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4 03:47:16

유비(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color=#fff> 촉한 유비 · 관우 · 장비 · 제갈량 · 방통 · 마초 · 황충 · 장완 · 법정 · 유파 · 황권
조위 조조 · 조비 · 조창 · 조식 · 조인 · 조홍 · 가후 · 정욱 · 사마의 · 우금 · 장합 · 서황 · 전예 · 문빙 · 염행
동오 손권 · 여몽 · 육손 · 반장
<colbgcolor=#000> 기타 등장인물 유장 · 후음
설정 개변된 역사 · 유비의 입촉 · 서량 전쟁 · 유비의 1차 북벌 · 유비의 2차 북벌 }}}}}}}}}

1. 개요2. 특징3. 작중 행적4. 기타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주인공.

원 역사의 유비에게서 모티브를 따왔으나, 유비 본인은 아니고 21세기 한국의 역사학도인 '곽선호'라는 인물이 빙의하여 엄밀히는 타인에 가깝다. 그러나 유비의 지식과 곽선호의 지식이 섞여 있다고 언급되는 만큼 완전한 타인이라기보다는 둘이 합쳐진 존재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2. 특징

빙의자의 특성상 원 역사의 유비와 달리 본인 대에 어떻게든 천하를 통일하거나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야망은 별로 없다. 조조를 저지하려는 이유도 조조의 찬탈 수법이 후대에 나쁜 의미로 선례가 되어 짧게 잡으면 위진남북조시대, 길게 잡으면 오대십국시대까지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1] 이를 '성공 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선호의 평에 따르면 원 역사에서 조비가 헌제의 자리를 찬탈하자마자 유비가 황제가 된 것은 시대적 특성상 헌제가 죽었다는 오보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너무 강해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고 그 힘으로 손권에게 복수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막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조조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헌제의 칙서에 면역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데, 작중 유비는 의대조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시기 중국 호족들 대다수는 조조가 내린 천자의 칙서를 보면 흔들리거나, 이를 명분 삼아 배신하는 등 황제의 명령을 상당히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유비는 그것이 조조의 위조 칙서라고 당당히 주장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이다. 곽선호의 평에 따르면 공무원들이 공문서 무서워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게임으로 비유하면 헌제의 칙서는 네크로맨서의 저주 스킬이고 의대조는 치유 스킬 같은 거라고 한다.

자신의 미래 지식을 원 역사 유비의 '사람 보는 눈'으로 둘러대고 있다. 군사적 역량은 현장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조조나 주유 등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하나 무용을 알아보는 눈과 원 역사처럼 인재를 보는 안목은 최상급으로 언급된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제대로 된 군사적 교육 없이 밑바닥에서 도적이나 군소 세력과 싸우면서 성장한 인물이기 때문에 경험에 기반한 능력이 있긴 하지만 체계적 교육을 받은 건 아니다 보니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워낙 인생 경험이 절절한 만큼 과거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라는 변명도 자주 한다.[2] 오히려 여기에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편.

간절히 작가의 주인공답게 직접적인 군사적 능력보다는 원 역사에서 어떤 시간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계산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끄는 쪽이 특기이다. 그러나 삼국지 대역 전작들의 빌런과 달리 여러 의미로 차원을 달리하는 조조와 희대의 트롤러 손권이 빌런이다 보니 쉽게 풀리지만은 않아 작품의 긴장감은 상당하다. 유비가 여론몰이나 서량 함락으로 크게 한 방 먹였다 싶다가도 조조가 귀신 같이 받아쳐서 기어이 유비 쪽에도 타격을 주는 데다 조조보다 유비에게 더 유감이 많은 손권도 나름 능력자인지라 변수로 작용할만한 움직임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

당대 제일의 민간인 구출, 피난 전문가라고 하며 평생 대장정을 몇 번이고 뛰었던 생존왕이다 보니 도주에 대한 감이 뛰어나다고 한다. 미래 지식 버프를 감안해도 의외로 감이 좋은 인물 중 1명인데 조조와는 방향성에 차이가 있고 상성상 다소 불리한 듯하다. 손권은 내정은 몰라도 외교에서는 그냥 폭탄 같은 타입이지 특별히 감이 좋은 인물은 아니다. 참고로 작중에서 유비와 비슷한 방향의 직감을 가진 인물이 다름 아닌 조식이다.

179화에 따르면 유비의 몸은 엄청난 초강골이라고 하는데 톈진시와 거의 비슷한 위도인 바오딩시 줘저우시 출신이 평생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기후가 다른 남중국에서도 죽어라 싸웠는데, 일반인이면 진작에 악명 높은 풍토병 걸려 쓰러져야 했지만 유비는 그런 거 없었고 말년에도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서서 육손의 오군과 싸우다가 이릉대전의 패배로 화병 들고 나서야 쓰러져 몇 달간 앓다가 죽었다. 젊을 때부터 그리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61세까지 살았던 걸 보면 확실히 강골이 맞다.

3. 작중 행적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학도였던 '곽선호'는 진성 촉빠로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한 후 유장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던 유비에게 빙의했다. 자신이 빙의한 상황을 파악한 이후 당장의 입촉은 장기적으론 악수라고 판단하고, 한중군을 공격해 한중을 차지한 뒤 적극적으로 북중국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곽선호가 학도로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지 않고 익주를 공격한 것은 근본적으로 한중의 장로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후한 말 난세 이후 장로는 오두미도라는 도교 교단을 이끄는 교주이자 군벌이 되어 한중에서만 처박혀 살다 보니 외부에서는 막연하게 황건적의 장각 같은 부류로만 생각할 뿐 장로가 내부적으로 한중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그 군사력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일체 아는 바가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유장이 보낸 익주군이 죄다 한중군에게 처발리다 보니 장로의 군사력이 과대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3] 그러나 장로는 삼국지의 난세 속에서 한중에 처박혀 엄청난 시간과 인력, 물자를 모소하며 하던 일이 도교 경전 편찬일 정도로 통치자보다는 종교인에 가까운 인물로, 군사적으로는 3류 이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장로의 노력으로 원시 도가중국 토속신앙도교라는 체계화된 종교로 완성되어 도교의 주류 교파로 이어지긴 하지만[4] 그런 역사적 의의와 별개로 경전 편찬 집중과 무상복지 정책 때문에 군벌로서는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고[5], 그나마 팔라딘 노릇을 하고 있던 양앙이 제법 군사적 소양이 있었지만,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1년간 허송세월하며 익주를 노릴 준비를 하던 시기라 장로도 안심하고 양앙을 서량에 보내버린 탓에[6] 제대로 된 군사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 한중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유비가 입촉하느라 3년간 허송세월한 사이 중원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기 때문에 입촉한다고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리고 이런 노림수가 딱 맞아떨어져서 한중을 빠르게 장악하는데 성공하지만 장로를 잡는데는 실패했고 장로는 상용으로 도주했다.

