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주인공.원 역사의 유비에게서 모티브를 따왔으나, 유비 본인은 아니고 21세기 한국의 역사학도인 '곽선호'라는 인물이 빙의하여 엄밀히는 타인에 가깝다. 그러나 유비의 지식과 곽선호의 지식이 섞여 있다고 언급되는 만큼 둘이 합쳐진 존재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2. 특징
빙의자의 특성상 원 역사의 유비와 달리 본인 대에 어떻게든 천하를 통일하거나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야망은 별로 없다. 조조를 저지하려는 이유도 조조의 찬탈 수법이 후대에 나쁜 의미로 선례가 되어 짧게 잡으면 위진남북조시대, 길게 잡으면 오대십국시대까지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1] 이를 '성공 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조조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헌제의 칙서에 면역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데, 작중 유비는 의대조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시기 중국 호족들 대다수는 조조가 내린 천자의 칙서를 보면 흔들리거나, 이를 명분 삼아 배신하는 등 황제의 명령을 상당히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유비는 그것이 조조의 위조 칙서라고 당당히 주장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미래 지식을 원 역사 유비의 '사람 보는 눈'으로 둘러대고 있다. 군사적 역량은 현장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조조나 주유 등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하나 무용을 알아보는 눈과 원 역사처럼 인재를 보는 안목은 최상급으로 언급된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제대로 된 군사적 교육 없이 밑바닥에서 도적이나 군소 세력과 싸우면서 성장한 인물이기 때문에 경험에 기반한 능력이 있긴 하지만 체계적 교육을 받은 건 아니다 보니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워낙 인생경험이 절절한만큼 과거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라는 변명도 자주한다. 오히려 여기에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편.[2]
간절히 작가의 주인공답게 직접적인 군사적 능력보다는 원 역사에서 어떤 시간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계산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끄는 쪽이 특기이다. 그러나 삼국지 대역 전작들의 빌런과 여러 의미로 차원을 달리하는 조조와 희대의 트롤러 손권이 빌런이다 보니 쉽게 풀리지만은 않아 작품의 긴장감은 상당하다. 유비가 여론몰이나 서량 함락으로 크게 한 방 먹였다 싶다가도 조조가 귀신 같이 받아쳐서 기어이 유비 쪽에도 타격을 주는 데다 조조보다 유비에게 더 유감이 많은 손권도 나름 능력자인지라 변수로 작용할만한 움직임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
3. 작중 행적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학도였던 '곽선호'는 진성 촉빠로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한 후 유장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던 유비에게 빙의했다. 자신이 빙의한 상황을 파악한 이후 당장의 입촉은 장기적으론 악수라고 판단하고, 한중군을 공격해 한중을 차지한 뒤 적극적으로 북중국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한다.곽선호가 학도로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지 않고 익주를 공격한 것은 근본적으로 한중의 장로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후한 말 난세 이후 장로는 오두미도라는 도교 교단을 이끄는 교주이자 군벌이 되어 한중에서만 처박혀 살다 보니 외부에서는 막연하게 황건적의 장각 같은 부류로만 생각할 뿐 장로가 내부적으로 한중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그 군사력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일체 아는 바가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유장이 보낸 익주군이 죄다 한중군에게 처발리다 보니 장로의 군사력이 과대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3] 그러나 장로는 삼국지의 난세 속에서 한중에 처박혀 엄청난 시간과 인력, 물자를 모소하며 하던 일이 도교 경전 편찬일 정도로 통치자보다는 종교인에 가까운 인물로, 군사적으로는 3류 이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장로의 노력으로 원시 도가와 중국 토속신앙이 도교라는 체계화된 종교로 완성되어 도교의 주류 교파로 이어지긴 하지만[4] 그런 역사적 의의와 별개로 경전 편찬 집중과 무상복지 정책 때문에 군벌로서는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고[5], 그나마 팔라딘 노릇을 하고 있던 양앙이 제법 군사적 소양이 있었지만,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1년간 허송세월하며 익주를 노릴 준비를 하던 시기라 장로도 안심하고 양앙을 서량에 보내버린 탓에[6] 제대로 된 군사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 한중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유비가 입촉하느라 3년간 허송세월한 사이 중원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기 때문에 입촉한다고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리고 이런 노림수가 딱 맞아떨어져서 한중을 빠르게 장악하는데 성공하지만 장로를 잡는데는 실패했고 장로는 상용으로 도주했다.
