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17:23:31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
장르 대체역사, 빙의
작가 간절히
출판사 KW북스
연재처 문피아
연재 기간 2024. 12. 09. ~ 연재 중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특징5. 등장인물
5.1. 유비군
5.1.1. 한중5.1.2. 형남
5.2. 서량5.3. 익주5.4. 동오5.5. 조위5.6. 형북
6. 개변된 역사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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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삼국지 대체역사물 웹소설. 작가는 간절히.

약칭은 유비쟁패.

2. 줄거리

촉빠였던 곽선호

유원지에 생긴 싱크홀에 빠져 후한 말 군웅 중 한 사람인 유비의 몸에 빙의하게 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략

강대한 조조, 견고한 기반을 가진 손권과 대결해 천하쟁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4년 12월 9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2025년 2월 3일부터 유료화 되었다.

4. 특징

중국 중세사 석사 학위까지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20년 진성 촉빠 곽선호가 웹상에서 촉빠들이 위빠오빠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상황을 한탄하다가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 직전의 유비에 빙의하는 소설.[1]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익주 가맹현에서 한중의 장로를 친다면서 출병은 안하고 와병하는 척 군대와 물자를 모으던 건안 17년(212년)쯤 시점이다. 빙의한 곽선호는 일견 보기엔 제갈량의 융중대가 주장한 입촉이 합리적 전략 같지만 실제론 단점이 명확하다는 점을 파악하고[2][3] 입촉 대신에 유장과의 약속대로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5. 등장인물

5.1. 유비군

주인공 유비의 세력권. 동오와 함께 얻은 형남 삼군에서 시작해 세력을 키운 다음 한중을 차지, 한중을 기반으로 해 다시 서량에 영향력을 뻗치고는 형남과 한중에 있는 주력군 대부분을 동원해 입촉한다. 즉 213년 기준 현재 세력권은 한중과 형남. 익주 북쪽인 파군과 서량 일대도 점령하거나, 동맹을 통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력으로서의 목표는 당연히 조조 격파와 한실 부흥. 이를 위해 실행중인 대전략은 제갈량이 세운 융중대. 입촉 직전의 동원력은 한중에서 2만. 형남에서 4~5만. 조위 혹은 동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3만 5천의 병력이 형남에 남겨졌다.

5.1.1. 한중

본래 장로의 영지였으나 유비(곽선호)가 공격해 차지했다. 이후 유비의 서량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고 있다. 시작 시점에선 관우, 장비, 제갈량 등 유비군의 주축이라 할 만한 다른 인재들은 형주측에 남아있는 데다 익주, 상용 등은 아직 차지하지 못해 유비군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형남과는 분리되어 있다.

서량에서 마초 구원에 성공한 뒤 관우, 장비를 소환하고 위연을 한중태수로 배치한 후 입촉을 시작한다. 익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한중은 수비가 용이하면서도 서량, 중원과 형주로 어디로든 나갈 수 있는 요충지라 주요 전선기지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 유비(곽선호)
    주인공. 진성 촉빠로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한 후 유장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던 유비에게 빙의했다. 빙의해 상황을 파악한 이후 입촉은 장기적으론 악수라고 판단하고, 한중군을 공격해 한중을 차지. 이후 적극적으로 북중국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조조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헌제의 칙서에 면역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데, 작중 유비는 의대조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 호족들은 조조가 내린 천자의 칙서를 보면 흔들리거나, 이를 명분삼아 배신하는 등 답없는 태도를 보이는데 유비는 그것이 조조의 위조 칙서라고 당당히 주장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이다.

    한중을 공략한 이후 마초의 거병과 반대파의 전쟁통에 6천 병력을 동원해 서량에 진입. 자신이 은혜를 베푼 마초와 상하관계의 동맹을 맺어 서량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고 있다.

    자신의 미래 지식을 원 역사 유비의 '사람보는 눈'으로 둘러대고 있다. 군사적 역량은 현장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조조나 주유 등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하나 무용을 알아보는 눈과 원 역사처럼 인재를 보는 안목은 최상급으로 언급된다. 장리천 전투 이후 강족과 저족의 민심을 얻어서 서량 공략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고, 본래 한중으로 온 이유대로 조조의 위공 즉위에 대한 비판을 통한 여론전을 시작한다.

    조조가 악진을 보내 상용의 장로를 손아귀에 넣으려하자 관우, 법정과 함께 수로로 상용에 친정. 한 차례 회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뒤 상용 호족들과의 합의하에 물러난다. 악진과의 교전에서 악진 군은 7천이 전부 정예인 반면, 비슷한 규모인 자신의 병력에서 정예라 할 만한 자는 기껏해야 수백이라는 점을 실감하며 정예병을 기를 인력과 물산의 필요성을 실감한다.

    상용에서 귀환한 후 관우와 군을 쪼개 본격적인 입촉에 돌입한다. 부성, 백마관, 면죽관을 순조롭게 함락시키고 낙성에 이르렀으나 동주병들이 철저히 방비하는 요새를 뚫기가 쉽지 않던 차에 법정이 일종의 초토화 작전을 제안한다. 샛길로 기병대를 침투시켜 교전은 회피하며 성도 인근에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불살라 버리자는 것. 그때까지 쌓아온 유비군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헌책에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고 유비는 임협집단 시절에 품은 복고적, 이상적 관점을 버릴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고뇌하게 되고 결국 조조와 사마의의 길의 결과가 팔왕의 난과 중국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온 오호십육국 시대임을 생각해내서 이상적 관점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원 역사의 익양대치에 대비한 안배로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고 대별산맥 인근 반조조 세력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연계하는 한편 오의 두 번째 배신에 대비한 쇠사슬과 쇠막대를 비밀리에 제조한다.[4]
  • 방통
    유비군의 책사. 정략과 군략 양측에 뛰어나 빙의 직후라 정신없는 유비 대신에 군사 작전 시에 총지휘를 담당한다. 본래 유비의 명령대로 입촉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전략을 바꿔 한중 정벌을 주장하자 그쪽이 마음에 든다면서 바로 찬동한다.[5][6] 한중 공략에서 전황을 읽고 공격을 정하는 등 활약하고 이후 서량 진출에도 유비의 책사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동참한다.

    자기 눈으로 전장을 봐야 하는 현장파 책사라서 아직 전투 중인데도 말을 몰고 적진 가까이 가는 등 위험한 면모를 보여서 유비가 늘상 호위를 붙여놓는다. 원 역사에서 어이없이 유시에 맞아 죽은 이유도 마음이 급한 데다가 이런 성향의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담백한 성품으로 상용 전투에 종군할 군사로 법정을 추천하며 먼저 양보해주었다.

    상용에서 귀환한 유비가 본격적인 익주 정벌을 시작하자 다시 종군을 시작. 정예 병력으로 빠르게 친다는 전략을 완벽히 성공시키며 부성, 백마관, 낙성을 연달아 함락시킨다.
  • 관우
    입촉을 준비하던 유비가 장비와 함께 불러들인다. 명실공히 유비군 2인자라 방통은 당연히 관우에게 형주를 맡길 것이라 여겼으나 그랬다간 원역사처럼 손권과 관계가 파탄날 수 있음을 잘 아는[7] 유비는 그를 장비와 함께 한중으로 소환한다. 성격은 단순한데다 큰형 앞에서 아이처럼 구는 면모가 있어서 조조가 사건 하나 일으킬 때마다 허도 사냥터에서 베어버렸어야 했다며 칭얼거린다. 이런 단순한 성격은 전장에서도 보여져서 한번 흐름을 타서 힘을 내면 온 천하를 울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이없이 패배하기 때문에 최대한 변수(현지 호족, 보급, 적의 공세로 등)가 없는 환경을 만들어 오롯이 한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은근 손이 많이 가는 유형이다. 이런 성향을 감안해, 험준한 산악 지대 사이의 작은 분지여서 예측된 장소에서 정면 힘싸움 밖에 할 게 없는 상용에서 악진에 맞설 장수로 추천받는다.

    상술된 단순한 성격에 병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관우는 도적떼와 군소 세력이 난립하던 시절에나 유효하던 맹장과 소수 정예를 활용한 전투법을, 거대 세력들로 재편되며 체계가 잡힌 삼국정립기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요립이 관우에 대해 평했던 것처럼 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병력 운용을 하는 약점이 있지만,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안량의 목을 베는 괴력[8]과 오랫동안 곁에 두며 훈련시킨 부곡의 숙련도가 합쳐진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당대 제일 전술가인 조조 휘하에서 체계적으로 병법을 익히고 경험도 많은, 오늘날에도 오자양장이라 불리며 뛰어난 장수로 알려진 악진이 백전연마의 정예병을 거느리고도 관우의 돌파에 쩔쩔맬 정도. 이것이 기본기는 부족하지만 피지컬을 이용한 돌파로 득점을 하는 르브론 제임스의 플레이 스타일과 유사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관브론 우임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9] 이래저래 옆에서 챙겨줄 유능한 참모와, 참모의 말을 듣도록 제어할 주군의 교통정리가 필수인 캐릭터로 작중에서도 유비가 법정에게 빨리 가서 붙으라 할 정도다.

    상용에서 귀환한 후 유비와 갈라져 파군 방면을 접수하고 여유가 있으면 강주까지 진군하는 역할을 맡는다.[10] 마침 복황후 일가의 몰살로 유비측의 명분이 한층 강화된 덕에 순조롭게 파군으로 길을 뚫었고 낙성 앞에서 맏형과 합류한다. 파군에서 왕평을 알게 되어 유비에게 천거한다.

    법정이 낙성을 앞에 두고 제안한 초토화 전술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다. 상용에서 도움 받은 법정을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장비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수습하자 받아준다. 관우의 성향을 다시 느낀 유비는 원역사의 유관장 삼형제가 맞았던 슬픈 결말을 돌이켜보고 조조나 손권처럼 쉬운 길을 가고 싶다는 고뇌에 휩싸이지만[11] 결국 인의의 길을 택한다. 유비가 약탈은 지양하되 기병을 활용한 흔들기 자체는 시행하기로 결정하자 장비와 함께 자원한다.

    성도를 휘젓는 과정에서 동생과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형은 아랫사람에게 가혹한 동생이 염려스러워 볼 때마다 말리고, 동생은 식자들에게 말을 예쁘게 못하는 형이 걱정스러워 충고를 해준다. 관우도 각자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진 않아서 장비에게 우리는 함께 있는 게 좋다고 말한다. 자신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1만 동주병을 장비와의 협격으로 박살내고 상존과 호위병들을 단기로 참하는 무용을 선보인다.

    그 이후 동오가 형남을 침공하자 유비와 함께 형남으로 가 동오를 막기 위해 이동한다. 북방 출신임에도 수군 조련에 일각견이 있어 물길이 매우 거세고 굴곡진 장강삼협을 능숙한 조함 실력으로 돌파한다. 형주에 도착한 후 요립과 함께 임상현을 수복해 대치했고 대치가 마무리 된 후 마초를 돕기 위해 서량으로 파견된다. 마초가 관우가 무척 싫어하는 명문가 자제 겸 호족이라 유비는 둘이 불화할 것을 걱정하는데 제갈량은 염행과 마초의 일기토 일화를 거론해 마초를 호족이 아닌 (관우가 한없이 관대해지는)조조에게 핍박받는 약자로 여기게끔 만든다.

    원역사처럼 호족들을 싫어하나 양민들에게는 친절하다. 죽서기년 발굴로 한중에 온 가난한 학자들이 노숙을 하자 안쓰러워하며 얼른 공개해 돌려보내자고 의견을 냈다. 반면 호족 상대로는 불안하기에 외교는 아예 유비가 직접 맡았다. 또한 원 역사의 관우의 북벌에 대해 왜 그랬어냐 했는지 여러화에 걸쳐 설명된다.
  • 장비
    입촉을 준비하던 유비가 관우와 함께 불러들인다. 명사를 우대하고 교류하기 좋아하는 성격답게 서량으로 떠난 마초를 만나지 못한 것을 크게 아쉬워한다. 평소 상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갖고 있을 정도로 서예에 능해서 발굴된 죽서기년을 필사하는 일을 맡게 된다.[12] 단순한 둘째 형과 달리 용맹하면서도 때론 약삭빠르게 행동할 줄도 알아 부하들 때리는 것 말고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장.

