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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6년(고종 3)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 |
사망 | 1943년 12월 30일 |
본관 | 파평 윤씨[1] |
자 | 옥여(玉汝) / 태봉(泰奉) |
서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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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아버지 윤태규(尹泰奎)와 황수극(黃壽極)의 딸인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고종 3년(1866년)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우찬동(禹贊東)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윤량식은 젊었을 때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과거를 보는 데 필요한 학업을 폐지하고 궁벽(窮僻)한 시골에 은거(隱居)해 재주나 학식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었으며 스스로 늬우치고 경계했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등 137명이 참여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던 세칭 파리 장서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 동참해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한국유림송파리평화회서(韓國儒林送巴里平和會書)’에 124번째로 서명해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했다.
1919년 4월 12일 경북 성주의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과 관련해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발각되면서 파리 장서 사건이 같이 발각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윤양식도 이때 발각돼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1919년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궐석(闕席)한 채 징역 6월을 판결을 받았다.
1919년 8월 2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중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피고 두 사람은 유생(儒生)인데 대정 8년(1919년) 3월 초순 이름 있는 선비들이 유림에서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 중인 만국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에 관한 연명(連名)의 청원서를 제출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계획한 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을 권유해 가맹시킬 무렵 각 위에 적힌 거주지 마을에서 김창숙 등이 가지고 온 취지의 청원서에 유생으로서 서명하거나 또는 대서(代書)할 것을 부탁했다.
또한 김창숙을 그대표자로 해 동인으로 해금 이 청원서를 가지고 동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파리를 향해 출발하게 함과 동시에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을 다수 작성해 조선 내 가 지방의조선인에게 배포함으로써 공공의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이하 생략"
옥고를 치른 뒤에도 자나 깨나 조국의 광복을 위해 초사(焦思)하다가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12월 30일 애석하게도 78세로 기세(棄世)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창리(倉里) 뒤 저전산(楮田山) 임원(壬原)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했다.
[1] 태위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