다만 여기서 하나 알아둬야 할 것은 익주군이 한중군에게 발린 건 익주군의 전투력이 마냥 허접해서가 아니라 동주병(東州兵)의 패악질과 장병들의 동기 부족 때문이다. 유장의 아버지 유언이 외지에서 익주로 이주해 익주 군벌이 되었을 때 유언은 현지 세력을 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고자 중원 각지의 유랑민들을 모아 동주병을 창설해 이들을 사병으로 삼았고, 동주병들은 수도인 성도에 자리잡으며 현지인들에게 각종 패악질을 벌였다. 유언의 아들인 유장은 동주병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고,[7] 익주 토착민들은 외부에서 건너온 난민 주제에 지배층 행세를 하며 성도에서 패악질을 벌이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8]

동주병의 전투력은 상당하지만 성도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하던 동주병들은 한중 원정에 스스로 나서지 않고 익주 토착민들을 강제로 징발해서 보냈는데, 훈련도 부족한데다 동기까지 부족한 익주 토착민들이 제대로 싸울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대충대충 싸우다 복지국가를 지켜야 하기에 사기가 높은 한중의 오두미도 광신도들에게 발리는 참사가 난 것이다.[9] 그렇기에 원역사의 유비도 동주병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성도 근처부터 꽤 고전했었다. 당시 원역사의 유비를 비롯한 익주 외부세력들은 익주 내부의 동주병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상황에서 유비에 빙의한 곽선호는 삼국지 시대를 석사학위까지 전공한 역사학도로서 이런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고 이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짤 수 있게 된 것이다.[10]

한중을 공략한 이후 마초가 재거병하면서 서량의 조조파와 전쟁을 재개하자 미래 지식을 활용해 황충과 위연이 이끄는 보병 1천명을 군량 수송 인부로 위장시켜 선파견해 천수성 반란을 진압한 뒤 마초의 가족을 구해내고 추가로 6천 병력을 동원해 서량에 진입, 서량 내 친조조파를 완전히 척결한다. 이로서 자신이 은혜를 베푼 마초와 상하관계의 동맹을 맺어 서량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기 시작하고 장리천 전투에서 하후연, 장합이 이끄는 조조군을 물리치며 강족과 저족의 민심을 얻은 덕에 서량 공략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고, 서량의 세력이 모이자 본래 한중으로 온 이유대로 조조의 위공 즉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여론전을 시작한다.

이에 조조가 한중을 흔들기 위해 악진을 보내 상용의 장로를 붙잡으려 하자 관우, 법정과 함께 수로로 상용에 친정해 한 차례 회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뒤 상용 호족들과의 합의하에 물러난다. 관우와 법정의 캐리로 무승부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상용에서 상대한 악진군은 7천이 전부 정예인 반면, 비슷한 규모인 유비군 중 정예라 할 만한 자는 기껏해야 수백이라는 점을 상기하며 정예병을 기를 인력과 물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고 이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명분을 이용하여 다시금 입촉을 준비한다.

상용에서 귀환한 후 유장이 조조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지원하지 않음을 명분삼아 관우와 군을 쪼개 본격적인 입촉에 돌입한다. 지금까지 모인 인재들의 능력을 기반으로 부성, 백마관, 면죽관을 순조롭게 함락시키고 낙성에 이르렀으나 동주병들이 철저히 방비하는 요새를 뚫기가 쉽지 않던 차에 법정이 샛길로 기병대를 침투시켜 교전은 회피하며 성도 인근에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불살라 버리자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을 제시한다. 이 작전은 매우 효과적일게 분명했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유비군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지라 유비군 최고위 지휘관인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면서 답보상태에 놓인다. 이에 유비는 임협집단 시절에 품은 복고적, 이상적 관점을 버릴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고뇌하지만 조조와 사마의의 길의 결과가 팔왕의 난과 중국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온 오호십육국 시대임을 생각해내서 이상적 관점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약탈만 하지 않지 기병으로 성도를 교란하자는 법정의 아이디어 자체는 채택해서 관우와 장비가 그 역할을 맡게 되고 그들이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낙성조차도 떨어트리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유비의 급속팽창을 경계한 손권이 원역사의 익양대치를 시도하면서 낙성에 장비를 남긴채 급히 형남으로 향해야 했지만 미래인으로서 제갈량과 조운, 등지 등을 형남에 배치해 이미 안배를 해둔 상태였고 그 결과 익양대치를 임상대치로 바꾸며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제갈량에게 대별산맥 인근 반조조 세력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오의 두 번째 배신에 대비한 쇠사슬과 쇠막대를 비밀리에 제조한다.[11]

임상대치를 마무리 짓고 촉으로 돌아오기 전 마대가 찾아와 염행이 돌아와서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려 든다는 정보를 전해주자 급히 관우를 서량으로 파견한 뒤 성도로 향한다. 성도로 돌아와 유장의 항복을 받으면서 형남-익주-한중-(서량)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천하의 삼세력 중 하나로 거듭난다.