    익주 공략이 시작되자 기병 200기로 샛길을 타고 부성을 우회, 백마관에서 지원오던 양회와 고패의 4천 병력을 급습한다. 훈련도가 낮은 익주군 보병이 대열을 갖추기 전에 난입해 진용을 무너뜨린 다음 양회를 참살하고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다. 백마관 군사를 깨뜨린 뒤에도 퇴각하는 대신 길목을 차단한 채 아군의 수를 많아 보이게 하는 기만 전술로 부성에서 후퇴하는 유순의 군대를 붙잡고 있었고 유비가 뒤따라와 이들마저 격파해 백마관을 손쉽게 함락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관우가 법정의 초토화 전술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자칫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끼어들어 수습해낸다. 유비가 파괴 행위는 지양하되 기병을 활용한 흔들기 자체는 시행하고, 동주병이 요격을 위해 출진하면 야전에서 격파하는 전략을 택하자 둘째 형과 나란히 자원한다. 전력을 숨기는 낚시 전술로 부금과 상존의 동주병을 대파한다. 그 이후 유비와 관우가 급히 형주로 가면서 1만 5천 병력으로 유장군을 견제하며 낙성을 지키게 된다.

    식자나 호족들에게 (설사 그럴 의사가 없어도)말이 거칠게 나가는 둘째 형에게 걱정이 많아 충고해주곤 한다.[13] 반대로 관우는 병사들의 작은 과실 하나까지 넘어가주는 일 없이 꾸짖고 처벌하는 동생에게 걱정이 많다.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고,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틀어질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함께 다닐 때 시너지가 무척 좋다. 자신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1만 동주병을 형과의 협격으로 가볍게 박살내어 유장과 동주병의 군심을 뒤흔들어 놓는다.
  • 황충
    유비군 장수. 형주목 유표의 중랑장으로 조조에게 형주가 넘어간 이후 형남공방전 때 유비 산하로 들어온 인물. 노장임에도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서 한중 정벌에 공을 세운다. 이후에도 서량의 기성에 일꾼으로 위장하고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내며 활약한다. 천성이 선량한지 악행을 저지른 호족들과 조조군을 상대할 때 유독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굉장한 명궁으로 화재현장의 난장판 속에서도 언뜻 보이는 실루엣으로도 활을 쏘아 준수한 명중률을 보이고, 제대로 쐈을 때는 막는 것이 아니면 빗나갈 일이 없다. 입촉에서도 앞장서서 군을 이끌며 여러 성을 점령하고 있다.
  • 위연
    유비군 장수. 뛰어난 무예와 전술안을 가진 맹장으로 어지간한 무인이나 병사 몇 명 정도는 혼자서도 가볍게 참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한중군 정벌에 활약하고 이후 기성에 황충과 함께 가서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을 베어버리고 기성을 지켜낸다. 서량에서 귀환한 후 유비가 익주를 정벌하는 동안 한중을 지킬 장수로 낙점된다.
  • 유봉
    유비의 양자. 형주에 있다가 두 숙부와 함께 한중에 들어온다. 상용에서 관우를 보좌할 부장으로 천거되었으나 원 역사의 행적이 찜찜했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 관평
    관우의 아들. 상용으로 출병한 아버지를 보좌해 보병대를 지휘한다.
  • 요화
    관우의 부장으로 등장. 처음에는 주창이었는데 정사 베이스면서 왜 연의에서나 나오는 가상인물을 등장시켰냐는 지적에 요화로 수정되었다.[14] 다만 요화는 한중 공방전 당시 합류했기에 오랫동안 관우의 부장을 했다는 서술은 잘못된 것이다.
  • 왕평
    파군으로 진군한 관우와 인연이 닿아 유비군에 사관한다.
  • 풍습, 부융, 장남, 조융
    원 역사에선 이릉대전에서 전사하는 유비군 2세대 장수들. 시작 시점에선 부장으로 잡다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휘력은 검증되지 않았으나 무예와 용맹은 다들 뛰어나서 소규모 단병접전에선 탁월한 면모를 보이며 하후연의 기병대에 기습당했을 때도 방통의 지휘 아래 악착같이 버텨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후 입촉에도 종군. 부성부터 낙성까지 주요 전투에 쭉 종군하며 공을 세운다. 풍습은 관우, 장비를 보좌해 성도를 위협하는 별동대로 활약하고, 부융은 방림과 광한을 공격하는데 투입되는 등 꾸준히 지휘 경험을 늘려가고 있다.
  • 방림
    방통의 아우. 부융과 함께 군마 2천을 끌고 광한에 고립된 황권에게 낙성 함락 소식을 전하며 항복을 권한다. 낙성과 달리 성곽의 견고함이나 방어 시설이 열악한 광한성을 서둘러 공격하는 대신 천천히 옥죄는 전술을 택하는데 하필 손권이 유비의 뒤통수를 치면서 계획이 어그러진다.
  • 법정
    유비와 협력하는 익주의 참모. 방통과 달리 위험하겠다 싶으면 즉시 뒤로 빠지는 성격이다. 유비가 서량에 가있는 동안 혹시 모를 유장의 배반에 대비해 백수관에 남겨두었다. 한중으로 돌아온 후에 익주 정벌 논의를 위해 불러들인다. 상용으로 파견할 장수로 관우를 추천했으며 방통의 양보로 상용으로 가 유비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관우에게 밀리는 척하면서 함정을 파는 악진의 움직임을 즉시 파악하고 보병대를 이끌고 대응해 무승부를 이끌어낸다. 상용에서 귀환한 뒤 입촉에 동행해 방통과 함께 군사참모로 활약. 낙성을 앞에 둔 유비에게 정예 기병대를 샛길로 침투시켜 성도 인근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초토화시켜 싸우지 않고 낙성을 무너뜨리는 계책을 알려주나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자 한 발 물러선다.

    보복 정신의 소유자로 유명한 것과 별개로 자신이 유비군에 갓 임관한 외부인사임을 잘 알고 있어 기존 유비군 중진들, 특히 최고참 관우와 마찰 빚을 일은 최대한 피한다. 관우, 장비가 별동대를 이끌고 떠난 뒤에 황충과 함께 낙성 공략에 투입된다.
  • 장완
    유비 휘하의 문관. 본래는 유비의 익주 정복 이후 두각을 드러낼 인물이나 이번에는 유비의 한중 정복에 따라와 행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비는 장완을 빨리 승진시켜 중하게 쓰고 싶지만 주변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위험천만한 기성 주둔을 자원하게 유도한다. 그러자 유비의 기대대로 마초의 속내를 파악해 먼저 방통에게 보고했고, 이후에도 마초군에 종군하며 의견을 올려 활약한다. 유비의 평가에 따르면 현령처럼 '심심한 일거리'보다는 실수하거나 늦으면 죽는 전쟁 보급처럼 스릴 있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인재라고 한다.[15]

    장리천 전투에서 마초에게 조언하면서 그에게 빈객으로 초대되어 책사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마초의 말로는 장완이 없으면 천수군의 일처리가 안될 정도라고.
  • 습정, 뇌공
    유비 휘하의 문관. 뛰어난 행정가로 이 둘과 휘하의 장완 등을 비롯한 서기들 덕에 유비는 마초와는 달리 행정적으로도 서량을 흡수하고 있다. 다만 경험과 인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지라 둔전 등의 업무는 잘 진행하지 못했으나 장리천 전투를 계기로 많은 강족과 저족이 합류하면서 둔전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될 여지가 생겼다. 여담으로 습정은 습착치의 조부인 만큼 죽서기년을 보고서 바로 그 가치를 알아챘다.
  • 반준
    형주의 유력 인사. 제갈량에게 영릉 태수를 맡길 만한 인물로 학보와 나란히 추천받으나 오나라에 투항하는 그의 행적이 마음에걸린 유비는 등지를 파견한다. 임상 대치가 마무리 된 후 미방, 부사인과 함께 유비를 따라 입촉한다. 장사, 계양을 양도하며 형주에 필요한 일손은 줄었는데, 성도를 점거한 뒤 익주 전체를 관활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기에 자신들을 지목한 것에 의혹을 품진 않았다. 관우전과 여몽전의 기술이 달라 적극적 배신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부사인과 달리 반준은 적극적 배신자는 아님이 유력하고 문무 양도에 뛰어난 인물이라 무난하게 관직생활 할 것으로 보인다.
  • 미방, 부사인
    강릉, 공안을 수비하던 유비군 장수들. 미방은 미축의 동생으로 유비와 사돈이고, 부사인은 관우가 아끼는 측근이다. 원 역사상 둘의 배신에는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는데 유비는 상황에 떠밀렸을 뿐이라 여기면서도[16] 아예 익주로 데려가 배신의 싹을 잘라 버린다.
  • 장위
    장로의 동생. 오두미도 대좨주. 고령인 형 장로를 대신해 한중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 유비군이 쳐들어오자 2만 병력으로 양평관을 틀어막았으나, 사관계층이 부족하고 정병이 부족했던 탓에 유비군의 기습을 막지 못하고 퇴각한다.[17] 이후 정군산에서 군세를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해온 황충에 의해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포로가 된다.
  • 양앙
    장로 휘하의 장수. 제대로 된 정병이 없는 한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병력을 이끌고, 병법을 아는 장수라고 한다.(유비 왈 오두미도 팔라딘) 그러나 유비의 급습 당시 유비가 익주를 노릴 거라 생각한 장로에 의해 수천 병력과 같이 마초를 도우러 북상한 상태였다.[18] 때문에 장로가 패배할시에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했다가 유비가 서량에 진입한 이후 유비와 대면하게 되며 유비는 한중군민들의 편지를 주면서 양앙을 포섭한다.

5.1.2. 형남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주유를 위시한 동오의 지원을 받아 얻은 땅. 인구가 많은 북부는 조위의 영역에 있으나, 유비가 기반을 다지고 여러 인재들을 모은 중요한 지역이다. 원 역사처럼 손유간 분란이 될 소지가 높은 땅인데 유비(곽선호)는 익주를 오롯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조조 사망에 맞춰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 진격하기까지 몇년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여기며 영영 자기 것으로 만들 생각은 (최소한 아직은)하지 않는다.

형주 절반 가량만 차지한 상태에서 관우, 장비, 유봉을 한중으로 소환하여 전력이 더 줄었다. 전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지리적 이점을 거머쥔 손권이 언제든 쳐들어 올 수 있고, 이걸 격파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함을 아는 유비는 최대한의 대비책을 마련한다.

거리상 오의 대군이 닿기 전에 구원이 불가능한 장사와 계양 방어는 포기,[19] 형주 서남쪽 끝의 영릉엔 심지 굳은 등지를, 익양 끝의 임상현으로 이어지는 개울에 보루를 세워 동오의 공세를 격퇴하면서 원 역사보다 대등한 상황에서 장사, 계양군을 분할하고 후일을 대비하여 쇠사슬 작전 등을 입안했다.
  • 제갈량
    유비군의 대전략인 융중대를 수립한 책사. 유비의 입촉을 뒤에서 계획한 인물이지만, 빙의자의 기억을 얻은 유비는 이 융중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고심 끝에 입촉을 미루고 한중 공략을 통해 서량을 아군으로 편입해 명분작에 더 신경을 쓴 다음에야 입촉을 시작한다. 입촉을 준비하는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소환하며 30대 초반 나이에 형남 전체를 책임지게 된다.

    입상현과 익양 사이 개울에 보루를 세우라는 유비의 지시에 보루를 2개를 나란히 세우고 최신 원융노를 비롯한 군수 물자를 풍족하게 보급했으며 인력도 수시로 교대케 해 유비가 예상한 것보다 더 열성적으로 대비, 오의 장군 감녕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린다.

    본인은 이 탓에 오와의 협상이 어그러지는 게 아닌가 당황했으나 영릉 사람들의 사기가 크게 오르고, 당한 것도 인성이 나쁜 것으로 유명한데다 아직 제대로 중용받지 않던 감녕이라 유비는 크게 치하했다.[20]

    독자들에게 익숙한, 내마속에서 보여주는 만인지상의 승상 제갈량이 아니라 까마득한 고참인 관우, 장비 눈치보며 방통, 법정 등 비슷한 연배의 쟁쟁한 참모들과 성과 경쟁해야하는 젊은 시절의 제갈량[21]이라 유비의 간단한 지시에도 지나칠 정도로 반응하며 아랫 사람들 괴롭게 하는데 뜻밖에 전화위복이 되었다.

