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42:48

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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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촉한의 장수
관평 | 關平
파일:attachment/관평_사진.png
시호 갈충왕(竭忠王) 또는 정충왕(精忠王)
성씨 관(關)
평(平)
불명
부황 관성대제(關聖大帝)
모후 영황후(英皇后)
형제 동생 현충왕(顯忠王)
생몰 ?[1] ~ 219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기타5. 미디어 믹스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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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관우의 아들으로 민간 전승에서 설정된 자는 탄지(坦之). 정사에는 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관평의 자로 정국(定國)도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민간 전승에서 나온 게 아니라 2010년 중국 드라마 신삼국에서 설정된 자로 현대에 지어낸 것일 뿐이다.[2]

반삼국지에서는 관평의 자가 호서(胡西)라고 나오지만 역시 역사적 근거는 없다.

송휘종 숭녕(崇寧) 원년인 1102년 무이후(武夷侯)로 추봉되었다.

송휘종 선화(宣和) 5년인 1123년 '위현(威顯)'이 추시되어 무이위현후(武夷威顯侯)가 되었다.

1569년, 만력제가 관평을 갈충왕(竭忠王)[3]으로 추봉하였다.

아버지의 명성 덕분에 수호신으로까지 떠받들어진다. 관우가 신으로 받들어 모셔지는 과정에서 관우를 보필하는 좌우左右 부신扶神으로 주창과 함께 모셔진 것.

2. 정사 삼국지

딱 3번 등장한다.
  •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 관우는 10여 명의 기병과 함께 맥성에서 도주한다. 반장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 관우전에 따르면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임저에서 참수했다.

관우와 함께 행동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무예도 되고[4] 전장에 나설 정도의 나이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에서 장자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관흥이 관우 사후 관우의 작위를 계승한 이후로 약관의 나이에 시중에 되었으니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관평이 관흥보다 나이가 많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은 조운의 딸 조씨와 결혼했고 213년에 아들 관월을 낳았다. 방회가 촉에 살고 있던 관우의 후손들을 죄다 죽였으나 관평의 후손들은 후베이성 궁안현(공안현)을 중심으로 가문을 이어왔다고 한다.[5] 이와 별개로 관평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으며 관평의 직계 후손인 관우의 67대손 관충금은 6.25 전쟁에도 중국군(인민해방군)으로 참여했다고 한다.[6] 중국에서는 이들의 족보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다만 방덕의 아들 방회에 의해 관흥의 후손이 몰살당했다는 중국 동진의 역사가 왕은이 저술한 촉기(蜀記)라는 기록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중국 북송 초기에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 재상세계표에 의하면 관흥의 후손이 기주 신도군[7]에 세거했으며, 당 덕종 때 재상을 지낸 관파(關播)는 관흥의 후손이라 하는데 이에 의하면 관흥의 후손은 적어도 중국 당나라 시기까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3. 삼국지연의

이상하게도 관우의 양자로 등장한다. 삼국지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는 관평을 양자로 설정한 적이 전혀 없다. 양자란 설정을 넣은 데는 마찬가지로 같은 양자인 유봉과 대립시켜 관평의 충의를 더욱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란 설이 있다. 혹은 형주에 정착하기까지 유비의 다른 부하들은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고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충절의 화신이어야 할 관우가 자식을 건사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점은 흠이자 오점이 된다고 작가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관우의 엄연한 장자임에도 졸지에 양자가 돼버린 패드립을 당한 연의의 피해자 중 한 명이지만, 콕 집어 양자로 만든만큼 정사보다는 자주 등장하니 어찌 보면 연의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천리행 당시 관우가 유비와 함께 하북을 지나다가 어느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일행을 묵게 해 준 이 집의 주인장 관정도 관우와 같은 관(關)씨로, 그에게는 아들만 두 명이 있었다. 장남 관녕은 학문을 수양하는 젊은이였고, 차남 관평은 대조적으로 무예를 수양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관우는 이 중에 차남 평을 마음에 들어 부자의 연을 맺고 데리고 갔다고 한다.[8]

이후 유봉과 파트너가 되어 활약한다. 유비가 서천을 공략하자 유봉과 함께 종군했으나, 방통이 전사해 관우와 더불어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제갈량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나서면서 운명이 바뀐다. 번성 공방전에서는 관우도 인정한 방덕을 상대로 맞짱을 까고도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관흥은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유비에게 승전고를 전하는 사자로 파견되면서 목숨을 건졌지만, 관평 본인은 관우와 남아 있다가 결국 둘 다 잡혀 목숨을 잃게 된다.

4. 기타

파일:external/www.taoistsecret.com/god16.jpg
정사에선 잠깐 나오는 인물이 연의와 아버지 덕에 제대로 출세했다. 아버지가 신격화되자 덩달아 알충왕(謁忠王)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 관평제군(關平帝君)으로 불리며 군신의 황태자가 되었다. 관제묘에서 주창과 함께 아버지의 좌우를 시위한다.

현대 중국에 남아있는 관우의 후손들은 모두 관평의 후손들이다. 나머지 관우의 아들들의 후손들이 종회의 촉 정벌때 방덕의 아들 방회에게 전원 삼족이 멸해지게 무차별 학살을 당했는데 이 와중에 관평의 후손들이 천신만고 끝에 촉을 도망나와 각지로 흩어졌고 이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른 상황.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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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항목


[1] 관우조묘호기에는 178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청나라 시기 기록이라 신뢰성이 낮다. 게다가 실제 178년생이면, 181년생인 제갈량보다도 나이가 많은 중년의 장수이다.[2] CHING에서 방영한 자막에는 한자는 '定國'(정국)으로 한글로는 '현거'라고 나온다. CHING의 신삼국 번역은 오역이 매우 많은 편이다.[3] 일설에는 정충왕(精忠王).[4] 관흥은 창작물에서 표현되는 모습과는 다르게 정사에서는 문관의 일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5] 위진남북조 당시 북형주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6] 6.25 전쟁 때 사망한 것은 아니다.[7] 위나라의 영토였으며 당시 명칭은 안평군이었다. 사마염이 진을 세운 이후 장락군으로 개명되었다가 수나라 때 신도군으로 개명된다. 지금의 허베이성 헝수이시 지저우구이다.[8] 판본에 따라서는 유비가 관정에게 "내 아우 관우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당신의 차남을 아우의 양자로 들이고 싶소."라고 요청하자 관정이 관평을 불러 앞으로는 "관우 장군님이 네 새로운 아버님이시니 앞으로 잘 모시거라!"라고 당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