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5 21:17:31

응오꾸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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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전오왕(前吳王) / 오선주(吳先主)
응오(吳, Ngô/오)
꾸옌(權, Quyền/권)
생몰기간 897년 3월 12일 ~ 944년 1월 18일
재위기간 939년 ~ 944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출처

1. 개요

오랜 식민 지배로부터 베트남을 해방시킨 인물이었다.

베트남의 자주 시대를 연 최초의 독립 왕조인 응오 왕조의 초대 군주였으며, 최초로 중국 한족 왕조를 몰아내고, 북부 베트남을 해방시킨 난세의 영웅이었다.

2. 생애

당나라황소의 난 이후 몰락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이 베트남에 절도사를 파견하지 못하게 되자, 베트남 지역은 906년 유력자였던 쿡트어주(Khúc Thừa Dụ, 曲承裕, 곡승유)가 정해군 절도사(靜海軍 節度使)에 임명되면서[1] 쿡(Khúc, 曲, 곡)씨 가문의 자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쿡씨 가문의 베트남 지배는 930년 쿡트아주의 손자 쿡트어미(Khúc Thừa Mỹ, 曲承美, 곡승미)가 베트남을 침공한 남한(南漢)의 군주 유공에게 생포되어 광저우로 보내지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남한의 베트남 지배는 쿡트아미의 부하 즈엉딘응에(Dương Đình Nghệ, 楊延藝, 양정예)의 저항으로 1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하지만 즈엉딘응에도 그의 말단 부하인 끼에우꽁띠엔(Kiểu Công Tiện, 矯公羨, 교공선)에게 살해당했다(937년). 그러자 즈엉딘응에의 사위였던 응오꾸옌이 끼에우꽁띠엔을 제거하려 했고, 끼에우꽁띠엔은 사절을 보내 남한에 도움을 요청했다.

남한의 군대가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매국노 끼에우꽁띠엔은 응오꾸옌에게 제거된 상태였다. 응오꾸옌은 미리 바익당 강(Sông Bạch Đằng, 白藤江, 백등강)에 쇠말뚝을 박아놓고 남한의 수군을 유인한 다음, 간조가 되어 남한군의 배가 쇠말뚝에 걸리자 공격해 남한 수군을 격퇴했다.[2] 응오꾸옌의 남한군 격퇴로 베트남은 중국의 1,000년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중국의 통일 왕조는 15세기 초 명나라의 경우를 제외하면 더 이상 베트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식민지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베트남을 독립시킨 응오꾸엔은 베트남 최초의 독립 왕조인 응오(Nhà Ngô) 왕조를 세우고 베트남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응오꾸옌은 독립 이후 수도를 꼬로아 성(Thành Cổ Loa, 古螺城, 고라성)으로 정했는데, 이곳은 고대 어우락 왕국의 도읍으로, 베트남의 전통적인 왕권과 관련이 깊은 곳이었다.

응오꾸엔은 칭왕한 해인 939년에 자신의 아내 즈엉(Dương, 楊, 양)씨를 왕후로 삼고, 여러 관직을 두었으며, 조정의 의식을 제정하고, 복색(服色)을 규정했다. 참고로 이것이 《대월사기전서》에 나오는 응오꾸옌의 치적 전부다.

944년, 응오꾸옌이 승하하자, 아들인 응오쓰엉응업(Ngô Xương Ngập, 吳昌岌, 오창급)이 그 뒤를 이을 예정이었지만, 처남인 즈엉땀카(Dương Tam Kha, 楊三哥, 양삼가)가 왕위를 찬탈하고 안남왕이 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바익당 강 전투에서의 역사적인 대승을 기념하여 응오꾸옌의 동상을 설치하고 역사관광단지로 조성했다.

3. 평가

黎文休曰: 前吳王能以我越新集之兵, 破劉弘操百萬之衆, 拓土稱王, 使北人不敢復來者, 可謂以一怒而安其民, 善謀而善戰者也。雖以王自居, 未即帝位改元, 而我越之正統, 庶幾乎復續矣。
레 반 흐우(Lê Văn Hưu, 黎文休, 여문휴)가 말하였다. "전응오왕은 우리 대월의 새로 모인 병사들을 거느릴 수 있었으며, 유홍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넓히며 칭왕하여 북인들로 하여금 다시 감히 쳐들어오지 않게 한 사람이었다. 한 번의 기세로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뛰어난 모략과 전략을 가졌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왕이 독립[自居]하면서 즉시 칭제하고 연호를 정하지는 않았으나, 우리 대월의 정통을 거의[庶幾], 아, 다시 이었도다!"

史臣吳士連曰: 前吳之興, 非徒有戰勝之功, 其置百官, 制朝儀, 定服色, 帝王之規模可見矣。享國不永, 未見治效, 惜哉。
사신 응오 시 리엔(Ngô Sĩ Liên, 吳士連, 오사련)이 말하였다. "전응오왕은 흥기하여 전쟁에 승리한 공이 있었을 뿐 아니라[非徒], 여러 관직을 두고, 조정의 의식을 제정하였으며, 복색을 규정하였으니, 제왕(帝王)의 제도[規模]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응오왕이 나라를 누린 시기가 길지 않아 통치의 효과를 볼 수 없었으니, 애석하도다!“
-《대월사기전서》<외기>(外紀) -오씨기-(吳氏紀) '전오왕(前吳王) 훙서' 기사에 딸린 사론.

쩐 왕조 시대 레반흐우(Lê Văn Hưu, 黎文休, 여문휴)가 《대월사기》(大越史記)를 편찬하던 시기부터 응오꾸옌은 베트남의 1,000년 북속기를 단절시킨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응오꾸옌에 대한 레반흐우와 응오시리엔(Ngô Sĩ Liên, 吳士連, 오사련)의 견해는 조금 달랐는데, 레반흐우는 응오꾸옌이 칭제도 하지 않았고, 개원(改元) 또한 하지 않았기에 그의 독립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완전한 독립 시기를 딘보린이 칭제한 968년으로 보았지만, 응오시리엔은 이때부터 베트남이 완전히 독립했다고 보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응오시리엔의 견해를 따라 응오꾸옌을 중세 베트남 최초의 독립군주로 보고 있다.

4. 출처

  •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산, 2018


[1] 하지만 쿡트어주는 《월사략》(越史略),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안남지략》(安南志略) 등 베트남의 역사서는 물론이고,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송사》(宋史) 등 중국 역사서에도 언급이 전혀 없다. 위 역사서들에는 쿡하오(Khúc Hạo, 曲顥, 곡호)와 쿡트어미의 이름만을 언급하고 있다. 쿡트어주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역사서는 1856년에 편찬된 베트남의 역사서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이었다.[2] 그의 시대로부터 약 300년 뒤 이 바익당 강에서 쩐흥다오가 똑같은 전법을 이용해 원나라침입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