    유비의 명을 받아 대별산맥 인근의 반조조 군세를 지원하는 한편 서량으로 파견되는 관우에게 마초와 염행의 일화를 거론해 마초를 (관우가 싫어하는)호족 나부랭이가 아니라 조조에게 가족을 잃고 자기도 죽을 까봐 두려워하는 불쌍한 사내로 여기게 만들어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단도리한다. 미래의 기상이변을 예상할 수는 없으니 형남을 지키는 데는 문제 없다 자신하지만 219년의 집중 호우때 북상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잘 아는 유비는 별도의 대비책으로 유사시 강에 내걸 수 있는 쇠사슬과 쇠막대를 제조해 둘 것을 당부한다.
  • 조운
    관우와 장비가 한중으로 소환되면서 형남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무관으로 선임된다. 임상대치 때 유비와 재회. 관우를 임상현으로 보낸 유비 곁에서 지휘관으로 보좌했다. 인재가 부족한 유비군에서 모병, 훈련, 호위, 감찰에 손부인에게 납치당한 아두 구출작전까지 온갖 실무를 다 도맡아 수행하며 혹사당하고 있었다. 임상 대치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대별산맥 인근에 숨어둔 반 조조 반란군을 훈련 시켜주라는 지시를 받는다.
  • 진도
    관우와 장비가 한중으로 소환되면서 형남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무관으로 선임된다.
  • 등지
    장래 촉한의 중신이 되는 인물. 죽서기년 발굴을 위해 위나라 땅인 하내군에 가야 하기에 유비가 비밀리에 불러내어 밀정임무를 맡긴다. 도적떼와 부딪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22] 인원 손실 없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때의 공과 외교, 군사 양쪽에 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상용에도 동행, 신씨 형제와 유비 사이를 오가는 사자 역할을 맡는다.

    상용에서 돌아와 익주 정벌에 나서기 직전, 동오의 형남 공격에 대응할 담력 있는 지휘관을 물색하던 유비는 등지를 원 역사에서 학보 대신 역시 남양 출신인 등지를 영릉 태수로 파격 승진시킨다.[23] 등지에게 따로 한달 만 버텨내면 항복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당부하고, 등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릉을 지켜낼 것을 다짐한다. 태수가 된 후 군사 훈련 및 성을 수리하는 일로 영릉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치던 중 여몽이 쳐들어오지만 사람들을 잘 다독여 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 학보
    형남의 유력 인사. 반준과 함께 영릉태수 직을 맡을 만한 인물로 제갈량이 추천하나 익양 대치를 대비하던 유비는 (적극적 배신은 아니지만)오나라에 투항하는 반준과 학보 대신 등지를 파견한다.
  • 요립
    장사태수. 익주와 남군 방면으로 주력군이 차출되어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 밖에 없었던 장사군에서 어렵사리 2천 군사를 모아 여몽측에 맞서보려 했으나 훈련이 전혀 안 된 오합지졸이라 금새 흩어져 버렸다. 못 지키는 게 당연함을 아는 유비는 죄를 청하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 관우와 함께 임상현을 수복하게 한다. 수복전에 의욕적으로 참여해 임상성 성문에 대고 당장 문 열라고 외쳤다고. 서량 정세가 흔들려 이뤄진 타협으로 기껏 수복한 임상성이 동오에 넘어가게 되자 분함을 숨기지 못한다. 사서에서 모난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유비는 그렇게 된 게 순전히 천성이 못되서라기보단 평판 꼬이고 승진 경쟁에서 밀린 스트레스 탓도 있다고 봐서 일부러 임상 수복에 동행시켜 공을 세우게 하고 체면을 살려줬다.

5.2. 서량

관도대전에 승리한 조조 산하에서 통치되다가 마초가 이끈 관중제장의 난을 통해 독립을 원했으나 결국 패배해 조조에게 굴복한 지역. 그러나 마초가 재차 거병해 유비와 동맹을 맺고 계속되는 전투 끝에 다시 반 조조 진영으로 돌아섰다. 강력한 기병과 군사력이 강점인 땅이나 경제력이 부족하고, 이미 패배한 마초를 포기하고 조위파로 돌아선 인물들이나 한수처럼 비협조적인 군벌들이 많아 군사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유비는 혹여 조조가 공세를 가해오면 무리하게 야전을 벌이지 말고, 성을 이용해 수비전을 중점으로 시간을 벌면서 한중의 유비군과 협격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유비군은 관우, 장비, 조운 같이 우수한 기병지휘관들이 포진해 있음에도 기병 전력이 열세해 이를 살리기 힘들었는데 서량과 연대해 우수한 군마를 제공 받게되면서 숨통이 틔였다. 군마 한 마리가 아쉬운 손오와의 외교에도 쏠쏠한 역할을 한다. 또한 천수군 다음가는 서량의 요충지인 상규성을 공적으로 유비군에게 내준 상태.
  • 마초
    서량의 반 조조 군벌.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서량연합군 5~10만을 이끌었으나,[24] 한수를 비롯한 다른 군벌들이 마초를 견제한다고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전력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조조의 공세로 인해 위수 전투에서 끝내 조조에게 패배했다. 그 이후 2년만에 재차 거병해 1만 병력을 몰아 위강과 하후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고 천수군을 점령한다. 그러나 양부와 서량 호족들이 대적하며 들고 일어나자 출병해 끝없는 싸움 끝에 몰려서 후퇴하게 된다. 본래는 이 시점에서 기성의 조구에 의해 가족들을 잃고 서량에서 쫓겨났으나, 유비가 원군으로 오면서 가족들을 구하고 역으로 호족 연합을 격파하고 서량을 평정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비에게 아내와 자식들의 목숨을 구원받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등한 동맹 같지만 노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하나의 세력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지라 실제로는 유비에게 서서히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여담으로 유비는 마초를 실패한 버락 오바마에 비유했다.[25]

    이후 장완을 책사로 두고 서량을 재차 평정하던 중 유비가 익중 정벌에 나설 낌새를 보이자, 한중의 유비군이 빠지면 자신의 후방과 명분이 불안해지기에 급하게 한중까지 와서 자신의 병주 우회를 통한 장안 공세 계획을 밝힌다.[26] 위연을 한중에 남겨 원호하겠다는 답을 들은 뒤 두 아들을 한중에 남겨두고 떠난다. 자신을 믿지 못해 인질을 남기는 거라 생각한 유비는 좋은 말로 거절했으나 이내 마초가 자신에게 아들들을 맡기는 진의가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임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 마대
    마초의 종제이자 부하 장수. 한중을 점령한 유비에게 사신으로 와서 군량 지원을 요청해 승낙을 받았다. 이후 호족들의 배신으로 가족들이 다 죽었다고 절망하던 차에 유비군이 지원을 와서 가족들을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듣자 진심으로 감격한다.
  • 방덕
    마초 휘하의 장수. 마초 못잖은 맹장으로 유비가 욕심내고 있는 인재이다. 일단 유비가 마초를 서서히 종속시키고 있는 만큼 방덕도 자연스럽게 유비에게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 조구
    반마초 파벌 호족. 마초가 천수군을 점령한 이후 끌어들여 부관으로 삼아 기성을 맡겼으나, 사실 친조조 파벌이었기에 양부의 반란으로 마초가 출병하자 거병해 마초의 일가를 전부 죽여버리려 했다. 그러나 황충과 위연이 매복한 유비군과 같이 반격하면서 몰린 끝에 패배해 황충의 활에 맞아서 죽는다.
  • 양부
    반마초 파벌의 맹주 호족. 조조가 직접 찍어서 자기 파벌로 만든 호족으로 직전 량주자사 위강의 패배 시 마초가 살려줬음에도 사촌 강서와 조조파 호족들을 모아 마초를 배신했다. 기성의 마초를 노성까지 끌어내어 야전을 벌이고 사촌형제 7명이 전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끝에 다른 호족들의 가세로 끝내 마초를 몰아냈으나 정작 자기 가족이 있는 역성은 유비가 점령해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렸고, 기성에도 황충과 위연이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냄은 물론 조구 파벌을 참살해버리며 일이 제대로 꼬인다.

    이를 전혀 모르고 7천 명이 넘는 대규모 호족연합군을 데리고 천수군의 치소인 기성을 공격했으나 황충과 위연이 버티는 사이 달려온 마초와 유비가 후방을 휩쓴 탓에 패배하고 포로가 된다. 그 시점에도 조조를 향한 충성을 유지했으나, 유비가 조조가 위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승상이야말로 한실을 위한 충신"이라는 양부의 논리를 박살내버리자 "위공께서는 할 만큼 했다"고 말을 바꾸는 추태를 보여준다. 결국 양부가 답이 없다고 여긴 마초와 유비는 양부를 처형한다.[27][28]

    또한 원 역사에서 마초를 반역도라 비난하다 죽었던 양부의 고모는 여기서도 마초를 반역자라 비난했으나 유비가 의대조 사건과 조조의 협천자의 위선을 꼬집자 말문이 막혀서 비웃음을 사며 연금당했다.[29]
  • 한수
    서량 제2의 군벌. 마등, 마초 시절부터 서량군벌 연합의 실세로 군림한 노회한 인물이다.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마초를 맹주로 추대했으나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멋대로 굴며, 다른 호족들과 서량인 장병들을 충동질해 마초의 패배에 단단히 일조했다. 그 탓에 213년에 다시 거병한 마초도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대가 유비를 불러오기 그렇다면 한수라도 부르자고 충고했음에도 한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마초 동맹이 위수 아랫쪽을 장악했을 무렵에 하후연과 장합의 맹공을 받게 되고[30] 한수의 능력으로는 하후연과 장합을 막는게 불가능 하다는 걸 알고 있던 유비-마초 동맹이 구원을 위해 출전하나 유비가 하후연의 기습에 당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다.

    유비군이 최대한 많은 주민들을 대피시켰고, 장합의 유도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주변의 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서쪽으로 가서 주민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을 하거나, 유비군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마초의 움직임도 계속 반대하다가, 혹여 마초와 유비군이 비어있는 마을들의 재산을 탈취할까봐 걱정해 합류했다. 하후연을 몰아낸 후에도 자신의 세력을 빼앗길 수 없다는 고집에 유비를 최대한 빨리 내쫓으려 한다. 평가에 의하면 아예 무능한 놈보다 더 악질인, 알면서 저지르는 유형. 마초와 함께한 관중제장의 난 당시부터 곧 독이 되어 돌아올 선택지를 뻔히 알면서 여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좇거나, 여론 얻기 쉬운 선택지만 고르는 식으로 관중제장의 파멸을 초래했다. 이것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도 극혐 캐릭터로 낙인찍힌 상태. 그러나 유비는 그렇다고 섣불리 죽이려들면 무슨 부작용이 날 지 모른다면 참았고, 그래도 2년 뒤에는 사망하기 때문에 유비는 2년만 참으면 된다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임상대치가 진행되던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조조는 염행을 조문 사절 명목으로 파견해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고 하후연, 장합의 지원 아래 다시 서량을 뒤흔들려 한다.
  • 염행
    한수의 사위. 일찌감치 조조에게 귀순해 허도에서 작위를 받고 안락하게 지내고 있었다. 한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사위가 장인을 조문한다는 명목으로 2천 병사를 주어 서량으로 파견한다. 젊은 시절 마초와 일기토를 벌여 죽일 뻔한 일화가 유명한데 제갈량은 이 일화를 거론해 마초가 염행을 두려워하니 미염공이 나서 도와줘야 한다고 관우를 살살 녹여 놓는다.

5.3. 익주

후한 13주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주. 풍족하고 크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낙양에서 내려온 유언의 뒤를 이어 유장이 통치하고 있다. 유장이 외부 진출을 하지 않은 데다가 폐쇄적인 곳이다보니 외부에선 이 곳의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장의 친위부대인 동주병은 유비가 바짝 경계할 정도로 정예병이나 익주 토병들의 전투력이나 사기는 평범하다.

유비의 공세 방식이 원역보다 훨씬 치명적으로 바뀌면서 부각되지 않았던 동주병들의 약점도 드러나고 있는데 잘 훈련되었다곤하나 결국 보병이라 기병에게 전략적 우위를 양보할 수 밖에 없고, 지방 호족군대나 이민족들과 싸워본 경험 밖에 없는 동주병 지휘관들은 대기병전, 패배 후 재수습 등 실전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갈고 닦을 수 밖에 없는 부분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다. 원역에서야 똑같이 보병인 적과 관문 끼고 싸워 약점이 상쇄되었지만 유비가 서량에서 기병을 보충하고 기병 운용 노하우가 풍부한 숙장들을 동원해 샛길을 활용해 찌르고, 다소 위험을 감수하며 빠르고 몰아치자 이상의 약점이 두드러져 고전을 면치 못 한다.