병사들에게 포상을 뿌리느라 성도 창고가 비어버리자 긴급하게 개시한 민생 대책 논의에선 유파의 직백오수전 발행 건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일방적인 증세가 되지 않도록 익주 토착인사들이 적극 참여하는 익주 개발을 시작했고 군사제도 논의에선 법정이 제안하고 방통, 황권, 장임 등 참모들 전원이 지지한 병호제가 50~100년 후에 가져오는 부작용을 감안해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불리할 것을 감수하더라도 징병제를 실시할 것이며, 병호제로 고통받는 백성들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12]

익주 내정 정비와 한중에서 상용으로 흐르는 물길을 이용하기 위한 수군 육성, 징집된 농민병으로 조조의 정예병에 최대한 오래 버티기 위한 방어 위주 훈련 등으로 바쁜 215년을 보냈고 216년 4월에 있을 조조의 위왕 즉위를 명분 삼아 당해년도 말에 마초와 함께 위수 이북에 자리잡은 염행을 칠 계획을 수립한다. 원 역사에선 217~219년까지 한중에서 치고 받고 그렇게 얻은 한중이 텅 빈 땅이라 219년 집중 호우와 반 조조 반란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염행을 칠 병력 편성을 시작한 가운데 조조와 손권의 움직임을 보고 동오가 배신할 것 같다는 예견을 넌지시 내비쳤으며 이를 쉽게 믿지 않는 참모들을 설득해 최소한 가능성은 있다 정도는 생각하게 만든다.

216년 조조가 서량에 이민족 기병을 투입하며 관우와 마초가 버티기 버거워지자, 황권과 익주군 1만을 먼저 투입, 유비 본인도 군세를 지휘해 친정을 결의하면서 서량 전쟁을 시작한다. 다섯 개의 진군로를 두고 참모, 무장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 할 때 야곡도로 나아가 오장원에 진을 치기로 결정하는데 진을 친 오장원은 주둔과 수비에는 좋지만, 수천에 이르는 오환족 기병들이 위수 일대를 지키고 있어서 쉽게 도하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유비는 삼국시대 석사 출신답게 이 시기 오환족이 강제로 징병되면서 저지르는 온갖 사건사고를 외우고 있었고, 오환왕이 아내를 데리러 주둔지를 떠난 것을 캐치해서,[13] 단숨에 전군을 몰아 도하에 성공하고 진창으로 나아가 하후연과 서황을 참살하고 승리를 거머쥔다.

진창 공방전 승리 이후 조조군 본대가 관중에 이르자 북원으로 향해 그곳에서 장비, 마초 등과 합세해 5만의 군세를 모은 뒤 그 중 1만을 황충과 법정에게 주어 오장원을 지키게 한다. 이후 직접 순찰을 나온 조조를 장비와 마초를 보내 요격케 하며 대치가 장기화되자 경기, 위황의 난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지금은 이를 직접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이 계획을 미루도록 하기 위해 풍등 여론전을 다시금 기획한다.

이를 위해 원 역사의 조만전을 기반으로 경기, 위황의 난과 이후 벌어진 데스 게임을 내용으로 삼는 맹덕전이라는 일종의 도참서를 써서 풍등에 실어 조조군 진영에 날려보냈고 이를 본 조조군이 결국 물러나자 모두 환호하는 와중에도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과 조조의 학정이 시작되면서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기에 홀로 씁쓸해한다.

이후 북원에서 물러나 진창성을 경계로 한 방어선을 짜면서 서량의 통치 방안을 두고 고심하는데 이때 휘하의 무장과 참모들이 한중왕의 직위에 오를 것을 청하자 피로를 핑계로 결정을 미룬 뒤 혼자 남아 진심으로 한중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토로한다. 지금까지 조조의 죽음과 형주 전선의 북벌에 맞춰서 전력을 다해 진격할 작전을 짰는데, 유비가 지금 한중왕이 되어버리면 위나라 내부 헌제 충성파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며 조조가 원하는 판을 만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유비도 과거의 한나라를 그대로 살려낼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개혁을 구상중이었는데, 한중왕에 등극해 유방의 이미지를 잇게 되면 개혁에 제동이 걸릴 것이 뻔한지라 고민이 될 수 밖에 없다. 거기다 한 황실에 충성해도 유비가 한중왕이 되는 걸 바라지 않는 세력들도[14] 있는지라 그들도 봉기시키고 싶던 유비에게 한중왕 자리는 달갑지 않았다. 특히 왕이 되서 유방의 행적을 따른다면 삐끗 한 번 만 해도 조조가 시대를 초월한 영웅인 초세지걸이 되는 상황이라[15] 유비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와준 이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던 유비는 왕의 자리에 오르는 걸 승인하되 이를 한실에 청하는 표문을 올리는 형식을 취해 시간을 벌기로 하고 익주로 귀환한다.

이후 괴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의에서 후계 문제 해결을 위해 유봉을 상용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자 유봉도 자신의 아들이라며 이 문제는 성도에서 논의하자며 사실상 일축시킨다. 한중에 도착했을 때 계속 유봉을 상용에 보내자는 방통과 법정에게 유봉 대신 장완과 방덕이라는 유능한 인재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문제를 강제로 종결시켰다.

한중에서 귀부해온 장로, 신탐과 합류한 뒤 장로는 성도로 같이 가서 기존에 진행하고 있던 경전 집필을 계속 할 것을 지시하고 신탐은 상용태수 직위를 내린 뒤 그가 아들을 볼모로 보내겠다고 하자 받아들인다. 이후 부성에서 유파와 비시, 옹무에게 앞으로 유비 세력이 나아갈 길을 고안해보라고 한다.[16]

218년이 밝자 포원을 찾아 쇠뇌와 원융노를 1년 내에 최대한 많이 만들것을 지시했으며 제갈량에게도 인재들을 다 강릉으로 모으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 유파가 유비에게 촉한왕 겸 복파대장군의 지위에 오를것을 상신하자 기뻐하며 받아들인다.[17]

218년 여름까지 관료들의 관작 부여와 동삼군 장악 등 준비가 끝나자 드디어 북벌을 결의하는데 상용을 통한 루트로 직접 친정할 것을 선언하나 상용의 수로는 대군이 움직이기 힘들며 아직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됐으니 옥체를 살피라는 황권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유비 본인과 여러 참모와 장수들의 수명이 길게 남지 않아서[18] 219년의 대홍수와 반 조조 세력의 거병이 현실적으로 마지막 기회임을 아는 유비는 이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친정을 관철한다.

