도 거의 평생을 조조 밑에서 지내면서 유비를 겪어보지 못한 한계라고 보기도 한다.[63] 특히 서황이 번성 공방전에서 활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퇴장 한 것이 추후 형북 원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64] 보통 조등의 양아들이자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이 본디 하후씨였는데 조등에게 입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서 하후연이 조조의 사촌동생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은데, 패현 조씨와 하후씨가 가까운 사이는 맞았지만 정말 조숭-조조 가문과 하후씨의 관계가 혈연 관계 였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숭 문서 참고.[65] 유비는 이를 보고 역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살아남은 자 다운 담력이라고 평가했다.[66] 조홍도 염행, 곽회, 장합이라는 상당히 화려한 포진을 갖추기는 했으나, 배라고는 강족, 저족에게 징발한 쪽배 밖에 없는 상태에서 촉한의 수군 에이스 둘을 물 위에서 이기는 건 무리였다.[67] 제갈량에게 귀부한 호족 진거는 과거 형주자사 유표 밑에 있던 왕찬의 죽음을 근거로 들면서 유비 세력에게 귀부한다고 둘러댔다.[68] 원 역사에서도 방통 등은 형주는 익주와 교통도 불편하고 관리도 안되니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었다.[69] 그래도 실 역사에서는 동주계의 유력인물인 방희를 상대로 파군쪽을 두고 자웅을 겨룰 만큼 장로는 유장에게 있어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장 시기엔 파군 일대는 장로 측 인사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 다만 동주병이 나섰으면 장로 따위 쓸려나갔겠지만(동주병은 작정하고 나서면 유비군도 위험할 정도의 정예다) 정예였던 동주병이 싸우기를 거부하고 2선급 현지 병력만 보냈는데 익주 토착 병력은 제대로 된 훈련도 안 받았고 의욕도 없어서 복지국가를 사수하려던 오두미교 광신도들에게 처발렸다고 한다.[70] 한 황실의 충신을 자처하는 이상 유비는 조조가 내리는 각지의 군벌 토벌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이들도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 마음대로 장군이며 왕을 자칭하는 역도들이기 때문.[71] 죽서기년에는 요순시대의 선양이 상당한 정쟁을 거쳤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72] 유비군은 관우가 이끄는 수백명(최정예 오환돌기는 고작 수십) 외엔 정예병이 없어서 처음 돌격에서 악진을 잡지 못 한 이상 결정타를 입힐 수 없었고, 조조군은 정예병의 규모에서 우위를 가졌으나 병력 규모는 유비군과 대동소이해 적이 방어로 일관하는 이상 뚫어내기 힘들었다. 모험을 할 수도 있지만 산으로 둘러쌓인 상용의 지형 특성상 모험이 실패하면 퇴각 시 리스크가 너무 크다.[73] 지방 소군벌에 불과한 자신들의 사병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거대 군벌 군대를 이길 자신은 없고, 양측 모두 병사들이 약탈을 하지 못하게 단속하고는 있었지만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의 생산 활동이 완전히 막혀버려 졸지에 말라가고 있어서 관망할 수도 없는 참이었다. 그래서 신의가 저것들은 대체 언제까지 싸울 거나며 한탄하기도 했다.[74] 오히려 황권을 대표로 해서 대놓고 유비를 쳐야된다고 주장하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우유부단한 유장 덕에 유비가 대처할 시간을 벌었다.[75] 삼국지 관련 작품이 4개(연중 포함)인데, 처음 두개의 작품은 아예 가상인물이었고 실존인물도 마속과 간옹(연중작인 삼국지: 신도부터 시작하는 교주생활의 주인공)으로 이 둘은 밈화로 유명은 할지언정(마속은 등산왕, 간옹은 간손미) 거물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는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