근거지가 성도 인근이고, 그 주변에도 험한 관문이 많다보니 미묘한 관계인 익주 호족들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보단 근거지 인근 관문에서 지키면 된다는 생각에 퇴각이란 선택지를 너무 쉽게 고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문제점.
  • 유장
    당시의 익주목.[31] 선대 유언이 조직한 동주병을 이용해 익주를 통치하고 있다.[32] 그러나 당시에도 알려졌듯이 무능해 동주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인물로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의 상대를 맡긴 것도 이 탓이었다. 유비가 배신하는 척 백수관만 점령하고 한중으로 출병하자 안심하고는 유비를 방치해버린다. 결국 유비가 한중을 안정화시키고 서량조차 마초를 통해 간접지배에 성공한 이후 융중대의 성립을 위해 자신과 함께 출병하거나, 거절할 경우 공격을 계획하게 된다.

    야심이 없는 건 아니라서 더 골치아픈 인물인데,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자 이제 장로가 사라졌으니 유비는 형주로 돌아가도 된다면서 은근슬쩍 한중을 차지하려 하지만 유비는 마초와 조조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걸 명분으로 한중을 점거 중이며 유장이 보내준 군사들을 돌려보내며 유장을 달래준다. 이후 백제성에 동주병을 주둔시켜 유비의 배반을 예방하자는 황권의 제안도 거절해버린다. 심지어 조조를 치려 한다는 말만 듣고 관우, 장비의 형주군 증원도 그냥 통과시켜 버린다.

    급해진 황권이 유비가 상용에 묶여 있는 사이 모든 전력을 부성으로 보내 방어선을 굳히고 유사시 요격할 것을 간언하나 장송의 흔들기에 최종적으로 거부, 성도 주변 관문만 지키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선회해 버린다. 이엄과 익주 호족 등의 배신, 유비군의 쾌진격으로 연패해 성도 인근만 남은 상황에 수비전으로 시간을 벌기로 결정한다.

    관우, 장비가 기병 1500을 이끌고 성도 인근을 헤집자 지레 겁을 먹고, 대군을 보내 영격하는 대신 1만만 내보내 패전을 자초한다.[33] 동오의 임상대치로 인해 활로가 열리나 했지만 그 3개월의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결국 유비가 돌아오면서 익주의 상실은 기정사실화 된다.[34]

    본작에서 가장 반전 이미지를 보여준 인물인데, 본래 삼국지 독자들도 유장이 무능했다는 것까진 알고 있어도, 동주병과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동주병의 폐해와 유장의 우유부단함이 강조되어 사람은 선했다는 편견이 거의 깨져버렸다.
  • 유순
    유장의 아들. 부성에 일부 정병을 데리고 출진해 유비군을 가로막는다. 유비는 마지막 여론 조성용으로 어차피 조조가 찬탈에 성공하려면 군사를 가진 유씨들은 전부 죽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결국 전쟁이 시작된다. 장임, 유괴 등과 함께 부성에서 유비를 상대하나 유장의 늦장 대처로 수적, 질적으로 너무 불리해 당해내지 못하고 동주병들만 수습해 퇴각한다. 퇴각로에서 장비의 허장성세에 넘어가 지체되는 유비의 친위부대에 따라 잡혔고 동주병들의 분전으로 간신히 백마관에 도착했으나 농성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쉴 틈 없이 달려든 유비군에게 백마관마저 내줘버린다.
  • 황권
    익주 토박이 출신의 군인. 익주의 기재라고 할만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 유비의 배신을 예상해 눈여겨보고 유장에게 조언하나 유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기다 유비를 견제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백제성에 동주병을 파병하고자 하나 장송의 여론전에 밀려 동주병에게 경계 대상이 되는 등 마음 고생을 하는 중이다. 그의 유능함을 잘 아는 유비는 어떻게든 포섭하고 싶어 한다.

    결국 유비의 압박이 현실화되자 자신은 유관장을 이길 수 있으니까[35] 나가서 먼저 싸워야 한다고 유장을 설득한다. 그러나 유장은 일부 병력을 데리고 가는 건 허락하되 주력인 동주병은 끝내 성도에 남긴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왜 황권이 유비를 불신하는지, 그런 황권을 왜 유장은 믿지 못하는지가 드러나는데 황권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권이 유장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는게 소설상 묘사로 자주 드러나는데 유장이 좋은 통치자가 아님을 잘 알고, 유장의 비호를 받는 동주병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분쟁을 조장하거나 호족들을 누르려 드는 성격이 아니기에 섬겼으며, 세력이 약한 주제에 천하패권에 뜻을 둔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면 익주인들의 피(더 정확히 말하면 호족들에게 예속된 농민과 물력)로 북벌에 나설 것이 뻔하기에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던 것. 유비를 물리치고 중원의 군사가 촉땅에 발을 디디면 그땐 두 말 없이 투항할 생각이었다.

    즉, 유장에 대한 고려 없이 철저히 익주 토착세력의 이익만 대변하는 것으로 유장 입장에선 몸값 더 비싸게 쳐줄 사람에게 자신을 바쳐 영달을 누리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 황권이 무슨 옳은 말을 해도 군권을 맡길 수가 없었다. 결국 유비군이 면죽을 넘어 낙성까지 도달해 성도까지 단 한 줄의 방어선만 남게 되어 어쩔 도리가 없게 된 다음에야 황권의 의견이 전부 옳았음을 인정하고 방어 책임을 부여받게 된다. 성도와 유비군 사이를 가로막는 마지막 방어선인 낙성과 광한성을 장임과 나누어 지키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조조나 손권이 유비를 치기를 바라자는, 일종의 비나이다 메타의 작전을 낸다.

    관우, 장비가 이끄는 기병이 성도 방면으로 침투했다는 소식을 듣고 법정이 제안한 초토화 작전을 바로 파악하지만 양식을 빼앗긴 백성들이 다소 고통을 겪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성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가 백성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성도를 향해 진격하자 유비의 한중 정벌 이후로 두번째로 경악한다. 틀을 깨는 캐릭터 작법으로 유명한 간절히 답게 상당히 인상적인 각색을 보여주는데 연의가 만든 비운의 충신 이미지에 작가의 이전작 내마속에서 황권의 아들 황숭이 굉장히 호감형으로 등장했던지라 황권도 당연히 선역으로 나올 거라 예상한 독자들이 많았는데 정반대로 유능하지만 목적을 위해 백성의 목숨은 물론 모시던 주군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냉혹한 면모를 보여줘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낙성이 함락되고 자신은 광한성에 갇혀 위태위태한 상황일 때 임상대치가 일어나 기도 메타가 성공하는 듯 했으나 3개월의 여유 동안 유장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무의미해졌다.
  • 정도
    유장의 책사. 한중 전투 이후 유비에게 유장의 답례품인 촉금 1만필을 전하며 한중을 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당연히 유비가 핑계를 대며 거부하자 유비의 속내를 읽고, 유장에게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관우, 장비가 기병대를 이끌고 성도 인근에 침입하자 부금과 상존을 지지해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우,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 1500 상대로 겨우 보병 6천 딸려주려는 유장을 설득해 간신히 1만을 내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부족하고 3만 군사 전원을 내보내는 게 올바른 계책임을 본인도 알지만 유장에게 납득시키는 건 무리였다.
  • 장임
    익주 토착 가문 출신 지휘관. 황권, 엄안과 뜻을 같이 해 부성에 전력을 모아 영격해야 한다 주장하나 유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부성을 지키던 유순을 수행했고 부성에 이어 백마관마저 떨어지자 유순의 안위를 위해 후위를 자처했다. 포위해서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었으나 황권처럼 그의 능력을 탐낸 유비의 배려로 남은 병사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간다. 장임과 엄안은 정사에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작가가 창작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은데 본작의 장임은 익주 토박이와 동주병을 통틀어 황권 다음으로 유능하게 묘사된다.

    이후 광한을 지키러 간 황권과 역할을 나눠 낙성 방어를 실질적으로 이끌게 된다. 유비는 하필 방통이 죽었던 낙성에 유능한 장임이 자신이 살려준 덕에 배치된 것에 당황하며 법정을 앞세웠다. 사기가 떨어진 동주병을 수습해 어떻게든 낙성을 사수하려 노력하나 기량이 떨어지는 유순, 냉포와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아 고생했고 결국 성을 빼앗긴다. 광한성에 갇힌 황권을 대신해 강경론을 주도하며 유비가 형주에 가 있는 3개월 동안 성도에서 나가 장비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장은 받아주지 않았다.
  • 엄안
    익주 토착 가문 출신 지휘관. 황권, 장임과 뜻을 같이 해 부성에 전력을 모아 영격해야 한다 주장하나 유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 양회, 고패
    백수관을 지키던 익주 무장들. 서량 출병을 위해 원역처럼 참수하는 대신 돌려보냈다. 유비가 한중을 점거하고 서량, 상용을 오가는 동안 백마관을 지키고 있었다. 유비가 부성을 공격하며 익주 정벌의 신호탄을 울리자 익주 토착민들로 구성된 보병 4천을 이끌고 구원하려다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의 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고 양회는 장비와 일기토를 시도했다 단 5합만에 목이 떨어진다.
  • 유괴, 냉포, 부금, 상존
    동주병 주요 지휘관들로 등장한다. 굴러들어온 돌이고, 동주병과의 알력으로 발생한 조위의 난을 겪어봤다보니 멀리 나가기 보단 근거지인 성도 주변을 지키면서 싸우려는 성향이 강하다.

    관우와 장비가 기병 1500을 이끌고 성도 인근을 흔들자 부금과 상존은 군심이 이반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나가 싸워야 한다 주장하지만 군사적으로 무능한 유장은 한참 망설이다 성도에 남은 병력의 3분의 1인 1만만 딸려준다. 전원 보병인 군사들로 오환과 서량 출신 기병에 맞서기 위해 수레와 궁노수를 동원해 애를 썼으나 대기병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 해 무너진다. 부금과 상존은 원역사에서 겨우 곽준과 수백이 지키는 가맹관을 1만으로 1년간 넘지 못하고 격파 당한 일로 졸장 취급 받는데 본작에서는 무능한 유장이 아무 대책을 못 내놓는 상황에서 가맹관을 공격해 허를 찌를 정도로 전략적 식견은 있는 장수들로 재해석 되었다. 문제는 짚어낸 바를 실행하는 전술적 역량.

    상존은 전열을 수습하기도 전에 단기로 자신을 죽이러 달려든 관우에게 호위병들과 함께 목이 떨어졌고 부금은 간신히 살아서 낙성으로 도망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로 인해 가뜩이나 후방 걱정으로 낮았던 낙성 수비군의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린다.
  • 이엄
    남양 출신 망명인사.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할 때 익주로 넘어온 굴러들어온 돌로 벗이나 동문들이 대거 유비 쪽에 사관한 터라 유장 입장에선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장은 그에게 일군을 맡겨 면죽관을 구원하게 한다. 동주병은 정예이나 지휘관들은 관문에 의지해 방어전은 할 수 있어도 야전에서 유비군을 영격하기에는 자질이 모자란 인사들 뿐이고, 군재가 뛰어난 황권과 장임은 익주 토박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맡길 만한 인사가 이엄 뿐이었기 때문.[36]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유비측 인사들의 집중적인 회유를 받아 면죽관에 도달하자마자 투항해 버린다.
  • 장송
    익주 토박이 호족. 유비와 내통하던 인물로 본래 유비의 형주 복귀 뻥카에 낚여서 서신을 썼다가 걸리는 바람에 죽었으나, 여기선 유비가 이중 낚시를 한 덕에 살았다.[37] 이후 유비와 싸워야하는 현실을 부정하고픈 유장의 심리를 이용, 조위의 난을 언급해 부성에 전력을 집중하자는 황권의 헌책을 거부하도록 은근슬쩍 돌려놓는 활약을 한다.

    유비가 한중과 서량에서 싸울 때까진 약속한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장송쪽에서 유비를 끌어들인 건 자신의 죄라고 순순히 인정한데다, 성도 인근 관문을 지키면서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자는 발상은 익주사람이라면 흔히 할 법한 생각이라 황권도 배신자로 몰아붙이지 못하는 상태. 낙성이 함락되고 성도가 전쟁터가 되는 게 확실해지자 유장에게 항복을 권해 피해없이 전쟁을 매조지 짓고 유비 세력안에서 입지를 다지려 한다.

    원래 역사에서는 적벽 대전 이전 유장의 명으로 조조한테 칭신의 의사를 밝히러 갔다가 푸대접을 받고 돌아온 인물이다.

