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주인공.원 역사의 유비에게서 모티브를 따왔으나, 유비 본인은 아니고 21세기 한국의 역사학도인 '곽선호'라는 인물이 빙의하여 엄밀히는 타인에 가깝다. 그러나 유비의 지식과 섞여 있다고 언급되는 만큼 둘이 합쳐진 존재에 가까울 듯하다.
2. 작중 행적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학도였던 '곽선호'는 진성 촉빠로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한 후 유장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던 유비에게 빙의했다. 빙의해 상황을 파악한 이후 입촉은 장기적으론 악수라고 판단하고, 한중군을 공격해 한중을 차지한 뒤 적극적으로 북중국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한다.곽선호가 학도로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지 않고 익주를 공격한 것은 근본적으로 한중의 장로에 대한 외부 지식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후한 말 난세 이후 장로는 오두미교라는 교단을 이끄는 교주이자 군벌이 되어 한중에 내내 처박혀 살다 보니 외부에서는 막연하게 황건적의 장각같은 부류로만 생각할 뿐 장로가 내부적으로 한중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오두미교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일체 아는 바가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유장이 보낸 익주군은 죄다 한중군에게 처발리다 보니 장로의 군사력이 과대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1] 그러나 장로는 삼국지의 난세 속에서 한중에 처박혀 엄청난 시간과 인력, 물자를 모소하며 하던 일이 도교 경전을 편찬하는데 집중하던 종교인에 가까운 인물로, 군사적으로는 3류 이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장로의 노력으로 원시 도가와 중국 토속신앙이 도교라는 체계화된 종교로 완성되어 도교의 주류 교파로 이어지긴 하지만 그런 역사적 의의와 별개로 경전 편찬 집중과 무상복지 정책 때문에 군벌로서는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팔라딘 노릇을 하고 있던 양앙이 제법 군사적 소양이 있었지만,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1년간 허송세월하며 익주를 노릴 준비를 하던 시기라 장로도 안심하고 양앙을 서량에 보내버려[2] 제대로 된 군사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 한중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유비가 입촉하느라 3년간 허송세월한 사이 중원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기 때문에 입촉한다고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이런 노림수가 맞아떨어져서 한중을 빠르게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익주군이 한중군에게 발린 건 익주군의 전투력이 마냥 허접해서가 아니라 동주병(東州兵)의 패악질과 장병들의 동기 부족 때문이다. 유장의 아버지 유언이 외지에서 익주로 이주해 익주 군벌이 되었을 때 유언은 현지 세력을 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고자 중원 각지의 유랑민이었던 동주병을 사병으로 삼았고, 동주병들은 수도인 성도에 자리잡으며 현지인들에게 각종 패악질을 벌였다. 유언의 아들인 유장은 동주병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고,[3] 익주 토착민들은 외부에서 건너온 난민 주제에 지배층 행세하며 성도에서 패악질을 벌이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4]
동주병의 전투력은 상당하지만 성도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하던 동주병들은 한중 원정에 스스로 나서지 않고 익주 토착민들을 강제로 징발해서 보냈는데, 훈련도 부족에 동기 부족으로 익주 토착민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아서 복지국가를 지키기 위한 한중의 오두미교 광신도들에게 발리는 참사가 난 것이다.[5] 그렇기에 원 역사 유비도 동주병과 싸우게 되는 성도 근처부터 꽤 고전했다고 한다. 당시 외부에서는 익주 내부의 동주병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곽선호는 삼국지 역사학도로서 이런 시대적 상황을 유일하게 정확히 간파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짤 수 있게 된 것이다.[6]
한중을 공략한 이후 마초의 거병과 반대파의 전쟁통에 6천 병력을 동원해 서량에 진입. 자신이 은혜를 베푼 마초와 상하관계의 동맹을 맺어 서량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고 있다.
장리천 전투 이후 강족과 저족의 민심을 얻어서 서량 공략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고, 본래 한중으로 온 이유대로 조조의 위공 즉위에 대한 비판을 통한 여론전을 시작한다.