다만 여기서 하나 알아둬야 할 것은 익주군이 한중군에게 발린 건 익주군의 전투력이 마냥 허접해서가 아니라 동주병(東州兵)의 패악질과 장병들의 동기 부족 때문이다. 유장의 아버지 유언이 외지에서 익주로 이주해 익주 군벌이 되었을 때 유언은 현지 세력을 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고자 중원 각지의 유랑민들을 모아 동주병을 창설해 이들을 사병으로 삼았고, 동주병들은 수도인 성도에 자리잡으며 현지인들에게 각종 패악질을 벌였다. 유언의 아들인 유장은 동주병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고,[7] 익주 토착민들은 외부에서 건너온 난민 주제에 지배층 행세를 하며 성도에서 패악질을 벌이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8]
동주병의 전투력은 상당하지만 성도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하던 동주병들은 한중 원정에 스스로 나서지 않고 익주 토착민들을 강제로 징발해서 보냈는데, 훈련도 부족한데다 동기까지 부족한 익주 토착민들이 제대로 싸울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대충대충 싸우다 복지국가를 지켜야 하기에 사기가 높은 한중의 오두미도 광신도들에게 발리는 참사가 난 것이다.[9] 그렇기에 원역사의 유비도 동주병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성도 근처부터 꽤 고전했었다. 당시 원역사의 유비를 비롯한 익주 외부세력들은 익주 내부의 동주병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상황에서 유비에 빙의한 곽선호는 삼국지 시대를 석사학위까지 전공한 역사학도로서 이런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고 이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짤 수 있게 된 것이다.[10]
한중을 공략한 이후 마초가 재거병하면서 서량 내 친조조파와 전쟁을 재개하자 미래 지식을 활용해 황충과 위연이 이끄는 보병 1천명을 군량 수송 인부로 위장시켜 선파견해 천수성 반란을 진압한 뒤 마초의 가족을 구해내고 추가로 6천 병력을 동원해 서량에 진입, 서량 내 친조조파를 완전히 척결한다. 이후 자신이 은혜를 베푼 마초와 상하관계의 동맹을 맺어 서량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는데 장리천 전투에서 하후연, 장합이 이끄는 조조군을 물리치며 강족과 저족의 민심을 얻은 덕에 서량 공략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고, 서량의 세력이 모이자 본래 한중으로 온 이유대로 조조의 위공 즉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여론전을 시작한다.
이에 조조가 한중을 흔들기 위해 악진을 보내 상용의 장로를 손아귀에 넣으려하자 관우, 법정과 함께 수로로 상용에 친정, 한 차례 회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뒤 상용 호족들과의 합의하에 물러난다. 관우와 법정의 캐리로 무승부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상용에서 상대한 악진군은 7천이 전부 정예인 반면, 비슷한 규모인 유비군 중 정예라 할 만한 자는 기껏해야 수백이라는 점을 상기하며 정예병을 기를 인력과 물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고 이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명분을 이용하여 다시금 입촉을 준비한다.