5.4. 동오

손유동맹을 유지하는 양주의 세력. 200년대 후반부터 적벽대전-남군 공방전-유수구 전투까지 조조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는 조조측 사정 때문에 말미암은 것인데 차근차근 찬탈 작업을 진행중인 조조는 장기간 조정을 비우거나, 적벽 이후 다시 패배해 권위가 하락하는 일을 지양해야 했다. 큰 피해 없이 명분 챙겨서 빠르게 복귀할 수 있는 WWE 상대가 필요했는데 주요 세력 중 조조의 본거지인 기주 업성에서 가장 가까우며 기병 전력이 약해 반격을 통한 전과 확대에 한계가 분명한 오는 가장 적절한 상대였다.

과거 형주 공방전 이후 남형주의 남군 일대를 유비에게 빌려줬으나 이는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언제든 마찰이 될 수 있다. 압도적인 수군 전력에 파구의 물길을 쥐고 있어 유비측은 동오가 한 번 칼자루 거꾸로 잡기로 마음 먹으면 급소에 베이고 생각해야 하는 처지. 유비는 장사와 계양군까지야 빼앗기더라도 무릉, 영릉이라도 지켜서 형익병진에 필요한 안전성을 확보하려 한다.[38]
  • 손권
    212년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어 7만 병력을 이끌고 조조와 대치 중이었다. 유비에게 일부 빌려준 강릉 땅에 몇배로 이자까지 붙여서 형남 전역을 돌려받을 생각. 안 그래도 열세한 전력 탓에 피말리는 중인데 유비가 전력을 다해 돕기는커녕 입촉을 노리자 분노한다.[39] 그러나 본 소설에서는 곧이어 현대인이 빙의된 유비가 당초 표면상 목적대로 유장의 구원과 장로의 정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해버렸기 때문에 그 정도로 손유동맹의 사이가 파탄나지는 않은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조조의 위공 즉위와 순욱의 자살을 손권 측에서 유비에게 알리는 식으로 동맹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유비가 실질적으로 한중 하나만 들고 있어 여유가 없고, 동맹에 협조적이기에 한동안은 기다려주고자 한다.

    그러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익주를 장악해 성도 함락을 코앞에 두자 원 역보다 더 빠르게 선공을 날려 익양대치가 벌어진다. 본인도 형주 파구의 후방인 육구까지 와서 지휘하고 있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유비군의 대처가 너무 빨라서 장사군의 점령도 절반뿐인 성공으로 끝나자, 단기간에 장사와 계양군까지 빼았는 건 어렵다고 깨닫는다. 그러자 장사의 선박을 불태워 유비군의 기동을 방해하고 임상에서 대치에 들어간다. 유비는 협상에 응하려는 생각과 별개로 손권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후에 재차 배신할 때 망설이게 만들 계획.[40] 결국 장사와 계양을 양도받으나, 손권이 원 역사대로 219년이면 분명히 배신할 것이라 확신한 유비는 이를 대비해 쇠사슬 작전을 준비한다.

    유비는 그를 배신자라고 생각은 하지만 손권이 죽는 순간 동오는 해체당하는 미래밖에 없다는 것도 알기에 조조에게 멸망하지 말라고 합비 공방전에서 쓰라고[41] 300기의 서량군마를 선물로 주어서 친위대의 강화를 권했다.

    결국 의기양양하게 벌인 합비 공방전에서 원 역사와 다를 바 없이 장료와 악진에게 대패한다. 유비가 준 군마는 싸움이 아니라 도주에 쓰였다. 임상 대치에서도 딱히 위용을 보이지 못한 판에, 합비 공방전에서 대패해버리자, 어떻게든 패전에서 면피하려고 고뇌한다.
  • 노숙
    손유동맹을 추진한 동오의 대도독. 유비가 계속 손권의 심기를 거슬러 면목이 없는 상황이었으나[42],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고 유비가 한중에 진출해 서량까지 연결되면서 장안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안도하며 이를 속히 조조군에 퍼뜨려 그들을 동요시키자는 계책을 제시한다. 노숙 본인은 헌제를 끼고 있어 선양 받을 수도 없고, 유씨 종친도 아닌 손권이 황제가 되기 위해선 반 조조 토템으로 쓸모 있는 유비와 당장 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나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면 너무 강해진다며 반발하는 강경파들의 여론에 손권이 동의하면서 본의아니게 익양 대치를 이끌게 된다. 기왕 벌어진 일 유비와 제갈량이 부드럽게 장사와 계양군을 포기해주길 원했으나 유비의 2만 군대가 몰려오자, 어쩔 수 없이 감녕을 보내서 익양을 막게 한다.

    그러나 감녕이 패하고 여몽도 천릉성 공세를 실패해 육로로 연결된 임상에서 관우와 대치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지리한 대치 중에 조조가 염행을 서량에 파견한 것을 계기로 장사, 계양을 넘겨 받는다
  • 여몽
    노숙의 후계자인 동오의 장군. 동오의 형주 진입 작전에서 지상군 주력 2만으로 등지가 지키는 영릉군의 치소 천릉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갖은 허세와 협박에도 등지가 수비 태세를 지키자, 천릉성의 방위력, 감녕의 전사와 유비군의 영릉 진입으로 인한 장사, 파구의 위기를 막기 위해 퇴각한다. 그러나 남겨둔 여대가 출병한 사이 기어이 관우가 임상을 탈환해버려 여몽과 2만 병력이 파구로 돌아갈 길이 막혀서 대치만 해야 했다.

    합비 공방전에서 대패한 이후 손권을 위로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던 형주 공방전에서도 작전에 실패해 감녕을 잃었고, 수만 대군을 몬 합비에서도 겨우 7천의 적에게 패배하면 이제 동오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좌절한다.
  • 여대
    익주로 파견된 유비를 만나러 온 동오의 사절. 유비에게 조조를 견제해 줄 것을 부탁하러 왔으나 빙의의 여파로 아직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유비를 보고 정말 아픈 것임을 깨달아 당황한다. 이후로도 손권의 사신이 되어 양측을 뻔질나게 오간다.

    동오의 형주 공격에도 참전하나, 장사군의 치소 임상을 지키던 중 다른 현을 점령하러 갔다가 관우가 일군을 몰고 빠르게 공격하는 역 빈집털이를 해오는 바람에 허무하게 임상현을 다시 뺏긴다.
  • 제갈근
    제갈량의 형이다. 방통은 손권이 제갈근을 내세워 협상해오면 제갈량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나, 제갈량의 충성심을 잘 아는 유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원 역사보다 빨라진 익양대치를 앞두고 유비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형주 일부라도 즉시 내놓으라는 손권측 의사를 전하나 결렬된다.[43] 임상대치가 끝난 후 손권군의 깃발과 갑옷을 빌릴 때 유비측과 동행하며 유비에 블러핑에 힘을 실어주고 손권이 동맹으로서 유비의 입촉을 도와줬다는 명분을 세운다.
  • 감녕
    익주 태생으로 유표와 황조를 거쳐 손권에게 임관한 항장. 형주의 중요한 길목과 물목을 전부 꿰고 있어 원역사에서 그랬듯 익양과 임상현 사이에 있는 개울가를 틀어막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병 300에 노숙에게 1천 군사를 받아 출병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으나 개울에는 유비의 지시를 받은 제갈량이 보루를 2개나 세우고 다른 곳에 투입해야 할 물자와 인력까지 끌어와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상태였다.

    항장 출신이라 성과 없이 물러서면 출셋길이 막힌다는 생각에 정찰도 없이 무리하게 공격을 개시하나 신속한 이동과 점거를 위해 경무장에 변변한 공성장비도 없었고 쏟아지는 화살비를 감당하는 건 역부족이었고 본인도 교전 중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5.5. 조위

작중 시작 시점에는 위공 즉위 이전이므로 조조군이었으나 213년 위공으로 즉위했다. 하북 4주(유,기,병,청) 서주, 예주, 낙양, 장안을 차지한 작중 최대세력. 량주의 마초, 양주의 손권, 형주의 유비, 익주의 유장 등만이 조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상황이며 이들 모두 조조를 경계하고 있다.
  • 조조
    현 북중국을 통일한 중원 최대의 세력가. 유비와는 긴 인연으로 유비와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좌장군으로 제수해 유비가 기반을 닦을 계기를 세워준 것도 조조다. 유비가 유장을 배신할 것이라 생각해 신경쓰지 않고서 손권을 제압하려 유수구 전투를 벌였으나, 도중에 유비가 뜬금없이 한중을 제압하고 서량과 연결되자 경악한다. 이후 원 역사대로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 상대로 별 다른 실익은 못 거둔 채 213년 기주 인근의 10여개 군을 하사받고 위공국을 세워 위공이 된다.[44]

    유비(곽선호)의 평가로는 능력은 삼국 군주 중 제일이나, 현재 통일보다 찬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210년대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그 행보가 드러나는데, 낙양과 업에서 찬탈을 위한 정치를 해야하면서 본인이 대군을 가지고 있을 정당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크고작은 전쟁을 일으키지만 조조 본인은 장강을 두고 손권과 대치 이상은 하기 힘든 동오 공격만 나선다. 만일 유비의 입촉 시기에 한중의 장로를 무너뜨린 조조가 그대로 익주까지 왔다면 유비의 입촉은 실패했을 테지만, 그러면 조조도 죽을 때까지 전쟁을 이어가야 했기에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인이 조조와 정면대결해서 이기긴 힘듬을 잘 알고 있는 유비(곽선호)는 미래인이기에 알고 있는 조조의 사망 시기에 찔러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가후의 판단 역시 유비와 비슷한데, 유비는 분명 미래에 조위를 위협할 인물이지만 역으로 그가 버티고 있기에 조위는 내부의 잠재적 반역분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고 한다. 유비가 빠르게 강해지는 걸 알지만 역량을 최대한 뽑아내도 북중국을 차지한 자신을 넘을 수는 없음을 알기에 방치하며 정치와 명분작에 몰두하는 것.

    이후 유비의 죽서기년 발굴로 공들이던 여론조작이 방해받게 되자 이를 간다. 진군과의 대화에서 밝혀지길 조조는 한나라 자체를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고, 순진한 유비에 비해[45] 자신의 찬탈은 대의가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염행을 보내고 혼자 남아서 유비가 한나라의 상징이 되었으니 때를 봐서 그만 죽이면 찬탈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 순욱
    상서령. 조조군의 책사로 수십년간 조조를 도와온 거물. 그러나 조조의 위공 즉위 이후 실의에 빠져 자결했다.[46] 이후 순욱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한 손권의 편지를 보면서 유비가 분노하는 척하며 조조는 역적이라고 선동하는데, 실 역사에서도 유비가 순욱의 죽음을 손권에게 전해듣고는 '늙은 역적놈이 죽지 않으니 천하가 아직도 혼란하다'는 식으로 욕을 했었다.
  • 서황
    유비가 당초 조조의 예상과 달리 한중과 양주 쪽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주둔하던 장안에서 나와 서량과 장안 사이의 요충지인 진창으로 급히 진출해 이곳에 성을 쌓고 있다는 서술이 있다. 진창에서 길이 험하긴 하지만 한중을 칠 수도 있기 때문에 유비도 서황을 경계해서 한중에 있는 주력을 못 빼고 육천 정도만을 동원해 서량에 나온 상황이다.
  • 하후연
    조조의 친위세력으로 조조의 동서이자 하후돈의 친척동생.[47] 조조가 강동정벌에 나선 사이 호군장군으로 서황, 장합의 보좌를 받으며 장안에 주둔해 있다. 관중제장의 난 이후 재기한 마초에게 격파당했다는 식으로 초반에 잠깐 언급된다.

