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23:56:28

윤봉(조선)

尹鳳
? ~ 1483년(성종 14년)
1. 개요2. 행적

1. 개요

조선 출신의 명나라 내시.

2. 행적

원래 황해도 사람으로 명나라에 조공 내관으로 들어갔는데 황제의 신임을 얻어서 내사(內史), 봉어(奉御), 태감(太監) 등을 지내면서 품계가 정1품에 이르렀다.

태종, 세종때는 명나라 사신 중 가장 많이 왔는데 이때 윤봉은 조선 신하들에게 “동생인 윤중부[1]에게 벼슬자리를 하나 맡아줄수 있겠나?”라고 묻는 등 급기야 물건이 아닌 것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른다.[2] 그러나 윤봉은 이렇게 받아먹으니까 양심이 찔렸는지 명나라로 가서는 조선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이후 1483년 (성종 14년)에 윤봉이 노환으로 은퇴를 신청해 조선으로 귀국하자 성종은 윤봉에게 노비와 땅을 하사 시켰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에게 각각 정평공이란 시호를 내려주었고 과의장군이라는 벼슬까지 주었다.

이렇게 사신으로 와서 제일 유명한 일화는 윤봉이 사람을 시켜서 해청을 잡아서 가려고했는데 그걸 본 이징옥이 이걸 풀어줬는데 이때 윤봉이 “아니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해청을 풀어주면 어쩌자는거야?!”라고 하자 이징옥은 “제가 가까이가서 봐보았는데 저건 해창같이 생긴 잡종 입니다.”라고 하자 윤봉은 화가나서는 이 일을 국왕에게 말했고 세종은 결국 이징옥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뜻밖에도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요청하여 귀양 정도로 끝난 것인데, 윤봉의 입장에서는 일이 너무 커지면 물의를 일으킨 책임으로 자신도 처벌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는 추측이 있다.(이것 저것 많이 챙길 수 있는 조선 사신의 자리는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이징옥이 이런 부분까지 계산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1] 서흥 윤씨의 시조로 과거를 보지 않았음에도 이 같은 상황이 고려되어 승진을 거듭한끝에 최종적으로 명예직이긴 하나 지중추원사를 지내면서 품계가 무려 정2품까지 올랐다.[2]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윤중부를 대호군에 재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