조조가 악진을 보내 상용의 장로를 손아귀에 넣으려하자 관우, 법정과 함께 수로로 상용에 친정. 한 차례 회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뒤 상용 호족들과의 합의하에 물러난다. 악진과의 교전에서 악진 군은 7천이 전부 정예인 반면, 비슷한 규모인 자신의 병력에서 정예라 할 만한 자는 기껏해야 수백이라는 점을 실감하며 정예병을 기를 인력과 물산의 필요성을 실감한다.
상용에서 귀환한 후 관우와 군을 쪼개 본격적인 입촉에 돌입한다. 부성, 백마관, 면죽관을 순조롭게 함락시키고 낙성에 이르렀으나 동주병들이 철저히 방비하는 요새를 뚫기가 쉽지 않던 차에 법정이 일종의 초토화 작전을 제안한다. 샛길로 기병대를 침투시켜 교전은 회피하며 성도 인근에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불살라 버리자는 것. 그때까지 쌓아온 유비군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헌책에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고 유비는 임협집단 시절에 품은 복고적, 이상적 관점을 버릴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고뇌하게 되고 결국 조조와 사마의의 길의 결과가 팔왕의 난과 중국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온 오호십육국 시대임을 생각해내서 이상적 관점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원 역사의 익양대치에 대비한 안배로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고(임상대치) 대별산맥 인근 반조조 세력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연계하는 한편 오의 두 번째 배신에 대비한 쇠사슬과 쇠막대를 비밀리에 제조한다.[7]
성도로 돌아온 이후 마침내 유장의 항복을 받으면서 형남-익주-한중-(서량)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천하의 삼세력 중 하나로서 거듭난다. 민생 대책 논의에선 유파의 직백오수전 발행 건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일방적인 증세가 되지 않도록 익주 토착인사들이 적극 참여하는 익주 개발을 시작하며 군사제도 논의에선 법정이 제안하고 방통, 황권, 장임 등 참모들 전원이 지지한 병호제가 50~100년 후에 가져오는 부작용을 감안해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불리할 것을 감수하더라도 징병제를 실시할 것이며, 병호제로 고통받는 백성들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8]
익주 내정 정비와 한중에서 상용으로 흐르는 물길을 이용하기 위한 수군 육성, 징집된 농민병으로 조조의 정예병에 최대한 오래 버티기 위한 방어 위주 훈련 등으로 바쁜 215년을 보냈고 216년 4월에 있을 조조의 위왕 즉위를 명분 삼아 당해년도 말에 마초와 함께 위수 이북에 자리잡은 염행을 칠 계획을 수립한다. 원 역사에선 217~219년까지 한중에서 치고 받고 그렇게 얻은 한중이 텅 빈 땅이라 219년 집중 호우와 반 조조 반란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염행을 칠 병력 편성을 시작한 가운데 조조와 손권의 움직임을 보고 동오가 배신할 것 같다는 예견을 넌지시 내비쳤으며 이를 쉽게 믿지 않는 참모들을 설득해 최소한 가능성은 있다 정도는 생각하게 만든다.
216년 조조가 서량에 이민족 기병을 투입하자, 황권과 익주군 1만을 먼저 투입, 유비 본인도 군세를 지휘해 친정을 결의하면서 전쟁을 시작한다. 다섯 개의 진군로를 두고 참모, 무장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 할 때 야곡도로 나아가 오장원에 진을 치기로 결정한다. 진을 친 오장원은 주둔과 수비에는 좋지만, 수천에 이르는 오환족 기병들이 위수 일대를 지키고 있어서 쉽게 도하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유비는 삼국시대 석사 출신답게 이 시기 오환족이 강제로 징병되면서 저지르는 온갖 사건사고를 외우고 있었고, 오환왕이 아내를 데리러 주둔지를 떠난 것을 캐치해서, 단숨에 전군을 몰아 도하에 성공하고 진창으로 나아가 하후연과 서황을 참살하고 승리를 거머쥔다. 다만 조조가 서량 일대에서 대규모 제노사이드를 벌인 탓에 진격로에 애로사항이 생겼다.
3. 기타
간절히 작가는 이전에도 삼국지 대역을 많이 썼는데 본작의 유비는 최초로 주인공이 유비라는 거물에게 빙의된 사례이다.빙의자의 특성상 원 역사의 유비와 달리 본인 대에 어떻게든 천하를 통일하거나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야망은 별로 없다. 조조를 저지하려는 것은 조조의 찬탈 수법이 후대에 나쁜 의미로 선례가 되어 짧게 잡으면 위진남북조시대, 길게 잡으면 오대십국시대까지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9] '성공 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정상 촉빠라는데 정작 독자들은 촉빠라기보다는 그냥 제갈량빠같다는 평이 많다.