상용에서 귀환한 후 유장이 조조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지원하지 않음을 명분삼아 관우와 군을 쪼개 본격적인 입촉에 돌입한다. 지금까지 모인 인재들의 능력을 기반으로 부성, 백마관, 면죽관을 순조롭게 함락시키고 낙성에 이르렀으나 동주병들이 철저히 방비하는 요새를 뚫기가 쉽지 않던 차에 법정이 샛길로 기병대를 침투시켜 교전은 회피하며 성도 인근에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불살라 버리자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을 제시한다. 이 작전은 매우 효과적일게 분명했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유비군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지라 유비군 최고위 지휘관인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면서 답보상태에 놓인다. 이에 유비는 임협집단 시절에 품은 복고적, 이상적 관점을 버릴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고뇌하지만 조조와 사마의의 길의 결과가 팔왕의 난과 중국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온 오호십육국 시대임을 생각해내서 이상적 관점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약탈만 하지 않지 기병으로 성도를 교란하자는 법정의 아이디어 자체는 채택해서 관우와 장비가 그 역할을 맡게 되고 그들이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낙성조차도 떨어트리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유비의 급속팽창을 경계한 손권이 원역사의 익양대치를 시도하면서 낙성에 장비를 남긴채 급히 형남으로 향해야 했지만 미래인으로서 제갈량과 조운, 등지 등을 형남에 배치해 이미 안배를 해둔 상태였고 그 결과 익양대치를 임상대치로 바꾸며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제갈량에게 대별산맥 인근 반조조 세력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오의 두 번째 배신에 대비한 쇠사슬과 쇠막대를 비밀리에 제조한다.[11]
임상대치를 마무리 지은 상황에서 마대가 찾아와 염행이 돌아와서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려 든다는 정보를 전해주자 급히 관우를 서량으로 파견한 뒤 성도로 향한다. 성도로 돌아와 유장의 항복을 받으면서 형남-익주-한중-(서량)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천하의 삼세력 중 하나로 거듭난다. 이후 익주 내 민생 대책 논의에선 유파의 직백오수전 발행 건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일방적인 증세가 되지 않도록 익주 토착인사들이 적극 참여하는 익주 개발을 시작했고 군사제도 논의에선 법정이 제안하고 방통, 황권, 장임 등 참모들 전원이 지지한 병호제가 50~100년 후에 가져오는 부작용을 감안해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불리할 것을 감수하더라도 징병제를 실시할 것이며, 병호제로 고통받는 백성들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12]
익주 내정 정비와 한중에서 상용으로 흐르는 물길을 이용하기 위한 수군 육성, 징집된 농민병으로 조조의 정예병에 최대한 오래 버티기 위한 방어 위주 훈련 등으로 바쁜 215년을 보냈고 216년 4월에 있을 조조의 위왕 즉위를 명분 삼아 당해년도 말에 마초와 함께 위수 이북에 자리잡은 염행을 칠 계획을 수립한다. 원 역사에선 217~219년까지 한중에서 치고 받고 그렇게 얻은 한중이 텅 빈 땅이라 219년 집중 호우와 반 조조 반란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염행을 칠 병력 편성을 시작한 가운데 조조와 손권의 움직임을 보고 동오가 배신할 것 같다는 예견을 넌지시 내비쳤으며 이를 쉽게 믿지 않는 참모들을 설득해 최소한 가능성은 있다 정도는 생각하게 만든다.
216년 조조가 서량에 이민족 기병을 투입하며 관우와 마초가 버티기 버거워지자, 황권과 익주군 1만을 먼저 투입, 유비 본인도 군세를 지휘해 친정을 결의하면서 서량 전쟁을 시작한다. 다섯 개의 진군로를 두고 참모, 무장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 할 때 야곡도로 나아가 오장원에 진을 치기로 결정하는데 진을 친 오장원은 주둔과 수비에는 좋지만, 수천에 이르는 오환족 기병들이 위수 일대를 지키고 있어서 쉽게 도하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유비는 삼국시대 석사 출신답게 이 시기 오환족이 강제로 징병되면서 저지르는 온갖 사건사고를 외우고 있었고, 오환왕이 아내를 데리러 주둔지를 떠난 것을 캐치해서,[13] 단숨에 전군을 몰아 도하에 성공하고 진창으로 나아가 하후연과 서황을 참살하고 승리를 거머쥔다.
