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8 11:16:20

유애

劉艾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2. 생애

초평 연간에 동탁 휘하에서 장사를 지내면서 동탁이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해 자신을 두려워해 할 수 없으며,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이라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 자신을 기피한다면서 장온의 부관으로 있을 때 이야기를 하자 유애는 손견이 때에 맞춰 계획을 살폈지만 원래는 이각이나 곽사만도 못하다고 했다.

손견이 미양정 북쪽에 있는데, 보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싸우다가 거의 다 죽고, 인수마저 잃었다고 하니, 그가 일을 잘하지 못한 것으로 반동탁연합군이 곧 무너질 것이라 말했으며, 이에 동탁이 두 원씨(원소, 원술)와 유표, 손견만 죽이면 천하가 복종해 자기를 따를 뿐이라 했다.

194년에는 삼보의 난이 벌어지고 삼보 지방에 가뭄이 들자 헌제후문을 시켜 태창의 쌀, 콩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미음이나 죽을 만들게 했지만 하루가 지나도 굶어 죽는 자가 줄지 않았으며, 이에 헌제가 구휼하는 과정에서 농간이 있나 의심해 친히 앞에서 죽을 만드는 것에 시험해 보고는 충실하지 않다고 여겨 시중인 유애를 보내 담당 관리를 꾸짖게 했다.

유애는 쌀과 콩 5승을 임금 앞에서 죽을 만들도록 해서 세 그릇에 가득찼으며, 이에 헌제가 상서에게 쌀과 콩 5승으로 죽 세 그릇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쇠약해지니 어찌된 것이냐고 했다. 이 일로 상서령 이하의 모든 관원들이 사죄하고 후문을 장형 50대에 벌을 받게 하면서 이후 많은 이들이 구제되었다.

196년에는 종정, 팽성상을 지내면서 어가를 호송한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1]

198년에 여포가 서주를 점령하자 팽성에서 쫓겨나 조정으로 돌아갔으며, 214년에 헌제의 명으로 왕읍과 함께 위공국으로부터 귀인(조조의 딸들)을 맞이했고, 216년에 사지절 행 어사대부 종정으로 있으면서 조조를 위왕으로 책봉하는 사자가 되었다.

저서로는 영제기(靈帝紀)와 헌제기(獻帝紀)가 있다.

3. 창작물에서

소설 삼국지 서영전에서는 헌제가 낙양으로 다시 천도하면서 서영이 천만금의 재화와 10만 섬에 이르는 공물로 보내 천도를 축하한다는 것을 알렸다.


[1] 원굉의 한기에 기록된 호송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진 명단은 위장군 동승, 보국장군 복완, 시중 정충丁沖, 충집, 상서복야 종요, 상서 정부郭溥, 어사중승 동분董芬, 팽성상 유애, 빙익馮翊 (태수) 한빈韓斌, 동군태수 양중, 의랑 나소羅邵, 복덕, 조유趙蕤 다. 이각에 잡혀 죽은 사성교위 저준은 추증하여 홍농태수로 삼았고 의랑議郎 후기侯祈, 상서尚書 풍석馮碩, 시중侍中 대숭臺崇을 꾸짖어 벌을 내렸다. 시중 양기와 함께 어가를 수행했고 홍농에서 헌제가 배를 타고 가려하자 홍농 출신인 양표가 이곳 물길이 위험하다며 반대했고 유애도 홍농 섬현 현령을 지냈기 때문에 양표의 의견에 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