218년 가을에 접어들 무렵에 7만의 군사를 한중에 모은다. 본래라면 10만 이상을 모으고 싶으나 219년에 맞춰서 출병해야 하고, 한중의 지형상 더 이상 모으기에는 자금 문제도 있어서 일단 이 정도로 끝냈다. 그럼에도 형남에 3만이 넘는 병력이 있으니 도합 10만에 상응하는 병력은 준비한 셈이다. 이후 형주에도 군량을 지원해 만전을 기하다가 양양과 남양군에 모이는 조조군의 수가 어마어마한 것을 보고 조조가 자신의 심리를 읽었음을 깨닫는다. 이에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 직감하고, 순간적인 폭발력이 강한 관우, 장비, 마초가 아닌 정석대로 움직이는 황권을 선봉에 세우기로 한다.

218년 가을에 거병한 이유가 후음의 난과 연계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졌으며[19] 이를 위해 서두르고자 하나 상용의 명사호족들을 달래는 것도 중요했기에 자신이 상용의 호족들을 달래는 동안 마초를 파견해 후음을 지원케한다.

무당현에 상륙한 뒤 마초가 보내온 동리곤과 종자경을 접수하는데 마음 같아선 그들을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유비에게 넘어올 수 있는 조조군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이 조조 밑에서 뭉쳐버릴 게 뻔했기에 일단 포로로 수용한다.

장완과 방덕이 축양현을 점령한 뒤 완성과 양양 중 어디로 갈 것이냐는 법정의 물음에 역사적으로 철옹성임이 입증돼 뚫기가 불가능한 양양 대신 완성을 택한다. 물론 완성 루트도 양양 직행보단 낫다 뿐이지 승리를 보장하는 길은 아니지만 신야의 백성들도 반란을 일으킨 상황인지라 유비에 빙의한 사람으로써 민심을 저버릴 수 없었고 주력을 이끌고 완성으로 향한다.

남양에서의 결전이 다가오는 상황에 주둔지 남쪽에서 호수와 부방이 유비군을 압박하고 있지만, 그들을 먼저 제압할 여력은 없었기에 이들이 원역사에서 관우에게 붙었음을 알고 있던지라 이들을 이용할 계획을 생각한다. 투항한 종자경을 권고 사절로 보내 투항을 받아내려 했으나 둘은 화살로 답한다. 당연히 항복할 줄 알았던 둘이 적대적으로 나오자 살짝 당황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진 않았는지 고민한다.

어쨌든 호수와 부방에 대한 투항 권유가 실패한 상황에서 조홍군이 그들과 합류하기 전에 끌어내 격파하기 위해 방통, 법정의 조언대로 남하해 호수, 부방을 칠 것처럼 유도하고 자연스럽게 끌려온 조홍군의 삼복전법에 팔진도와 유사한 대기병진형으로 대응한다.[20] 이때 본인이 직접 최전방에 있었는데 방통과 관우가 그에게 위험하니 후방으로 가라고 해서 후방으로 향해 전황을 지켜보면서 중군에서 고생하는 관우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수레와 궁노 전술로 승리한 후 완성과 연결해 방어선을 짜나, 조조는 우금, 전예, 만총까지 추가로 투입해 14만 대군으로 유비를 포위하고 정면승부는 피한 채 기습과 보급 차단만 반복했고, 결국 넓은 전선을 감당하지 못해 완성과 후음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해 무당현 주변까지 몰린다. 한중의 2만 군사까지 끌어와 정말 바닥까지 긁어낸 상황이고, 익주의 민심도 불안해지자 아직 희망이 있다던 법정 같은 참모도 점쟁이 장유를 참형하자고 제안하는 와중에 여름 장마가 시작하는 걸 보고 법정을 달랜다.

그리고 219년 가을. 경기와 위황이 유비를 돕기 위해 난을 벌였다가 실패해 업성까지 끌려간 날. 가을 장마가 시작된다. 당시 유비는 남양군에서 군을 유지하는 것조차 한계가 눈에 보일만큼 몰려 있었고 모든 신하들이 퇴각을 종용하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가을 장마의 시작을 맞으면서 수세를 풀고 반격에 나선다.

완성을 구원한 이후 우금군 포로들의 처우를 묻는 제갈량의 서신이 도착하자 역시나 갱살이 주요 여론이 되는 상황에서 고뇌하다 결국 강릉 압송을 지시한다. 그리고 주력군 8만여명을 데리고 남하해 양번을 포위한 제갈량과 합류, 마침내 양번 전역을 포위하고는 조조와의 결전을 준비한다.

퇴각한 조홍과 합류한 관중군 10만 여명이 다시 공세를 펼치자 법정과 황충의 계책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조조의 친정군과 대치한다. 그간 10만이 넘는 조조군을 무찔렀는데도 여전히 20만에 가까운 대군인 데다가 동오의 배신이 전해지면서 제갈량이 2만 군세를 몰고 회군한 상태에 우선 양양으로 만족하고 퇴각하자는 책사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모든 미래지식을 동원하여 조조를 무찌를 것을 다짐한다.

유비가 이미 동오에 대한 대비를 해놨음을 모르는 조조는 여론전으로 유비가 퇴각하는 듯 하자 방심하고 조홍을 다시 출전시켰다가 유비의 매복에 당하고, 조홍을 구하기 위해 장료와 장패를 투입, 유비 역시 조조가 가축과 공성구로 매복병들을 끌어내자 황권과 장임을 보내서 그들을 수습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지던 중 번성의 조인을 나오게 만드는 유인책이 성공, 위연과 방통이 번성에 진입해 만총을 죽이고는 가까스로 성에 돌아온 조인의 반격마저 조운까지 가세해서 끝내 되받아치고 몰아붙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번성을 차지한다.