진창 공방전 승리 이후 조조군 본대가 관중에 이르자 북원으로 향해 그곳에서 장비, 마초 등과 합세해 5만의 군세를 모은 뒤 그 중 1만을 황충과 법정에게 주어 오장원을 지키게 한다. 이후 직접 순찰을 나온 조조를 장비와 마초를 보내 요격케 하며 대치가 장기화 되자 경기, 위황의 난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지금은 이를 직접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이 계획을 미루도록 하기 위해 풍등 여론전을 다시금 기획한다.
이를 위해 원역사의 조만전을 기반으로 경기, 위황의 난과 이후 벌어진 데스 게임을 내용으로 삼는 맹덕전이라는 일종의 도참서를 써서 풍등에 실어 조조군 진영에 날려보냈고 이를 본 조조군이 결국 물러나자 모두 환호하는 와중에도 이후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기에 홀로 씁쓸해한다.
이후 북원에서 물러나 진창성을 경계로 한 방어선을 짜면서 서량의 통치 방안을 두고 고심하는데 이때 휘하의 무장과 참모들이 한중왕의 직위에 오를 것을 청하자 피로를 핑계로 결정을 미룬 뒤 혼자 남아 진심으로 한중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토로한다. 지금까지 조조의 죽음과 형주 전선의 북벌에 맞춰서 전력을 다해 진격할 작전을 짰는데, 유비가 지금 한중왕이 되어버리면 위나라 내부 반조조파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며 조조가 원하는 판을 만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유비도 과거의 한나라를 그대로 살려낼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개혁을 구상중이었는데, 한중왕에 등극해 유방의 이미지를 잇게 되면 개혁에 제동이 걸릴 것이 뻔한지라 고민이 될 수 밖에 없다. 거기다 한 황실에 충성해도 유비가 한중왕이 되는 걸 바라지 않는 세력들도[14] 있는지라 그들도 봉기시키고 싶던 유비에게 한중왕 자리는 달갑지 않았다. 특히 왕이 되서 유방의 행적을 따른다면 삐끗 한 번 만 해도 조조가 시대를 초월한 영웅인 초세지걸이 되는 상황이라[15] 유비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와 준 이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던 유비는 왕의 자리에 오르는 걸 승인하되 이를 한실에 청하는 표문을 올리는 형식을 취해 시간을 버는 방안을 채택한다.
이후 괴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의에서 후계 문제 해결을 위해 유봉을 상용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자 유봉도 자신의 아들이라며 이 문제는 성도에서 논의하자며 사실상 일축시킨다. 한중에 도착했을 때 계속 유봉을 상용에 보내자는 방통과 법정에게 유봉 대신 장완과 방덕이라는 유능한 인재들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한중에서 귀부해온 장로, 신탐과 합류한 뒤 장로는 성도로 같이 가서 기존에 진행하고 있던 경전 집필을 계속 할 것을 지시하고 신탐은 상용태수 직위를 내린 뒤 그가 아들을 볼모로 보내겠다고 하자 받아들인다. 이후 부성에서 유파와 비시, 옹무에게 앞으로 유비 세력이 나아갈 길을 고안해보라고 한다.[16]
218년이 밝자 포원을 찾아 쇠뇌와 원융노를 1년 내에 최대한 많이 만들것을 지시했으며 제갈량에게도 인재들을 다 강릉으로 모으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 유파가 유비에게 촉한왕 겸 복파대장군의 지위에 오를것을 상신하자 기뻐하며 받아들인다.[17]
218년 여름까지 관료들의 관작 부여와 동삼군 장악 등 준비가 끝나자 드디어 북벌을 결의하는데 상용을 통한 루트로 직접 친정할 것을 선언하나 상용의 수로는 대군이 움직이기 힘들며 아직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됐으니 옥체를 살피라는 황권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유비 본인과 여러 참모와 장수들의 수명이 길게 남지 않아서[18] 219년의 대홍수와 반 조조 세력의 거병이 현실적으로 마지막 기회임을 아는 유비는 친정을 관철한다.