    유비와 마초가 서량 호족연합을 격파하고 숨을 고를 즈음에 기습적으로 출병. 한수의 군세를 격파하기 위해 현친현으로 출격한다. 원역사대로 한수의 조잡한 강족연합군 따위는 야전 한번에 대파할 수 있다고 비웃으나, 한수가 흥국성에 들어가 버티자 인근 부락을 파괴하며 야전을 유도하고자 하지만 유비가 이 작전을 간파하며 조조군의 기병대만 피를 본다. 동요하는 일 없이 장리천의 지형을 활용해 기병으로 유비군을 기습했으나 방통이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마초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유비를 끝장내는 데 실패한다.
  • 장합
    조조군 장수. 하후연의 부장을 하고 있으며, 조조의 친위세력인 하후연에게 아부한다. 하후연의 명령으로 인근 강족을 오천명 정도 죽이려고 했으나, 조조군의 이 수법을 알던 유비가 보낸 유격대에 의해 조조군의 기병대만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유비군이 방패로 의지하는 장리천을 역이용해 유비군을 따라잡아 마침내 전투를 벌이게 되고 오자양장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유비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방통의 책략과 타이밍 맞게 도착한 마초의 지원 탓에 결국 유비를 잡는데는 실패한다.
  • 가후
    조조군 책사. 과거 동탁, 이각, 장수의 책사였으며 야심보다는 안위를 중요시하는 인물. 때문에 조조에게는 남들보다 더 대하기가 편한 인물이다. 풍등을 날리며 조조 정권을 공격하는 유비에게 대응할 방법을 조언해준다. 평판이 낮아서 대놓고 친교를 맺진 않아도 지모방략은 모르는 이가 없어 은밀하게 조언을 구하러 오는 이들이 많은데 혹시 모를 분란에 말려드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절대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 않고 불가의 선문답처럼 두루뭉실한 말만 해준다.
  • 정욱
    조조군 책사. 위왕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집중하며 당장 유비 쪽에 대군을 동원하고 싶지 않은 조조의 속내를 짐작하고 상용으로 도피한 장로를 이용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후 유비가 입촉을 시작한 시점에도 대군을 내서 유비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후 임상대치가 길어지도록 염행의 파견은 미루자는 조언을 하나 역시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절대 먼저 의견을 내는 법 없이 묻는 말에만 답하던 가후, 신념을 고집하다 죽음으로 조조와 결별한 순욱, 옳은 헌책을 하는 대만 매달려서 주군의 흉중을 살피지 못할 때가 많은 유엽과 달리 조조의 정치전략에 이견이 있어도 한번 거절당하면 바로 물러서는 타입.
  • 화흠
    조조군의 책사. 유비를 상대할 방법을 묻는 조조에게 유엽이 대군을 동원하자는 계책을 내자 이를 반대한다. 사실 조조 역시 찬탈을 위한 전쟁이 더 급했기에 화흠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 진군
    젊은 시절 유비의 막료로 출사했었다보니 유비가 화제에 오르면 발언을 삼간다.
  • 종요
    전직 사례교위. 서량을 오랫동안 다스리며 마초 등도 막아낸 유능한 인물이다. 위공 즉위 시점에는 업성으로 이동해 출세가도를 밟고 있었으나, 원 역사에서는 자진 진압될 서량의 난이 유비의 가세로 장기화되어 사실상 서량을 상실하자 불안해한다. 원역처럼 서예가로서 명성이 높아서 그의 글씨는 익주 호족들 사이에서도 귀한 보물로 여겨진다.

    유능한 관료면서 예술가 기질도 있다보니 장비가 쓴 죽서기년의 사본을 보곤 글씨 좋다고 속편한 소리를 해서 조조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 유엽
    마초가 재기하고 유비가 입촉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고심하는 조조에게 크게 패한 뒤 아직 세력을 회복하지 못 한 서량과 익주에 2번에 걸쳐 전력을 차출해 전력이 약해진 형주를 치면 된다고 조언하나 마음이 딴 데 가있는 조조는 듣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 재차 조언하려 했으나 사마의의 제지로 멈춘다.

    이후 조조가 복씨 일가를 처형하는 걸 보면서 공포에 질리나, 사마의가 유씨인 자신이 조조를 지지하는 것은 아주 유용할 거라는 말을 듣고 안심한다.
  • 사마의
    서량과 형주를 쳐야 한다는 헌책이 거부 당했음에도 거듭 나서려는 유엽을 제지한다. 후일 위를 찬탈하는 인물인만큼 유비의 생각 속에서도 자주 비중을 보인다. 조조를 모방해 찬탈을 성공했으나, 수단방법 가리지 않은 악행으로 인한 성공이 결국 후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줘 팔왕의 난을 유발했고 이후에도 역사적으로 비난받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 악진
    수년 전 남군 공방전에서 관우를 패퇴시킨 이력이 있어[48] 조조의 명에 따라 7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용을 침공한다. 전장이 좁기에 악진은 이전을 부관으로 삼아 상용에서 관우와 정면으로 격돌한다. 관우의 괴력에 당황하면서도 유인책으로 끌어들이는 노련함을 보였으나 법정의 개입으로 계책이 어그러졌고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대치만 이어가다 신씨 형제의 신속 선언을 명분으로 퇴각한다.

    물론 악진이 뛰어난 장수지만 관우, 법정, 유비라는 유비군 최상위 전력과 무승부라는 것에 악진을 너무 올려친다며 촉빠들이 난동을 부렸는데 악진의 7천 병력은 십만 조조군 중에서도 가리고 가린 정병들이라고 언급된다.

    관우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법정은 적극적으로 합을 맞추는 대신 유비 옆에 붙어있다 전투 중반에 합류했고, 악진의 기병 전력이 2천이고 모두 숙련병인데 유비측 정예병은 관우가 이끈 기병 300(최정예 오환돌기는 겨우 50)이 전부였다. 무승부면 오히려 선전이다.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장군 1인의 용맹으로 좌우되는 시대는 지났고 정예병(특히 기병)의 양과 질이 승부를 결정짓는 시대다. 기병 전력이 현격한 열세인 상태로 대승을 거둔 전술가는 삼국시대 통틀어도 조조, 강유 등 소수다.

5.6. 형북

명목상 조조가 차지한 지역이나, 한중군 동쪽의 삼군(서성,상용,방릉)을 뜻하는 동삼군은 상용을 중심으로 지형적 이점을 통해 반자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중의 안정성과 형주 공략을 위해 요긴한 지역으로, 장로는 유비군을 피해 상용으로 도피했고, 조조도 상용을 통해 한중을 위협하려 해서 유비 역시 상용을 중시했다. 결국 유비와 조조군의 일전 이후 암묵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중립 지대가 된다.

유비가 형주 남쪽을 문제가 되리라 알면서도[49] 유지하는 건 이 형북의 세력구도 때문이다. 형주와 중원을 가로지르는 대별산맥과 한수에는 과거 중원에서 조조를 피해 도망친 잔당들이 매우 많아 조조의 영역인데도 반 조조 여론이 드높다. 조조 역시 긴 시간을 들이거나 이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토벌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세력이다. 형주에서 북진할 때 이들과 연결만 된다면 사기높은 대군과 현지의 민심을 거저 얻어 바로 중원의 허도, 낙양, 여남 같은 핵심지역을 위협할 수 있다. 유비는 임상대치 기간 동안 이들과 연락하는데 성공해 반 난민에 불과한 이들을 제대로 된 게릴라군으로 조직한다.
  • 장로
    한중을 장악한 오두미도 교주. 본래 유언의 지원을 받아 한중을 장악했음에도 현시점에선 유장과 대립하며 자치를 하고 있다. 당시 명사들은 익주의 군사력이 만만하지 않은데도 장로가 밀리지 않는 걸 보고 장로가 상당한 강병을 보유했다고 착각했으나 사실 유장이 동주병을 동원하지 못해서 2급 전력만 쓰다 보니까 밀린 것이다. 장로는 군벌보다는 교주로서의 성격이 강해서 종교서적을 편찬하거나 백성들에게 재정을 풀어 복지를 제공하는 등의 종교활동에 바빠서 그닥 눈여겨볼 정예군이 거의 없었다.[50] 이 사실을 미래지식으로 아는 유비의 급습으로 인해 패해서 한중을 빼앗기고 상용으로 도피한다. 이후 당시 한중군민 대부분이 오두미도 교도인 것을 의식한 유비가 민심을 얻기 위해 장로를 달래서 한중군에 돌아오게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비는 간옹이 파견해 설득을 진행하고, 찬탈에 집중하느라 유비에게 시간 쏟아부을 여유가 없었던 조조는 장로를 움직여 상용에서 한중을 찔러보려 하면서 일종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 그러나 조조가 곧 장로를 끌어들이기보다는 악진과 군사를 보내 강제로 데려오려 하면서 위기에 처했고 이에 유비가 급히 상용으로 향하게 된다.

    조조, 유비 어느 쪽 편도 들지않고 관망하려는 신씨 형제의 견해를 지지하며 아들 장성을 유비측에 볼모로 보내 일단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 괴기
    상용군의 대표 호족. 제갈량의 누나와 혼인해 제갈량과 인척 관계이지만 계속 유비에게 뻗대다가 결국 맹달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원역사를 알고 있던 유비가 본인이 직접 가서 그를 설득하고자 했다. 현지 민심이 양쪽을 저울질하기로 한 가운데 악진을 꺾는데 실패하며 1차 시도는 실패.
  • 신의, 신탐
    상용군의 대표 호족. 유비, 조조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간을 본다. 유비 쪽에서 등지를 파견해 신호를 주자 조조, 유비 양쪽에 신속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두 세력이 상용에서 물러날 명분을 준다.

6. 개변된 역사

  • 유비의 한중 진출
    당시 외부에선 거의 알지 못하는 한중-익주의 세력 구도를 정확히 파악한 유비의 결단으로 유비군이 한중으로 출진해 장로를 격파, 그대로 서량의 마초와 연결되면서 형익병진의 실현 가능성이 대폭 올라갔다.
  • 유비-마초 동맹
    원 역사에서는 양부의 배신으로 패배해 몰락한 마초였으나, 여기서는 유비의 원군으로 인해 역으로 호족연합군을 대파하고 천수군을 안정적으로 점령한다. 이후 유비는 치소 기성을 넘기고 상규성으로 거점을 옮기기는 했으나, 마초는 병력이 3천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징병할 명분과 군량, 행정적 업무까지 전부 유비군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 사실상 서량의 주도권은 유비군에게 넘어온 상황이다. 유비는 형주와 한중이 연결되지 않아 당장 동원가능한 인력이 부족한 만큼 마초에게 서량의 지분을 보장하고 대 조조 동맹에 끌어들일 계획이다. 장리천 전투 이후 강족과 저족의 민심을 크게 얻고, 한수의 세가 위축되면서 두 동맹이 서량을 장악하고 있다.
    • 장리천 전투
      하후연군 8천명이 유비군 4천과 마초군 1천, 한수군 등과 벌인 전투. 유비군의 가축떼를 이용한 유도책으로 강족 마을을 대부분 피난시키고 학살을 위해 소규모로 들어온 하후연군 기병을 역습하는 데 성공했으나, 장합의 작전으로 장리천 상류에서 거의 다 보병인 유비군 4천이 포위당해 전투가 벌어진다. 방통이 강족 주민들을 동원해 벌인 소떼 난입 작전으로 기병에 쓸려나가는 상황은 막았으나 수적 열세로 점차 다시 몰리던 차에 마초가 한수군에서 빼낸 기병을 더해 3천5백 병력으로 하후연의 후방을 치면서 하후연과 장합이 퇴각을 결정. 유비군의 승리로 끝난다.
  • 형주 사령관 교체
    원 역사에서는 방통이 사망한 후 유비가 제갈량과 장비를 불러들이면서 관우가 형주에 남아 형주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과 달리, 여기서는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불어들이면서 제갈량이 형주에 남아 형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조운과 진도가 보좌하게 되었다.
  • 유비-조조의 여론전 격화
    210년대는 조조가 찬탈을 위한 준비에 속력을 내던 터라 역적질임이 분명한 여러 사건사고가 터졌다. 유비가 입촉을 미룬 것에는 이 시기에 조조의 발목을 잡기 위한 책략을 걸기 위해서였기에 유비는 위공국 분봉 이후 풍등에 조조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보낸다. 조조는 이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다가 가후의 조언으로 유비에게 마음대로 왕을 자칭하는 서량의 소군벌 송건을 토벌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내려서 자신도 유비의 약점을 쥐고 있음을 암시한다.[51] 결국 유비는 이를 그만두지만, 조조세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후엔 조조의 여론전을 유비가 포착한다. 명필 종요가 요-순의 선양에 관한 글을 써서 서량과 한중 곳곳까지 뿌리고 다니는 것을 유비가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당연 후일 찬탈을 위한 밑준비였고, 이에 유비도 고대 역사서 죽서기년[52] 발굴해 조조를 비난할 계획을 세운다. 유비는 산하의 습정과 문관들, 그리고 나름 명필인 장비를 시켜서 죽서기년의 발굴을 각지에 알린다. 유비군과 거리를 두고 있던 각지의 호족과 학자들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해 몰려들었고, 이를 통해 종요의 여론전을 잠재울 수 있었다.
  • 상용 전투
    늘그막에 찬탈을 위한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중이라 대규모 외정을 벌일 경황이 없던 조조는 적은 비용으로 유비를 흔들수 있는 패로 장로가 피신해 있는 상용 공격을 꺼내든다. 여전히 한중 백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를 조위로 데려와 유비의 근거지인 한중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버리려는 것. 악진과 이전이 이끄는 7천의 군마가 상용을 향하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유비는 관우를 대장, 법정을 참모로 삼고 자신은 상용 현지에서 호족들의 인심을 사는 작업에 돌입한다.