이후 동오의 통수에 대응하기 위해 장완, 방덕을 이끌고 직접 약국현으로 향해 동오의 주력군을 크게 격파한 뒤 동오군이 문빙이 지키고 있는 석양성을 포위하자 그들끼리 싸우다 서로의 갈등이 극에 달할때 개입하기로 한다. 그리고 일이 잘 돌아가며 문빙의 항복을 얻어내고 동오군이 완전히 물러난 걸 확인하자 바로 양번으로 귀환해 조조와의 정면대결을 준비한다.

그리고 벌어진 정면대결에서 마초가 장합에게 고전하자 방덕을 우선 보낸 뒤 뒤이어 달려오는 조위군 본대와 때맞춰 밀리기 시작한 관우를 보며 이거 조운과 위연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고민하지만 관우는 능히 버틸 수 있으며 조운과 위연이 떨어지는 순간 장패가 달려올 것이라는 모사들의 조언에 이를 관두고 아예 본인이 직접 마초에게 달려가는 작전을 실행한다. 이는 효과적이라 유비의 예상 못한 움직임에 당황한 장패가 황급히 유비를 쫓아오는 걸 진도를 보내 막아내고 자신을 막아선 조진까지 격파한 뒤 그대로 조조에게 쇄도한다.

비록 주령과 조조에게 충성하는 조조군 1세대 장졸들, 장료의 활약으로 조조를 잡는데는 실패하나 남양에서 조위군을 몰아내며 형주를 온전히 장악했고 뒤이어 여남까지 진군하며 이전 관도대전 시기에 여남에서 밀려난 이후 거의 20년만에 중원 땅을 밟으며 자신이 중원에 당도했음을 선언한다.[21]

이후 여남을 평정하고 사례, 예주, 연주, 서주 역시 사실상 장악했으며 황제 구출 및 둔전의 식량 확보를 위해 허도로 진격하나 조위군이 재빨리 움직인 탓에 헌제 구출은 실패하고 둔전 파괴는 막는 수준에 그친다. 어쨌든 중원을 사실상 확보한 상황에서 이제 하북으로 도망간 조위를 먼저 칠지, 뒷통수를 친 동오를 먼저 칠지 고민에 빠지다 장고 끝에 동오로 목표를 잡는다.

하북을 제외한 전 중국 땅을 차지하고도 결국 하북을 넘지 못 한 유유의 사례를 볼 때 조조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백성들의 충성도가 높고 가혹한 징발에서도 예외가 되어 내정도 안정적인 하북을 단시간에 무너뜨리기는 힘들고 시간이 끌다 보면 자신의 수명이 다해 남북으로 끼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 관도에서 승리하고 원소가 사망한 뒤에 하북을 침공한 조조조차 원상에게 역공을 당해 허도로 퇴각하는 등 무척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원가의 내분까지 활용해 승리하긴 했으나 완전히 진압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조씨는 내분이 수면위로 올라오지 않았고 하북의 인마가 크게 소모되지 않고 남아있는 데다 기주를 제외한 3개주의 역량을 온전히 동원할 수 없었던 원소와 달리 4개주 전체의 역량을 동원할 수 있으니(특히나 기병을 쉽게 충원할 수 있는 곳이니) 그보다 오래 걸린다 보는 게 합리적이다.

물론 시간을 들여 내정을 정비할 여유가 있다면 익주, 서량, 북형주를 차지하고 중원까지 석권하게 된 유비가 체급으로 동시에 찍어 누를 수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수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22] 유선의 나이가 너무 어리니 자기 생전에 압도적이고 직관적인 구도를 형성하기 위해 단시간에 군사적 정복이 가능한 강동을 노린다는 용단에 이른 것. 그 외에 조비손권의 수명 차도 있는데, 원 역사 조비는 226년, 손권은 252년에 사망하기 때문에 몇 년 안 가 조비의 요절로 빈틈이 보이게 될 하북보다 정치판이 안정되고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면 252년까지 수비에는 빈틈이 없는 강동이 후임자 입장에서 더 난이도가 높을 것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허도에 건조되어 있던 전선들을 정비하고 형주의 수군까지 더해 남하를 준비한다. 유수구로 나아갈 중원의 수군은 진지 구축에 빼어나고 신중한 제갈량에게 맡겨 지구전으로 버티게 하고 자신이 직접 형주 수군을 이끌고 장강 수로를 따라 동오 깊숙이 친정하기로 한다.

형주군을 주축으로 한 9만 수군에 관우와 문빙을 상장으로 삼아 하구에서 동오의 5만 군사와 대치한다. 하구성을 상대로 공성을 벌이면 고전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대치하면서 장기전을 유도하는 한편 육손과 서성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이간책을 시행한다. 결국 유수구에서 제갈량이 주태를 밀어붙이면서 마음이 급해진 서성이 출격하자, 관우와 문빙을 앞세워 역으로 격파하면서 하구를 점령하고 매복했다가 반격하는 육손과 그에 합류해 저항하는 서성마저 전사시키면서 하구를 장악한다.

이후 아직 국가가 되지못한 동오에 충성하는 서성과 육손 등을 고찰하면서 장강을 타고 동오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건업으로 진군한다. 손권이 매일같이 사신을 보내 협상을 요청하지만 동오가 제대로 나라가 된 원역사에서도 하구를 뚫으면 이미 승부가 끝난 상황임을 아는 데다가, 손권의 의도가 눈에 보였기에 무시하고 사신들의 변명을 들어가며 진군해 건업 앞에 도착한다.

결국 유수구에서 퇴각해 건업에 틀어박힌 손권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하려 할 때 제갈근이 사신으로 와서 선처를 호소한다. 제갈근의 고충을 들은 유비는 보복해준다며 위로했으나 제갈근이 충심을 보이자 온갖 악행을 하면서도 강동 독립에는 진심이던 손권이 적어도 강동에서만은 영웅이 맞다는 걸 실감한다. 어차피 굳이 손권을 죽여 피를 볼 생각은 없던 유비는 안위를 보장하나 손권은 서면 증거까지 요구하고 그 집착에 질려하면서도 회계 북부의 5개 현과 3천 명의 병력까지는 허락하고 그 이상은 손권의 안위를 보장해주지 않겠노라고 경고한다. 손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유비의 강동 정벌은 마무리된다.