218년 가을에 접어들 무렵에 7만의 군사를 한중에 모은다. 본래라면 10만 이상을 모으고 싶으나 219년에 맞춰서 출병해야 하고, 한중의 지형상 더 이상 모으기에는 자금 문제도 있어서 일단 이 정도로 끝냈다. 그럼에도 형남에 3만이 넘는 병력이 있으니 도합 10만에 상응하는 병력은 준비한 셈이다. 이후 형주에도 군량을 지원해 만전을 기하다가 양양과 남양군에 모이는 조조군의 수가 어마어마한 것을 보고 조조가 자신의 심리를 읽었음을 깨닫는다. 이에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 직감하고, 순간적인 폭발력이 강한 관우, 장비, 마초가 아닌 정석대로 움직이는 황권을 선봉에 세우기로 한다.
218년 가을에 거병한 이유가 후음의 난과 연계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졌으며[19] 이를 위해 서두르고자 하나 상용의 명사호족들을 달래는 것도 중요했기에 자신이 상용의 호족들을 달래는 동안 마초를 파견해 후음을 지원케한다.
무당현에 상륙한 뒤 마초가 보내온 동리곤과 종자경을 접수하는데 마음 같아선 그들을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유비에게 넘어올 수 있는 조조군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이 조조 밑에서 뭉쳐버릴 게 뻔했기에 일단 포로로 수용한다.
장완과 방덕이 축양현을 점령한 뒤 완성과 양양 중 어디로 갈 것이냐는 법정의 물음에 역사적으로 철옹성임이 입증돼 뚫기가 불가능한 양양 대신 완성을 택한다. 물론 완성 루트도 양양 직행보단 낫다 뿐이지 승리를 보장하는 길은 아니지만 신야의 백성들도 반란을 일으킨 상황인지라 유비에 빙의한 사람으로써 민심을 저버릴 수 없었고 주력을 이끌고 완성으로 향한다.
남양에서의 결전이 다가오는 상황에 주둔지 남쪽에서 호수와 부방이 유비군을 압박하고 있지만, 그들을 먼저 제압할 여력은 없었기에 이들이 원역사에서 관우에게 붙었음을 알고 있던지라 이들을 이용할 계획을 생각한다. 투항한 종자경을 권고 사절로 보내 투항을 받아내려 했으나 둘은 화살로 답한다. 당연히 항복할줄 알았던 둘이 적대적으로 나오자 살짝 당황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진 않았는지 고민한다.
조홍의 군세가 그들과 합류하기 전에 끌어내 격파하기 위해 방통, 법정의 조언대로 남하해 호수, 부방을 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고 자연스럽게 끌려온 조홍군의 삼복전법에 팔진도와 유사한 대기병진형으로 대응한다.[20] 이때 본인이 직접 최전방에 있었는데 방통과 관우가 그에게 위험하니 후방으로 가라고 해서 후방으로 향해 전황을 지켜보면서 중군에서 고생하는 관우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수레와 궁노 전술로 승리한 후 완성과 연결해 방어선을 짜나, 조조는 우금, 전예, 만총까지 추가로 투입해 14만 대군으로 유비를 포위하고 정면승부는 피한 채 기습과 보급 차단만 반복했고, 결국 넓은 전선을 감당하지 못해 완성과 후음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해 무당현 주변까지 몰린다. 한중의 2만 군사까지 끌어와 정말 바닥까지 긁어낸 상황이고, 익주의 민심도 불안해지자 아직 희망이 있다던 법정 같은 참모도 점쟁이 장유를 참형하자고 제안하는 와중에 여름 장마가 시작하는 걸 보고 법정을 달랜다.
그리고 219년 가을. 경기와 위황이 유비를 돕기 위해 난을 벌였다가 실패해 업성까지 끌려간 날. 가을 장마가 시작된다. 당시 유비는 남양군에서 군을 유지하는 것조차 한계가 눈에 보일만큼 몰려 있었고 모든 신하들이 퇴각을 종용하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가을 장마의 시작을 맞으면서 수세를 풀고 반격에 나선다.