    유비군이 먼저 상용에 도착해 분지에 진을 펼쳤고, 악진은 상용분지에 들어오자마자 군을 나누어 공세를 가한다. 악진의 장점은 빠른 실행능력이었고, 5천 보병들로 차륜전을 펼치고 유비군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철기병을 이용해 삼복 전법으로 쉴새없이 관우를 공격했다. 돌격용 전기, 백병용 함기, 기동용 유기로 좋은 무장을 갖춘 악진 기병의 공세에 유비군이 몰릴 때에 관우가 반격에 나선다. 관우는 전기와 함기의 교대타이밍을 파악, 오환돌기 50기를 선봉에 세운 기병 300과 보병 700명을 데리고 돌격했다.

    물론 삼복 전법은 교대 순간이 약점인 걸 악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시킨 유기 기병들을 출격시켜 함기를 보호하며 관우를 견제했으나, 선봉의 관우와 오환기마들은 겁먹기는 커녕 더욱 속도를 내서 유기를 따돌리고 기병 300으로 함기를 덮친다. 복귀하던 전기들이 관우에게 돌격하려 했으나, 이를 읽은 관우는 자신과 오환 기병들로 한발 빨리 전기를 공격했다. 수는 10배나 되지만 본래 백병전용 무장이 아닌 전기 기병들은 관우의 무력에 그대로 돌파당하고는, 뒤를 따라온 요화의 보병 700명에게 붙잡혀 진흙탕 싸움에 빠진다.

    유기를 제외한 악진군 기병들이 전부 혼란에 빠지자 악진은 기병들을 구원하기 위해 유기 지휘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자 차륜전을 보조해줄 기병들이 없어진 보병들을 관평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에 이전도 차륜전을 그만두고 맞서면서 유비군이 밀리던 전황은 팽팽해진다.

    그러나 악진이 지휘하는 유기 기병이 관우의 기병들 후방에 투창공격을 해오자 금방 위기를 맞은 관우도 이러다 양쪽에서 눌려 당할 수 있음을 깨닫고 물러나야 했다. 악진이 유기를 지휘해 붙잡으려 했으나 관우는 이번에도 엄청난 속도로 포위를 벗어났다. 그리고 관우는 초반에 함께 돌격한 1천 돌격대를 다시 모아서 그대로 유기 뒤에 있는 악진을 향해 덤벼든다. 말 그대로 뭉쳤을 뿐 진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나, 관우의 무용에 힘입은 돌파력은 강력했다. 이에 악진은 후퇴하면서 이전의 보병대 측으로 관우를 유인, 기보의 힘을 합쳐서 수적 우위로 관우를 잡으려 한다.

    한편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유비는 법정에게 개입을 허가해, 법정이 보병을 지휘하던 관평의 예비대를 대신 지휘한다. 악진이 버텨서 관우를 끌어들여 포위하느냐, 관우가 따라잡아 악진의 부대를 격파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상황에 법정이 가볍게 부딪히게 만든 경보병들은 당연히 반격당하기 전에 밀려서 도망친다. 그 광경을 보던 관우는 악진의 수작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회전은 서로 결정타를 넣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서로 확실하게 끝장낼 역량이 없었던 양군의 지리한 대치가 이어진다.[53] 익주 정벌을 위해서 오래 붙잡혀 있을 수가 없었던 유비는 신씨 형제[54]에게 사람을 보내 조조, 유비 양쪽에 양다리를 걸쳐도 된 다는 신호를 주고 이를 접수한 형제는 두 세력 모두에게 신속하는 글을 보내 퇴각할 명분을 준다.

    악진을 이기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치적으론 유비에게 득이 되었는데 서량에서 귀환한 후 조조에 맞서야 하니 군사를 빌려달라 유장에게 요구했던 것이 이 원정으로 빈말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중으로 귀환한 유비는 이미 충분히 벌어둔 명분, '온 힘을 다해 도와주었건만 역적 조조를 치는 데 병사 한 명 보태지 않은 불충하고 배은망덕한 유씨 일족' 유장을 향한 공세를 시작한다.
  • 임상대치
    유비의 입촉이 쾌속으로 진행되자 이이상 유비가 커지면 동오에 위협이 될 것이란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손권이 이에 따르면서 원 역사보다 빠른 시점에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영토를 갈라주게 되더라도 형익양진을 위한 최소한은 쥐고 있고자 영릉태수로 등지를 파견하고 제갈량에게 임상현과 익양 사이 개울에 보루를 세워 지키게 했다.

    파구의 물길을 쥐고 있는 오의 군대는 유비의 예상대로 여몽을 앞세워 장사와 계양을 휩쓸었고 지리적 불리함 + 2차에 걸친 익주로의 차출로 병력 자체가 부족한 형남 4군은 여기에 대응하지 못한다. 장사태수 요립이 어렵사리 끌어모은 2천 오합지졸은 변변한 싸움 없이 흩어지고 장사와 계양은 확보한 상태에서 유비는 2만 군사를 이끌고 장강삼협을 통과해 익양으로 나아간다. 유비의 진격 소식이 노숙 측에 전해지자 장군 감녕은 임상현과 익양 사이 요충지를 미리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 1300기를 이끌고 나아가나 그곳은 이미 제갈량이 방비를 마친 뒤였다.

    출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과 경쟁하며 눈치봐야 했던 처지의 제갈량은 유비의 지시를 120% 이행. 보루 2개를 나란히 세우고 주기적으로 병력을 교대해 만전 상태를 유지함과 동시에 원융노를 비롯한 군수물자들도 잔뜩 쌓아둔 상태였다. 빠르게 이동해 진지를 세울 생각에 경무장 공병부대와 300명에 불과한 감녕의 사병이 전부였던 오군은 변변한 공성 무기도 없이 보루를 점거하려다 참패하고 감녕 본인도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본래 노숙은 영릉까지 점령했다가 선심 베푸는 척 돌려줄 생각이었으나, 감녕의 패배로 인해 유비군의 영릉 진입을 제 때 막을 수 없었다. 2만 대군을 몰고 영릉성을 포위한 여몽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유비가 형주에 올 수 없다고 허세를 부렸으나, 결국은 유비군이 오기 전에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여몽은 장사군 임상현에 여대와 일부 병력을 남기긴 했다. 그러나 유비군의 빠른 진격을 예상하지 못한 여대는 항복하지 않는 현들을 제압하러 출정했다가 감녕이 사라지고 빈 익양을 넘어온 관우에게 임상성을 빼앗기고 만다. 이렇게 해서 양 세력의 대치는 원 역사의 익양이 아닌 장사군의 치소 임상현 인근이 된다. 익양에 유비군의 보루가 쌓인 이상 임상성과 파구항구의 싸움은 육군이 주력이 되기에 손권도 한발 물려야 했다. 유비 역시 수군 전력으론 노숙보다 열세에, 임상현의 보급부담을 덜기 위해 파구까지 가지 않고 그 앞에서 멈춘다. 두 세력은 대 조조 동맹이라는 근본은 아직 지켜야 했기에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수개월. 서량군벌 한수가 죽어가자 조조는 과거의 서량군벌이자 지금은 조조에게 투항해 열후가 된 염행과 장안의 하후연,장합을 동원해 서량에 손을 뻗으려 하자 유비는 계획대로 장사군과 계양군을 넘겨준다.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었으나, 원 역사보다 손권을 훨씬 고생시켜 219년에 두 번째 배신을 최대한 주저하게 만들기 위한 한 수였다.

    유비는 조운과 공명을 시켜서 형북 대별산맥의 반 조조 세력을 지원해 세부적인 협조 체계를 짜내는 한편 관우를 원군으로 파견한다.