유비는 기존의 전한과 후한 체제는 한계에 달했고, 자신의 사후 일어나게 될 이런저런 문제들[23]을 고려해서 미래지식을 활용해서 이를 대신할 새로운 플랜을 제시할 예정이다. 유비의 평에 따르면 이 시기 한나라는 피부고 내장이고 다 썩은 상황이고, 조조도 어떻게든 시대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이것저것 절제 수술하다 역효과가 난 게 영가의 난이라고.

이후 가후의 헌제 암살을 통한 유비의 천자 즉위를 돕는다는 제안에, 이 서신을 태워버리며 거절한다. 사실 유비는 황제 자리 자체가 독이 든 성배라고 여기며 당나라식 절도사 제도를 도입하여 각 지방마다 폭 넓은 자치권을 가지고 미래의 재앙에서 각자도생하는 한편 생존을 위해 필사적일 오호와의 전쟁에 원역사보다는 낫게 싸울 수 있는 미래를 원하고 있었다. 즉 수도인 사례나 화북이 무너진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싸울 희망을 잃지 않는 제도가 필요한 것. 유비 본인의 구상은 세우더라도 현실화를 위해서는 제갈량이나 다른 모사들의 능력이 필수적이라 이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하지만 2차 북벌이 너무 크게 성공하여 조위의 수도 업성까지 함락시키게 되자, 자신이 천자를 죽이면 조창, 조식도 역적의 3족이라 죽임을 당할거라는 가후의 궤변에 넘어간 조비가 양측의 모든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천자 유협을 시해하고 자신도 자결해버려, 결국 유비가 황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

황제가 시해되는 것을 목격한 촉한군이 분노에 눈이 뒤집혀 업성 여기저기서 학살을 벌이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원역사에서 촉한 멸망 이후 벌어진 종회의 난의 여파였던 성도 대학살을 떠올리고 이 기회에 위의 중신들을 모두 난군의 소행으로 위장해 죽여버리기로 결심. 제갈량과 살생부를 만들어 사마의 형제, 유엽, 종요, 왕랑 등을 살해하지만 가후는 한나라 황족들을 모시고 있어 살아남게 된다. 유비는 가후가 수작질을 부린 걸 눈치챘지만 가후 덕분에 후한 황족들이 살아남은 것도 사실이라 결국 죽이지 않았다.[24] 그 와중에 마초는 조조가 마씨 가문 200명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로 조씨 가문 남성 200명을 죽이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가후가 모시고 온 헌목황후 조씨가 역적 조조 일족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헌제의 아들들이 너무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유비에게 선양할 것을 선포하고 항복한 위의 항장들 뿐만 아니라 촉한의 모든 신하들도 이를 받아들일 것을 주청하자 처음에는 현실도피를 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고집을 못 버티고 멘탈이 나가 될 대로 되라며 결국 한나라 황제에 즉위한다.[25] 유비는 일련의 사건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필요 이상으로 위나라 사람들을 죽일 필요는 없고 이미 대숙청을 충분히 돌렸다 판단해 남은 사람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리고 조창, 조식도 생존을 보장해준 뒤 유비의 허락 없이 조씨 200명을 죽인 마초도 풀어주었다. 그러나 마초가 일이 끝나자마자 쓰러지자 결국 운명을 피하지는 못하는 거냐 안타까워하며 마초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위로한다.

마초 별세 소식을 들은 후, 북방 국경을 순시할 겸, 고향 탁군 누상촌을 들를 겸 10만 친군을 거느리고 순행에 나서 고향에 돌아온다. 도원결의를 맺었던 복숭아밭이 전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손수 복숭아나무를 다시 심던 중 뇌출혈이 일어나고 복사꽃이 휘날리는 환시를 보게 되자, 죽음을 직감하고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방통을 고명대신으로 지명하고 유선에게 후일을 당부하며 원 역사처럼 향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어찌 보면 빙의자로서가 아니라 원래 역사의 유비로 돌아온 듯한 최후다.

사후 낙양 동쪽에 안장되었으며 원역사에서처럼 열조 소열제라는 묘호와 시호를 받았다. 사관 진수는 계한서 열조본기에서 유비는 주공 단처럼 한 황실에 충성을 바쳤으나 끝내 바라지도 않던 제위에 올랐으니 이는 제아무리 영웅 유비일지라도 천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라 평했다.

4. 기타

간절히 작가는 이전에도 삼국지 대역을 많이 썼는데[26] 본작의 유비는 최초로 주인공이 유비라는 거물에게 빙의된 사례이다.[27]

설정상 촉빠라는데 관우를 썩 좋게 보지 않고[28] 촉에 대해서 깔 건 제대로 까다 보니 독자들은 촉빠라기보다는 그냥 제갈량빠 같다는 평이 많다.[29] 그렇다고 촉빠가 아닌 건 아닌데 곽선호는 원 역사의 유비와 같은 길을 걷는 이유인 로망을 몇 번이고 언급하면서 유비가 왜 시대의 패배자임에도 21세기까지 문학적, 이념적으로 각광받은 인물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비처럼 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유비처럼 사는 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조조가 논영회에서 말한 대로 시대의 영웅일 수 있었던 것이라고.

기본적으로 외부 세력한테는 조정에게 받은 좌장군으로 호칭된다. 그런데 이 좌장군직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조조다.[30] 원 역사처럼 한중과 파촉을 정복한 뒤 왕위를 자칭할 때 좌장군위는 반환된다.

이 작품이 대체역사고 곽선호의 선택도 역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 많지만 사실 결정 자체들만 보면 원 역사 유비와는 전혀 다른 선택지는 아니고, 유비의 초심을 계속 이어나가는 흐름이다. 유비가 결국 가책을 느끼고 후회하거나 원 역사에서도 정하지 못한 일[31], 유비가 미련을 가졌을 선택지를 고르는 말 그대로의 대체역사물인 셈.