완성을 구원한 이후 우금군 포로들의 처우를 묻는 제갈량의 서신이 도착하자 역시나 갱살이 주요 여론이 되는 상황에서 끝내 강릉 압송을 지시한다. 그리고 주력군 8만여명을 데리고 남하해 양번을 포위한 제갈량과 합류, 마침내 양번 전역을 포위하고는 조조와의 결전을 준비한다.
퇴각한 조홍과 합류한 관중군 10만여명이 다시 공세를 펼치자 법정과 황충의 계책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조조의 친정군과 대치한다. 약 20만에 가까운 대군인 데다가 동오의 배신이 전해지면서 제갈량이 2만 군세를 몰고 회군한 상태에 우선 퇴각하자는 책사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모든 미래지식을 동원하여 조조를 무찌를 것을 다짐한다.
유비가 이미 동오에 대한 대비를 결정했음을 모르는 조조는 여론전으로 유비가 퇴각하는 듯 하자 방심하고 조홍을 다시 출전시켰다가 유비의 매복에 당하고, 조홍을 구하기 위해 장료와 장패를 투입, 유비 역시 조조가 가축과 공성구로 매복병들을 끌어내자 황권과 장임을 보내서 그들을 수습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지던 중.. 번성의 조인을 나오게 만드는 유인책이 성공, 위연과 방통이
4. 기타
간절히 작가는 이전에도 삼국지 대역을 많이 썼는데[21] 본작의 유비는 최초로 주인공이 유비라는 거물에게 빙의된 사례이다.[22]설정상 촉빠라는데 관우를 썩 좋게 보지 않고[23] 촉에 대해서 깔 건 제대로 까다보니 독자들은 촉빠라기보다는 그냥 제갈량빠같다는 평이 많다.[24]
기본적으로 외부 세력한테는 조정에게 받은 좌장군으로 호칭된다. 그런데 이 좌장군직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조조다.[25] 빙의 이전의 유비도 할 일 없이 신야현에 머물 때는 남들이 보든 말든 돗자리나 짜면서 소일거리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대체역사고 곽선호의 선택도 역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 많지만 사실 결정 자체들만 보면 원 역사 유비와는 전혀 다른 선택지는 아니고, 유비의 초심을 계속 이어나가는 흐름이다.
유비가 결국 가책을 느끼고 후회하거나 원 역사에서도 정하지 못한 일[26], 유비가 미련을 가졌을 선택지를 고르는 말 그대로의 대체 역사물인 셈. 유비가 곽선호에게 빙의당하기 전에도 방통에게 꾀병 부리고 있으니 고기 몰래 갖다 달라고 할 때 말투나 성격을 보면 원래부터 곽선호와 크게 다른 편은 아니었고, 곽선호의 영향을 받은 뒤에도 어디까지나 본래 유비의 연장선임을 암시하는 모습이 많다. 애초에 유비는 유씨 집성촌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사실상 평민으로 큰 데다가, 시골 조폭 노릇 하다 황건적 토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용병단 두목이 되어 전국을 떠돈 끝에 군벌이 된 성장 내력 때문에 말투가 천박해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당장 유비의 조상인 유방도 말투가 천박하기로 악명 높았다.
작가의 전작 아! 내가 마속이다의 주인공 마속이 죽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촉한이 서진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했다는 에필로그 설정과[27] 조조, 유비의 나이 문제 때문에 본작의 유비도 사후에 천하통일이 이루어질 거라는 추측이 있다.
여담으로 일러스트의 이미지가 굉장히 젊다. 대충 봐도 30대 정도로 실제 연령인 50대와는 20년 가까운 차이가 있어 보인다. 빙의한 유비의 육신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선호의 영혼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 같다는 평.