7. 평가

전작 '강감찬 천지를 껴안다'의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간절히가 비장의 수로 '유비 빙의'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많다. 간절히 작가의 경우엔 그 동안의 삼국지물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선택한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삼국 군주 중 하나인 유비 같은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덕분인지 연재 15화만에 선작 1100명을 넘고 유료화 첫날 구매수 1000을 찍는 등 초반부터 화제는 제법 끌어 유지하는 중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작품과 비교해도 유비가 워낙에 경박하고 격식없는 말투를 사용해서 원 역사 유비의 출생(유협 출신)에 현대 젊은이 곽선호의 영혼이 빙의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어색하다는 불평이 있다.[55]
[1] 박사 못 딴 것에 자격지심이 있는지 임상대치 중에 박사였으면 또렷한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 사학과 박사는 40대가 기본이라 30대인 선호는 자질과 상관 없이 못 따는 게 정상이다.[2] 유비가 유표 사후에 형주 장악에 실패하였고, 적벽대전에선 주역이 아닌 객장으로 참여하면서 손권에게서 남군을 빌리는 형식으로 형남 장악을 시작하면서 시작부터 꼬여버린 상태였는데, 입촉 과정에서 의인으로 소문난 유비의 평판이 크게 깎인데다 3년간 파촉 장악에 집중하느라 위-오 전쟁, 위-서량 전쟁 등 천하의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시점에 관여할 수 없었으며 유비가 파촉을 점령한 직후 위가 장로가 차지하고 있던 한중과 파동을 점령해버리고, 기껏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형남 4군 중 3군은 익양대치로 오에게 양보하는 등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봤다. 인재 시점에서도 손해인 게 유비를 따라 입촉을 보좌하던 책사 방통이 전사함에 따라 형주를 방어하던 제갈량과 장비를 불러들여야 해서 형주를 관우 1명에게 맡겨야 했고, 한중공방전의 주역으로 맹활약한 황충과 법정도 220년에 죽기에 210년대 초반에 3년이나 되는 시간을 파촉을 차지하는 일에 낭비할 수 없다.[3] 사실 일단 큰 틀에서는 제갈량의 전략도 어느 정도 따른 것이긴 하다. 제갈량은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고 서쪽의 융족(혹은 양주 군벌 마초)와 접촉하면서 관중으로 유비가 진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대전략 자체는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 사실 그렇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방통이 바로 유장 참수작전으로 입촉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유비가 그걸 거부하고 벌인 익주 정벌전쟁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익주에서 유비군을 관찰한 여대가 유비군이 대패해 백제성으로 도망갔다는 증언을 하는 등 유비 본인이 익주의 군사적 역량을 잘못 재는 실수를 한 것이다. 주인공이 이 점을 대놓고 지적하면서 원 역사 유비의 선택을 까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정한 것이나 유비의 군사적 능력이 대놓고 별로라는 서술한 것으로 보면 간절히 작가 역시 유비가 굳이 방통의 중책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책이라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4] 바로 물에 걸어두면 삭아서 매년 수천근의 쇠를 녹여 새로 갈아 끼워야 할 뿐 아니라 오가 뻔히 알고 대비할 게 뻔하니 몰래 만들어서 잘 보관하고 있게 했다. 219년에 호우가 발생하고 북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어디에 써야 할 지 알게 되니까.[5] 본래 역사에서도 방통은 유비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기보다는 군말없이 충성하는 측이었으나, 익주 정벌을 두고서는 유장의 장수들을 꺾고 부성에서 술에 취해 기뻐하는 유비를 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만을 보이는거 아닙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방통에게 화를 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봉합되긴 했다.[6] 방통이 입촉을 찬성했단 기록도 있지만 본래 방통의 상책은 정병만을 모아서 성도를 기습해 제압하는 것인데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백수관 등의 성도 주변부터 차례대로 제압하는 중책을 썼다. 방통 입장에선 속전속결하자는 상책도 이미지 관리, 도박수라는 이유로 거절하고는 시간 걸리는 중책을 채택하더니, 아직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입촉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자기의 상책이 채택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7] 유비-손권 동맹 파탄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냐는 논쟁은 지금까지도 큰 떡밥거리긴 하지만 일단 형주 사령관으로서 손권에 대한 관우의 대처가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8] 악진과의 교전 묘사를 보면 중년을 훨씬 넘긴 관우는 적진을 한참 휘저으면서도 쌩쌩한데 부하들이 먼저 지쳐서 돌격력이 약해진다.[9] 작중 유비는 이를 '우당탕탕'이란 수식어로 정리한다.[10] 유장이 동주병을 전부 성도 주변으로 물려서 외곽 지역엔 정예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11] 이 고민의 가장 큰 이유가 된 것도 관우였다. 만일 관우가 번성 공방전 당시 우금과 3만 위군 포로를 무리하게 돌보지 않고 전부 죽였더라면 번성의 조인과 서황 등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관우는 끝까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패배했다.[12] 당연히 무장인 장비가 서예사의 위인인 종요를 능가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개성있는 필체 + 일찍이 만인지적으로 조위와 손오 양쪽에서 인정받은 장군의 글씨라는 점에서 화제성은 충분했다. 이후에 종요가 장비의 사본을 보고 난 후의 반응을 보면 이런저런 단서 빼도 달필 소리 들을 수준은 되는 모양.[13] 실제로 법정의 계책에 관우가 대놓고 면박을 주자 앞장서서 분위기를 수습한게 장비였다.[14] 정확히 말하면 주창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정사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단순히 부장이라 나오지 이름은 안나온 탓에 주창이란 인물 자체는 정사에서는 허구 취급 받는다.[15] 실제 역사상으로도 한번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 군대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된 상용점령작전을 기획한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런 기책이나 도박을 즐기는 성격으로 작가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16] 형주 사람들은 수로의 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다고 한다. 미방과 부사인도 비슷했을 것이라고.[17] 원 역사에서는 아예 남진하는 조조군의 진입로에 토성을 쌓아버리는 대공사로 조조의 기를 죽였으나, 본작에서처럼 한중군민들이 경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패했다.[18] 실제 역사에서도 213년, 마초가 기성을 공격할 때 장로는 양앙을 대장으로 삼아 마초를 돕게 했고 마초가 기성을 점령하자 그의 명령대로 위강 등 위나라의 관리들을 죽인다.[19]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조조의 위왕 즉위로 인해 폭발한 반조조 인사들이 형주를 통해 유비군과 협력하면 손해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역사에서 익양대치 이후 동오는 더욱 관우를 경계할 정도로, 유비군의 기세는 매서웠다.[20] 감녕이 항장 출신이란 딱지 떼어내고 오에서 확고한 위상을 점유하는 건 유수구 전투에서 특공으로 손권의 체면을 크게 올려준 다음부터다. 이때까지의 감녕은 쓸만한 돌격대장 정도의 위상이었다.[21] 제갈량은 서주 낭야에서 굴러들어와 황씨와 혼맥을 통해 형주의 호족, 명사들과 줄을 만들었고, 방통은 남군 출신 토박이다. 방통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입촉 이전 유비의 인재풀의 다수를 차지한 남양, 양양 출신들 사이에서 제갈량이 우뚝 서긴 쉽지 않았다.[22] 유비는 가는 길에 무장을 하고 여비를 넉넉히 쓰라고 비단 장수로 위장시켰는데, 유비의 서량 개입에 의한 나비 효과로 인해 서량과 조조 세력권의 치안이 생각보다 나빴기 때문에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23] 파구에서 내려오는 수로가 유비쪽에 압도적으로 불리해 당대의 명장 누굴 데려와도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는 구도라 거리상 동오에 가까운 장사와 계양은 포기하는 걸 상정하고, 남쪽 구석에 있어 구원이 가능한 영릉을 지켜내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 원 역사의 영릉태수 학보는 어찌어찌 버티나 싶더니 여몽의 블러핑에 넘어가 항복해버렸다.[24] 배송지의 기록으론 10만. 작중에선 5만 내외로 서술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전근대 병력 서술이 늘 그렇듯이 이 당시 10만을 호왈십만으로 본듯 하다.[25] 뛰어난 학력과 가문, 소수민족의 핏줄까지 가졌다. 마초는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며 강족의 피가 섞여 이민족들과도 연줄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재도 뛰어났다. 만일 동관대전에서 이겼다면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군주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26] 마초는 역사에서 거병 와중에 갑자기 병주목을 자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부터 조조의 방어라인을 우회해 병주를 통해 장안을 칠 계획이었다.[27] 사실 양부 입장에서는 기성 전투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이제 와서 일족을 다 죽인 마초와 화해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하다. 애초부터 양부는 조예 시절까지 조위에 충성하면서 조예에게 온갖 충언을 아까지 않았던 골수 친조조파-조위 충신이기도 하니 일찍부터 한실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28] 원 역사의 양부는 조예 시기 구경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나, 끝내 조예가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자 홧병으로 죽는다. 즉, 여기서는 조예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셈.[29] 왜 그렇게 되냐면 양부 고모의 논리대로 조조가 충신이라면 헌제가 외척인 동승에게 몰래 조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의대조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 원역사에서는 마초가 이를 알지 못해 그냥 말없이 죽여버리지만 여기서는 의대조 사건의 당사자인 유비가 있다보니 완벽하게 카운터를 쳐서 양부의 고모를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버렸다.[30] 원역사보다 1년 빨리 침공이 벌어졌다.[31] 유장의 선대인 유언이 자사를 목으로 바꿀것을 영제에게 건의하고 익주목으로 임명받았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32] 이 동주병은 유언이 익주에 몰려든 난민들을 이용해 만든 정병으로 타 군벌들의 정병에 지지않는 강병이었다고 한다. 수도 최소 3만~5만에 달해 누구라도 얕보기 어려운 전력이었다. 원역사에선 이 동주병들이 유비를 막아서느라 유비 옆에 방통, 법정 같은 우수한 참모가 있었고 유장의 세력을 알음알음 사전에 강탈했음에도 연 단위로 고전했다.[33] 동주병이 전원 보병이고 높은 사기와 별개로 천단위 정예 기병과 싸워본 경험은 없다는 걸 감안하면 성도에 남은 병력 3만을 전부 내보내 영격하고, 낙성 방면으로 합류시키게 상책이었다. 낙성이 뚫려 성도 인근의 경작지들이 다 넘어가면 성도성 쥐고있어봐야 소용이 없으니까.[34] 이걸 본 장송은 자신이 없었어도 유장은 알아서 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35] 물론 정말 이긴다는 확신은 없었으나, 황권은 이대로는 익주 지방세력이 무력하게 무너질 게 뻔하다고 짐작하고 있기에 자기목을 걸고 허장성세를 부린 것이다. 다만 유비도 황권에게 동주병 주력군을 맡기면 유비군 1만 명 정도의 유비군으로는 못 버틴다 확신할 정도니 2만의 유비군이라도 치열한 혈전을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36] 단순히 황권과 장임이 유비에게 투항할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는 것을 더 걱정했다.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면 그 공을 명분삼아 익주의 군권 자체를 가져갈 텐데 외부인으로서 성도 인근의 기름진 토지를 차지하고 토착 세력과 알력을 빚어온 동주병, 그 동주병의 주인인 유장 입장에선 침략이나 그거나 다를 게 없었다.[37] 유비가 장송에게 단순히 안부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경계 대상 1호인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니 황권은 이 기회에 장송을 조지고자 했다. 그러나 장송이 진짜 내통을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편지를 주고 받겠냐며 반박하자 황권도 아무 말을 못했고 일단 사형은 피한 채 옥에 수감된다. 이마저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풀어주면서 유장에게 해명하는 서신을 보낸 덕에 곧장 석방된다.[38] 장사, 계양군을 넘겨주는 선택지도 쉬운 게 아니다. 이 2군이 개발이 덜 된 무릉, 영릉과 달리 이때부터 형남의 곡창지대로 활용되고 있었고 여기를 내줘버리면서 형주에서의 북진이 보급 부담으로 힘들어졌다. 파구를 점거하고 있는 동오가 이쪽으로 들어가는 지원군을 손쉽게 차단하고 순식간에 대군으로 밀어버릴 수 있어 정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39] 실제 역사를 보면, 손권이 먼저 유장을 치자고 유비에게 제안했었는데 유비가 '지금 조조와 맞싸우는데 같은 반조조연합인 유장을 치면 안 되고 또 유장은 자신과 동족이니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 군사를 동원해 길을 막고 '나는 유장을 치느니 머리 풀고 입산하겠다' 드립을 쳤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대놓고 유장의 통수를 치고 자기가 입촉을 하면서 손권의 통수도 같이 쳤으니 손권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40] 또한 215년이라서 곧 조조가 2차 유수구 전투를 벌일 시점인데 손권, 노숙, 여몽 셋 다 형주에 와 있을 수는 없다.[41] 손권이 무려 10만 대군을 몰아 친정했으나 장료, 악진, 이전의 7천 정병에게 야습당해 손권조차 죽기살기로 겨우 도망쳤을 정도로 크게 패한 전쟁이다. 감녕이 중용받는 것도 이 전투와 이후 유수구 전투에서 용장의 면모를 보여준 덕이었는데 하필 감녕과 그 부곡들이 죽었으니 손권이 죽을 가능성이 더 커진 셈이다.[42] 실제 역사에서도 손권이 나중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의 도독들을 평가한 바가 있었는데 노숙이 여러 부분에서 잘한게 많으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줘서 통수를 맞은 건 실책이라고 평가하여 주노여육 네 도독 중 가장 평가가 낮았다. 물론 노숙도 할 말이 있는데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강동과 형주를 잇는 장강 수로가 동오에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막강한 수군으로 언제든 손쉽게 찔러 내려갈 수 있었고 수군이 약한 유비측은 여기 대응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호구라서 그냥 넘겨준 게 아닌 것.[43] 유비가 장사, 계양쪽을 양보할 생각이 있는 것과 별도로 아직 익주를 떨어뜨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영토를 할양해버리면 아랫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뻔히 알면서 강짜를 놓은 것.[44] 말이 공작이지 기주 10개 군은 군사경제적으로 핵심지역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왕공작의 봉작 영역을 한참 넘어서서 사실상 한실을 찬탈하겠다는 예고나 다름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공을 세운 장군이 수원, 화성, 성남, 군포, 안양, 오산, 용인, 평택, 여주, 안성이라는 경기도 대부분을 자기의 땅으로 만든 꼴이라고. 실제로 이후 선양으로 가는 길을 여는 찬탈자들이 이런식으로 왕공작을 받아 선양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45] 진군과의 대화로 유비는 그저 십상시 때문에 한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 조조는 당시 황제인 영제가 어떤 패악질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봤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조 시점의 판단일 뿐 유비도 영제-헌제 시기에 한실이 패악질을 저지른 죄업이 있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46] 사실 이 부분은 본 소설의 시계열이 좀 꼬인 상태인데 본래 순욱의 자결은 한창 조조의 위공 즉위 논의가 진행되던 2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이 세계관에서는 소식이 뒤늦게 전달됐거나, 혹은 조조가 위공을 칭하자 순욱이 그제서야 죽은 듯 하다.[47] 보통 조등의 양아들이자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이 본디 하후씨였는데 조등에게 입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서 하후연이 조조의 사촌동생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은데, 패현 조씨와 하후씨가 가까운 사이는 맞았지만 정말 조숭-조조 가문과 하후씨의 관계가 혈연 관계 였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숭 문서 참고.[48] 관우는 변수가 적은 힘 승부, 단일전장에서는 강하나, 변수가 많고 분산되는 전장에서는 약한데 하필 형주가 딱 이런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조조군은 이통, 문빙 등의 우수한 지휘관을 대거 동원했다.[49] 원 역사에서도 방통 등은 형주는 익주와 교통도 불편하고 관리도 안되니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었다.[50] 그래도 실 역사에서는 동주계의 유력인물인 방희를 상대로 파군쪽을 두고 자웅을 겨룰 만큼 장로는 유장에게 있어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51] 한황실의 충신을 자처하는 이상 유비는 조조가 내리는 각지의 군벌 토벌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이들도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 마음대로 장군이며 뫙을 자칭하는 역도들이기 때문.[52] 죽서기년에는 요순시대의 선양이 상당한 정쟁을 거쳤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53] 유비측은 관우가 이끄는 수백명(최정예 오환돌기는 고작 수십) 외엔 정예병이 없어서 처음 돌격에서 악진을 잡지 못 한 이상 결정타를 입힐 수 없었고, 악진은 정예라곤하나 병력 규모는 유비군과 대동소이해 적이 방어로 일관하는 이상 뚫어 내기 힘들었다. 모험을 할 수도 있지만 산으로 들러쌓인 상용 지형상 실패하면 퇴각시 리스크가 너무 크다.[54] 지방 소군벌에 불과한 자신들의 사병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거대 군벌 군대를 이길 자신은 없고, 양측 모두 병사들이 약탈을 하지 못하게 단속하고는 있었지만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의 생산 활동이 완전히 막혀버려 졸지에 말라가 관망할수도 없는 참이었다.[55] 속으로 하는 거야 현대인 특이라 봐도 되니 상관이 없는데 양부의 고모를 대할 때처럼 대놓고 그러는 경우가 많다보니 문제로 삼는 것. 사실 이는 백이잇 시절부터 제기되는 작가의 고질적인 문제기도 하다. 결국 양부 고모 파트는 유비가 정중하게 말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