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지방 관아의 육방을 담당한 중인 계급의 관리들로, 하급 관리를 가리키는 말인 아전 중 외아전으로 분류되었으며. 향리층이 전담했다. 중앙 조정에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를 두고 판서를 임명하여 관리하듯이 지방 관아에도 육방을 두어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여섯 사람이 수령을 보좌하였다.2. 종류
- 이방(吏房): 인사, 비서 업무를 담당한다.[1]
- 호방(戶房): 재정 담당. 주로 사또가 지배하는 고을의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하는데 사또가 탐관오리일 경우 세금을 쥐어짜내느라 나름 고생을 하는 위치이다.[2]
- 예방(禮房): 교육과 제사, 의례 문제를 담당. 사또의 임무로 풍속 교화도 중시된 만큼 일감도 많았다.[3]
- 병방(兵房): 군역, 치안 담당. 지방의 군사훈련·경찰업무·군역부과·성곽·도로·봉수의 관리 등에 관계된 업무를 담당한다. 사또는 해당 지역의 군 지휘관도 겸했는데 이 때 보좌역도 한다. 원래는 모든 관아에 다 있어야 하지만 제승방략으로 인해 충청도나 강원도에서는 병방이 편성되지 않기도 했다.
- 형방(刑房): 법률, 소송 담당. 사또는 자신의 지방에서 지방관과 판사(그리고 규문주의였던 당시 성향상 검사도 포함)를 겸하는데 국문을 하게 되면 사또가 판사, 형방이 검사 역할을 한다.
- 공방(工房): 토목을 담당. 주로 사또의 집무실 건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임지가 변방일 경우 성벽을 쌓는 업무도 전담한다.[4]
이중 육방을 대표하는 실세는 인사를 담당하는 이방이었고, 그 다음이 토지와 호적을 담당하는 호방과 재판과 소송을 맡는 형방이었다.(조선 초기는 호방이 수장, 후기는 이방이 수장) 보통 지방관을 임명할 때에는 자기 고향에는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수도에서 온 수령은 부임지에 대해서 잘 몰랐고 경우에 따라선 육방관속이 수령을 바지사장으로 여기고 중간에서 다 해먹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각주로 현대 기초자치단체의 기조실장이니, 국(과)장이라고 써놨지만, 실제로는 이들 육방관속은 품계를 받지 못해 관료라고 할 수도 없고 그 시대 말로 '벼슬아치도 아니었다. 즉, 말단미관직인 종9품 능참봉 보다도 아래인 것이다.[5] 굳이 현재랑 비교 하고 싶다면 공무직이며 그것도 월급 조차 없는 '무급 공무직'이었다. 당시에는 '구실아치'라고 불렀다. 그러니 현대의 직책과는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하다.
3. 부패와 차별
고려 후기부터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의 파견이 확대되고, 왜구의 침략과 여몽전쟁으로 여러 고을이 황폐화되고 통폐합되면서 향리들의 권한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부담이 커지면서 향리들이 여러 방법으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시대부터는 향리들의 이탈을 막고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억제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육방관속이 차별당하고 부패가 심해지게 되었다.이들은 문과와 무과 응시를 금지당하진 않았지만 여러 제한을 받았다. 초기에 있던 이과(吏科) 시험도 없어졌는데 향역을 지는 대가로 주어지던 토지나 녹봉도 더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물론 육방관속도 지방에서 나름 유력자인지라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지만, 향역을 지면서 발생한 비용을 모두 자신이 부담해야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이를 충당하기 위해 각종 수작을 부리거나 백성들을 침탈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부터 관아 자체 예산으로 육방관속에게 급료를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급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육방관속에 지원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몰락한 양반인 잔반들도 육방관속을 하려고 들었다.
또한 조선 후기 서얼의 관직제한이 사라져서 '따지고 보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출신인데 왜 우리만 사다리 걷어차기를 계속 겪어야 하는 거냐!'라고 불만이 폭발해 차별철폐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래서 1880년대에 공식적인 차별이 철폐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이들이 중앙으로 올라갈 수 있던 건 아니라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별다른 중앙에서 힘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4. 기타
오리정승 이원익의 경우에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충청도 서산 수령으로 부임해갔는데 꼬꼬마가 수령이라고 오자 무시하던 육방관속들이 오히려 똑똑한 이원익에게 역관광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육방관속이 나이가 어린 수령을 무시하자 벼르던 이원익이 같이 바닷가로 놀러나갔는데, 수수밭이 보여서 육방에게 수숫대를 부러뜨리지 말고 소매속에 넣어보라고 했고 당연히 못하겠다고 하는데 "1년 큰 수숫대도 못 분지르는 너네들이 12년이나 큰 나를 품 속에다 넣으려고 하느냐? 너희 머리가 너무 커서 어른을[6] 보고도 인사를 못하는 것 같으니 이제는 갓 대신 옹기 그릇
물론 과거 응시 제한 연령인 18세[A]도 되기 전에 과거 붙고 벼슬을 했을 리는 없고, 워낙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라 만들어진 설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는 이원익은 23세[A]에 과거에 급제했다. 다만 이원익은 키가 워낙 작은 인물인지라 13세 꼬마같은 외모이긴 했다.[9]
사극에서의 이방은 보통 이방수염이라고 불리는 쥐수염을 장착한 아첨꾼 역할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5. 관련 문서
[1] 현대 기초자치단체의 기획조정실장이나 그 역할을 하는 국장 및 총무과장, 비서실장의 업무를 담당한다.[2] 현대 기초자치단체의 경제 업무를 담당하는 국장 및 예산과장, 재정과장, 회계과장, 세무과장 및 세무서장의 업무를 담당[3] 현대 기초자치단체의 공보실장, 의전 및 수행 담당 비서, (지자체장이 교육감도 겸임한다 칠 때) 교육감 휘하 교육지원청의 교육장의 업무를 겸임한다고 볼 수 있다.[4] 현대 기초자치단체의 건설국(과)장, 교통국(과)장 격의 업무를 수행했다.[5] 반면 현대 기초단체의 과장급이면 아무리 작은 군단위여도 최소한 5급 이상의 고위직이고 호봉도 꽤 높다. 쉽게 말해 5급 이상의 고위직이 하는 일을 무급 공무직이 했던 셈.[6] 양반(그것도 왕족 방계) 출신으로 과거 합격해서 부임했으니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너희 아전들에게는 어른이다 이거다.[A] 세는나이[A] 세는나이[9] 워낙에 키가 작아서 이원익의 키와 관련된 야사도 존재할 정도. 그의 키가 3척 3촌밖에 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아무리 커도 154cm라 현대 기준으론 정말 13세 혹은 그 이하 수준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