간절히 작품 주인공들의 빙의체 중 최고령 빙의체이다. 지금까지의 간절히의 작품을 보면 주인공의 빙의 대상들은 스타팅 시점에서 많아봐야 30대 중반 정도로 40대를 넘은 적이 없는데 이번 작 유비는 시작 년도인 213년에 이미 50세를 넘은 상태다.[28] 또한 간절히 작품 중 시작부터 한 세력의 실권까지 거머쥔 지도자 스타팅이라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29]
[1] 북송~청나라까지는 왕조 찬탈이 아니라 전란으로 멸망한 사례밖에 없으며(명나라는 타국은 아니지만 내전으로 멸망해서 찬탈은 아니다) 신해혁명도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된 거라 찬탈의 사례에 들어가지 않는다.[2] 유주 출신이라 오환족의 풍습을 잘 안다. 조조랑 같이 있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들의 작전을 잘 안다. 등.[3] 유비뿐만 아니라 조조도 한중 공격을 나름 늦췄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4] 심지어 오두미도 역시 천사도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5] 군대로 들어가야 할 돈이 복지 정책에 들어가기 때문. 당시 후한 군벌들 대다수가 군사력에 상당한 투자를 하던걸 생각하면 한중의 군사력은 자연스레 딸릴수밖에 없다.[6] 서량의 호족 집단이 마초를 대표로 세워 조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로가 한중의 안보를 위해 서량 호족들을 지원하고자 파견했다.[7] 유장이 집권한 이유가 동주병들이 가장 꼭두각시로 부리기 좋았던 인물이 그였기 때문이다.[8] 유비의 입촉 때 유비의 편을 든 익주 토착 호족들은 동주병 문제 때문에 협력한 자들이 대부분이다.[9] 양쪽 다 다 제대로 된 전투력이 없는 병림픽을 벌이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는 방어전을 치루고 있는지라 전투 동기가 충분히 높던 오두미도 세력이 우세를 점했다고 보면 된다.[10] 곽선호는 아예 자신이 이 시대의 어느 군벌(조조, 손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단언했다.[11] 바로 물에 걸어두면 삭아서 매년 수천근의 쇠를 녹여 새로 갈아 끼워야 할 뿐 아니라 오가 뻔히 알고 대비할 게 뻔하니 몰래 만들어서 잘 보관하고 있게 했다. 이후 219년에 호우가 발생하고 북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어디에 써야 할 지 알게 되리라고 덧붙였다.[12] 병호제는 병사의 질, 소집 속도에선 징병제보다 압도적이나 노예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처우가 열악했다. 로마처럼 일정 기간 지나면 전역 시켜서 토지를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땅뙈기 약간 던져주는 것 말고는 보상은 일절 없는데 복무는 죽거나, 늙어서 쓸모없어질 때까지 종신토록 이어지고 자기 대에 끝나는 게 아니라 대대손손 물려 내려가야 하며 탈영시 일가족 전체를 연좌제로 처벌했다. 이토록 열악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으로 기피 대상, 멸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병호에 속한 자들이 상층부에 반감을 가지는 일이 늘어났다. 거기다 연좌제를 이용한 공포정치도 20년이 넘자 한계가 와서 작중 초반 시점으로 가면 병사들이 가족들이 죽든 말든 개의치 않고 대규모로 탈영하는 일이 잦아져 그 조조가 탈영병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끝에 탈영법 개정까지 했을 정도였고,[30] 전시 계엄령 체제나 다름없는 병호제를 너무 오래 고수한 것은 영가의 난의 원인 중 하나로도 평가받는다.[13] 물론 휘하 군사들에겐 유비 본인이 유주에서 자라서 오환족과 가까이서 산 덕에 군기가 해이해진 걸 눈치챘다고 둘러댔다.[14] 헌제 및 기존의 한실 충성파. 이들 입장에선 유비가 한중왕이 되면 헌제의 입지가 약해지는 데다가, 설령 유비가 이겨도 헌제파인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15] 원역사의 조조가 유비를 형주 공방전에서 물리치면서 실현된 일이기도 하며 이는 정사 삼국지에 적혀있는 평가다.[16] 이 셋은 유비의 천자 즉위를 반대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즉, 미래를 아는 곽선호에게는 이만한 인선이 없는 것. 