기본적으로 외부 세력한테는 조정에게 받은 좌장군으로 호칭된다. 그런데 이 좌장군직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조조다.(...)[10]
조조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헌제의 칙서에 면역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데, 작중 유비는 의대조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 호족들은 조조가 내린 천자의 칙서를 보면 흔들리거나, 이를 명분 삼아 배신하는 등 답 없는 태도를 보이는데 유비는 그것이 조조의 위조 칙서라고 당당히 주장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미래 지식을 원 역사 유비의 '사람 보는 눈'으로 둘러대고 있다. 군사적 역량은 현장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조조나 주유 등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하나 무용을 알아보는 눈과 원 역사처럼 인재를 보는 안목은 최상급으로 언급된다.
간절히 작가의 주인공답게 직접적인 군사적 능력보다는 원 역사에서 어떤 시간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계산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끄는 쪽이 특기이다. 그러나 삼국지 대역 전작들의 빌런과 여러 의미로 차원을 달리하는 조조와 희대의 트롤러 손권이 빌런이다 보니 쉽게 풀리지만은 않아 작품의 긴장감은 상당하다.
작가의 전작 아! 내가 마속이다의 주인공 마속이 죽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촉한이 서진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했다는 에필로그 설정과[11] 조조, 유비의 나이 문제 때문에 본작의 유비도 사후에 천하통일이 이루어질 거라는 추측이 있다.
[1] 유비뿐만 아니라 조조가 한중을 상당히 뒤에 공격한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2] 서량의 호족 집단이 조조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로가 한중의 안보를 위해 파견했다.[3] 유장이 집권한 이유가 동주병들이 가장 꼭두각시로 부리기 좋았기 때문이라고.[4] 유비의 입촉 때 유비의 편을 든 익주 토착 호족들은 동주병 문제 때문에 협력한 자들이 대부분이다.[5] 양쪽 다 다 제대로 된 전투력이 없는 병림픽을 벌였는데 어쨌든 자기 본거지이고 동기가 강했던 오두미교가 우세를 점했다고 보면 된다.[6] 곽선호는 아예 자신이 이 시대의 어느 군벌(조조, 손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단언했다.[7] 바로 물에 걸어두면 삭아서 매년 수천근의 쇠를 녹여 새로 갈아 끼워야 할 뿐 아니라 오가 뻔히 알고 대비할 게 뻔하니 몰래 만들어서 잘 보관하고 있게 했다. 219년에 호우가 발생하고 북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어디에 써야 할 지 알게 되니까.[8] 병호제는 병사의 질, 소집 속도에선 징병제보다 압도적이나 노예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처우가 열악했다. 로마처럼 일정 기간 지나면 전역 시켜서 토지를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땅뙈기 약간 던져주는 것 말고는 보상은 일절 없는데 복무는 죽거나, 늙어서 쓸모없어질 때까지 종신토록 이어지고 자기 대에 끝나는 게 아니라 대대손손 물려 내려가야 하며 탈영시 일가족 전체를 연좌제로 처벌했다. 이토록 열악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으로 기피 대상, 멸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병호에 속한 자들이 상층부에 반감을 가지는 일이 늘어났다.[9] 북송~청나라까지는 왕조 찬탈이 아니라 전란으로 타국에게 멸망한 사례밖에 없어서 제외다.[10] 유비가 조조 밑에 있던 시절 조조가 유비에게 준 관직인데, 유비는 조조에게 통수친 뒤 좌장군 인장을 들고 가서 한중왕 선포를 해서 허도로 돌려보낼 때까지 잘 우려먹는다.[11] 내마속에서는 사마씨가 그다지 전공을 못 세웠음에도 사마소가 막무가내로 황위를 빼앗았다가 대규모 내분이 일어나 사마염 대에 서진이 멸망했고, 오나라는 이궁지쟁이 안 일어나 손화가 정상적으로 즉위했지만 손화의 아들 손호가 원 역사처럼 막장 폭군이 되어버려 원 역사의 서진 대신 촉한에게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