원래의 유비는 허도에서 조조 눈치 보던 당시에는 남이 보든 말든 매일마다 농사 지으며 살았고, 할 일 없이 신야현에 머물 때는 남들이 보든 말든 돗자리나 짜면서 소일거리했다고 하며, 유비에게 곽선호가 빙의당하기 전에도 방통에게 꾀병 부리고 있으니 고기 몰래 갖다 달라고 할 때 말투나 성격을 보면 원래부터 곽선호와 크게 다른 편은 아니었고, 곽선호의 영향을 받은 뒤에도 어디까지나 본래 유비의 연장선임을 암시하는 모습이 많다. 애초에 유비는 유씨 집성촌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사실상 평민으로 큰 데다가, 시골 조폭 노릇 하다 황건적 토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용병단 두목이 되어 전국을 떠돈 끝에 군벌이 된 성장 내력 때문에 말투가 천박해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당장 유비의 조상인 유방도 말투가 천박하기로 악명 높았다.

작가의 전작 아! 내가 마속이다의 주인공 마속이 죽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촉한서진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했다는 에필로그 설정이 있었지만 본작에서는 사마의나 손권, 가후 등, 흔히 위험 인물로 꼽히는 후반부 인물들이 빠르게 죽거나 몰락해버린 한편, 유비가 선양을 받아서 다시 한을 재건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일러스트의 이미지가 굉장히 젊다. 대충 봐도 30대 정도로 실제 연령인 50대와는 20년 가까운 차이가 있어 보인다. 빙의한 유비의 육신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선호의 영혼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 같다는 평이다.

간절히 작품 주인공들의 빙의체 중 최고령 빙의체이다. 지금까지의 간절히의 작품을 보면 주인공의 빙의 대상들은 스타팅 시점에서 많아봐야 30대 중반 정도로 40대를 넘은 적이 없는데 이번 작 유비는 시작 년도인 213년에 이미 50세를 넘은 상태다.[32] 또한 간절히 작품 중 시작부터 한 세력의 실권까지 거머쥔 지도자 스타팅이라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33]