마침 이 셋이 고위 관료 유파, 중급 간부 비시, 하급 실무직 옹무라는 일종의 팀을 만들기 딱 좋은 조합이기도 했다.[17] 우선 촉한왕이라는 칭호는 왕을 칭하되 우리는 지방정권이라는 점을 어필할 수 있기에 중원 명사호족들의 반감을 누그러트릴 수 있고 복파대장군은 한 왕조 충신의 대명사인 복파장군이라는 칭호에서 따온 것이라 이를 칭하면 이후 복파장군의 칭호를 버리고 위나라 관직을 청한 하후돈의 퍼포먼스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8] 관우, 장비, 방통, 장임은 비자연사고 유비와 마초도 극심한 스트레스가 몸 상태를 악화 시켰을 가능성이 높기에 역사가 바뀌면서 수명이 조금이나마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다들 계속 험난한 전장에서 굴러온 상황이라 몸은 계속 소모되는데 이 시대의 의학 수준도 현대에 비해선 떨어지기에 장수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법정이나 황충은 이들과 다르게 순수하게 침상에서 죽은거라 원역사대로 갈 가능성이 크다.[19] 217년에 경기, 위황의 난을 연기시키기 위해서 맹덕전을 퍼뜨린 일 때문에 후음이 똑같이 거병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고, 최소한 유비군이 출진하면 누군가는 호응해주리라 믿고서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후음은 정작 유비군이 한중에서 출병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묘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력하게 죽지는 않겠다는 저항 의식으로 궐기했다.[20] 징집 보병들이 수레와 강노로 활용해 기병 전력에서 월등한 적을 상대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렴진화한 것. 서량을 흡수해 기병 전력이 어느 정도 채워진 덕분에 정말 한줌의 기병 뿐이었던 제갈량의 팔진도보다 훨씬 강력하다.[21] 당장 데뷔작이 삼국지 풍운을 삼키다라는 삼국지 대역이며 지금까지 유료화된 9개작 중 4개가 삼국지 소재다.(그외에는 조선 소재 2개(봉포, 전생런), 백제 소재 1개(백이잇), 후삼국 소재 1개(CM29), 중국 전국시대 소재(헉조괄) 1개다.)[22] 삼국지 풍운을 삼키다, 삼국지 팽월전은 가상인물에 빙의되었으며 내마속은 네임드인 마속에 빙의하긴 했지만 마속은 거물급으로 여겨지진 않는다.[23]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관우에 대해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한다.[24] 작가의 전작 내마속은 제갈량이 진주인공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제갈량 위주로 초인적인 능력, 감동적인 장면이 묘사되었다. 웃긴 건 주인공 마속 또한 간절히의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잘난 인물이다.[25] 유비가 조조 밑에 있던 시절 조조가 유비에게 준 관직인데, 유비는 조조에게 통수친 뒤 좌장군 인장을 들고 가서 한중왕 선포를 해서 허도로 돌려보낼 때까지 잘 우려먹는다. 물론 조조는 통수를 맞고난 뒤 바로 유비를 좌장군에서 잘랐긴 했지만 유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인장을 잘 써먹었다.[26] 정치적인 논리 탓에 이루어진 양자 유봉의 숙청, 입촉 이후 동주병이라는 병호제와 유사한 제도를 써먹지 못하거나, 관우가 무리해서 우금군 포로들을 보살핀 일들.[27] 내마속에서는 사마씨가 그다지 전공을 못 세웠음에도 사마소가 막무가내로 황위를 빼앗았다가 대규모 내분이 일어나 사마염 대에 서진이 멸망했고, 오나라는 이궁지쟁이 안 일어나 손화가 정상적으로 즉위했지만 손화의 아들 손호가 원 역사처럼 막장 폭군이 되어버려 원 역사의 서진 대신 촉한에게 멸망했다.[28] 최고령 주인공은 삼국지 팽월전의 팽월이다.[29] 간절히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인공 본인이 지도자 스타팅을 하기보단 지도자는 따로 있고 주인공은 그 아랫사람인 경우가 많다. 군주 스타팅으로는 봉포의 인종도 있긴 하지만 스타팅 시점에서 실권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쥐고 있는 상태라 온전한 지도자 스타팅이라 보긴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