곽선호가 논란은 있어도 단순한 천하통일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겹쳐서 곽선호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반전이 일어난다. 독자들의 눈치를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원작 삼국지연의의 테마처럼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1] 송나라 이후부터는 청나라가 제정 폐지로 멸망할 때까지 왕조 찬탈이 아니라 전란으로 멸망한 사례밖에 없으며(명나라는 타국은 아니지만 내전으로 멸망해서 찬탈은 아니다) 신해혁명도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된 거라 찬탈의 사례에 들어가지 않는다.[2] 유주 출신이라 오환족의 풍습을 잘 안다, 조조랑 같이 있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들의 작전을 잘 안다 등.[3] 유비뿐만 아니라 조조도 한중 공격을 나름 늦췄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4] 심지어 오두미도 역시 천사도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5] 군대로 들어가야 할 돈이 복지 정책에 들어가기 때문. 당시 후한 군벌들 대다수가 군사력에 상당한 투자를 하던걸 생각하면 한중의 군사력은 자연스레 딸릴수밖에 없다.[6] 서량의 호족 집단이 마초를 대표로 세워 조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로가 한중의 안보를 위해 서량 호족들을 지원하고자 파견했다.[7] 유장이 집권한 이유가 동주병들이 가장 꼭두각시로 부리기 좋았던 인물이 그였기 때문이다.[8] 유비의 입촉 때 유비의 편을 든 익주 토착 호족들은 동주병 문제 때문에 협력한 자들이 대부분이다.[9] 양쪽 다 다 제대로 된 전투력이 없는 병림픽을 벌이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는 방어전을 치루고 있는지라 전투 동기가 충분히 높던 오두미도 세력이 우세를 점했다고 보면 된다.[10] 곽선호는 아예 자신이 이 시대의 어느 군벌(조조, 손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단언했다.[11] 바로 물에 걸어두면 삭아서 매년 수천근의 쇠를 녹여 새로 갈아 끼워야 할 뿐 아니라 오가 뻔히 알고 대비할 게 뻔하니 몰래 만들어서 잘 보관하고 있게 했다. 이후 219년에 호우가 발생하고 북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어디에 써야 할 지 알게 되리라고 덧붙였다.[12] 병호제는 병사의 질, 소집 속도에선 징병제보다 압도적이나 노예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처우가 열악했다. 로마처럼 일정 기간 지나면 전역 시켜서 토지를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땅뙈기 약간 던져주는 것 말고는 보상은 일절 없는데 복무는 죽거나, 늙어서 쓸모없어질 때까지 종신토록 이어지고 자기 대에 끝나는 게 아니라 대대손손 물려 내려가야 하며 탈영시 일가족 전체를 연좌제로 처벌했다. 이토록 열악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으로 기피 대상, 멸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병호에 속한 자들이 상층부에 반감을 가지는 일이 늘어났다. 거기다 연좌제를 이용한 공포정치도 20년이 넘자 한계가 와서 작중 초반 시점으로 가면 병사들이 가족들이 죽든 말든 개의치 않고 대규모로 탈영하는 일이 잦아져 그 조조가 탈영병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끝에 탈영법 개정까지 했을 정도였고,[34] 전시 계엄령 체제나 다름없는 병호제를 너무 오래 고수한 것은 영가의 난의 원인 중 하나로도 평가받는다.[13] 물론 휘하 군사들에겐 유비 본인이 유주에서 자라서 오환족과 가까이서 산 덕에 군기가 해이해진 걸 눈치챘다고 둘러댔다.[14] 헌제 및 기존의 한실 충성파. 이들 입장에선 유비가 한중왕이 되면 헌제의 입지가 약해지는 데다가, 설령 유비가 이겨도 헌제파인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15] 원역사의 조조가 유비를 형주 공방전에서 물리치면서 실현된 일이기도 하며 이는 정사 삼국지에 적혀있는 평가다.[16] 이 셋은 유비의 천자 즉위를 반대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즉, 미래를 아는 곽선호에게는 이만한 인선이 없는 것. 마침 이 셋이 고위 관료 유파, 중급 간부 비시, 하급 실무직 옹무라는 일종의 팀을 만들기 딱 좋은 조합이기도 했다.[17] 우선 촉한왕이라는 칭호는 왕을 칭하되 우리는 지방 정권이라는 점을 어필할 수 있기에 중원 명사 호족들의 반감을 누그러트릴 수 있고, 복파대장군은 한 왕조 충신의 대명사인 복파장군이라는 칭호에서 따온 것이라 이를 칭하면 이후 복파장군의 칭호를 버리고 위나라 관직을 청한 하후돈의 퍼포먼스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8] 관우, 장비, 방통, 장임은 비자연사고 유비와 마초도 극심한 스트레스가 몸 상태를 악화 시켰을 가능성이 높기에 역사가 바뀌면서 수명이 조금이나마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다들 계속 험난한 전장에서 굴러온 상황이라 몸은 계속 소모되는데 이 시대의 의학 수준도 현대에 비해선 떨어지기에 장수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법정이나 황충은 이들과 다르게 순수하게 침상에서 죽은 거라 원 역사대로 갈 가능성이 크다.[19] 217년에 경기, 위황의 난을 연기시키기 위해서 맹덕전을 퍼뜨린 일 때문에 후음이 똑같이 거병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고, 최소한 유비군이 출진하면 누군가는 호응해주리라 믿고서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후음은 정작 유비군이 한중에서 출병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묘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력하게 죽지는 않겠다는 저항 의식으로 궐기했다.[20] 징집 보병들이 수레와 강노로 활용해 기병 전력에서 월등한 적을 상대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렴진화한 것. 서량을 흡수해 기병 전력이 어느 정도 채워진 덕분에 정말 한줌의 기병 뿐이었던 제갈량의 팔진도보다 훨씬 강력하다.[21] 독자들은 실패하면 뒤가 없다는 이유로 직접 최전선에서 싸우며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노력한 유비와 달리 조조는 마지막까지 후임을 걱정해서 결정적일 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승패를 갈랐다고 평했다.[22] 말년의 심로가 없으니 더 살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1, 2년 정도. 이것도 긍정적으로 본 케이스다.[23] 설령 유비 사후 촉한이 천하통일을 해도 소빙하기와 그로 인한 오호의 대이동은 막을 수 없다.[24] 이 시점에서 가후 수명은 1년밖에 안 남았고 가후의 후손들도 가후가 사고 친 것 때문에 별로 영달하지 못했다.[25] 일부 독자들이 유협의 아들을 즉위시키고 섭정이라도 해야지 이게 찬탈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가후가 후한 황족들을 세뇌해서 꾸민 수작질이긴 하지만 어차피 이 시점에서 즉위할 만한 권위를 가진 후한 황족은 남아있지 않았다. 조절의 아들은 조비가 대형사고를 쳐서 논외고 유협의 서자들도 별다른 힘이 없는 데다 생존한 후한의 방계 황족들은 존재감이 공기에 가까웠다. 제갈량, 방통을 비롯한 유비의 신하들도 일찍부터 유비가 뭔 생각을 하든 유비를 황제로 올리고 싶어하는 낌새를 보이기도 했기에 사실상 헌제의 아들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중에서 사건 당시에만 묘사된 바가 있긴 하지만, 촉한의 북벌이 대역전승을 거두게 한 근원인 대홍수로 인해 유비 세력 내에서도 한중왕 칭호를 반대하던 유파 등도 천명이 유비를 향하고 있음을 시사하였으며 조위 골수세력들은 유비가 친히 살생부를 통해 숙청한 마당이다. 또한 경기와 위황 등이 219년(원 역사에서는 218년 정월에 사망했으나 유비의 공작으로 늦춰짐)에 사망하면서 조조에 의해 황실에 충성하지만 유비에 반대할 여지가 있던 세력들도 싹 쓸려나갔기에 헌제의 아들들에 대한 지지기반은 없다시피했다.[26] 당장 데뷔작이 삼국지 풍운을 삼키다라는 삼국지 대역이며 지금까지 유료화된 9개작 중 4개가 삼국지 소재다.(그외에는 조선 소재 2개(봉포, 전생런), 백제 소재 1개(백이잇), 후삼국 소재 1개(CM29), 중국 전국시대 소재(헉조괄) 1개다.)[27] 삼국지 풍운을 삼키다, 삼국지 팽월전은 가상인물에 빙의되었으며 내마속은 네임드인 마속에 빙의하긴 했지만 마속은 거물급으로 여겨지진 않는다.[28]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관우에 대해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한다.[29] 작가의 전작 내마속은 제갈량이 진 주인공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제갈량 위주로 초인적인 능력, 감동적인 장면이 묘사되었다. 웃긴 건 주인공 마속 또한 간절히의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잘난 인물이다.[30] 유비가 조조 밑에 있던 시절 조조가 유비에게 준 관직인데, 유비는 조조에게 통수친 뒤 좌장군 인장을 들고 가서 한중왕 선포를 해서 허도로 돌려보낼 때까지 잘 우려먹는다. 물론 조조는 통수를 맞고난 뒤 바로 유비를 좌장군에서 잘랐긴 했지만 유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장을 잘 써먹었다.[31] 정치적인 논리 탓에 이루어진 양자 유봉의 숙청, 입촉 이후 동주병이라는 병호제와 유사한 제도를 써먹지 못하거나, 관우가 무리해서 우금군 포로들을 보살핀 일들.[32] 최고령 주인공은 삼국지 팽월전의 팽월이다.[33] 간절히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인공 본인이 지도자 스타팅을 하기보단 지도자는 따로 있고 주인공은 그 아랫사람인 경우가 많다. 군주 스타팅으로는 봉포의 인종도 있긴 하지만 스타팅 시점에서 실권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쥐고 있는 상태라 온전한 지도자 스타팅이라 보긴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