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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이필화(李弼和)
이명 이원필(李源弼)
자 / 호 한경(漢卿 또는 漢京) / 성석(醒石)
본관 전주 이씨[1]
출생 1851년 11월 25일[2]
경상도 김산군 파미면 봉계리 예지동
(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
사망 1906년 5월 10일[3]
일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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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무녀독남으로 태어난 이응수(李應洙)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이건석은 1851년 11월 25일 경상도 김산군 파미면 봉계리 예지동(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에서 아버지 이상영(李象榮, 1815. 11. 4 ~ 1867. 4. 4)과 어머니 함양 오씨(咸陽 吳氏) 오영순(吳永順)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 9촌 삼종숙(三從叔)인 이상일(李象一, 1827. 12. 18 ~ 1898. 10. 25)에 입양되었다.

22세가 되던 1873년 벽진 이씨 이벽진(李碧珍, 1856. 5. 4 ~ 1908. 10. 29)[4]과 혼인한 뒤 충청도 황간현 서면 용암리(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용암리)로 이주한 그는 7년 만에 무녀독남 이응수(李應洙, 1879. 10. 7 ~ 1950. 7. 5)를 낳았다.

그는 1898년 송수만(宋秀晩)[5]·김운락(金雲洛)·심선승(沈宣承)·채광묵·이문화(李文和)·이세진(李世鎭)·김연식(金璉植)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이름을 도약소(都約所)라 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을 탄핵했다.

1905년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전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등과 함께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이어서 조약의 부당함과 적신들의 처단을 조직적으로 상소하기 위하여 13도소청(十三道疏廳)을 구성하였다. 이후 유생들과 함께 을사조약을 폐기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연명상소를 올렸다가 일본군 파견사령부에 체포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끌려가 옥중에서 갖은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고, 수차례 피를 토하다 1906년 5월 10일 옥사했다. 그는 버선 속에 유서를 감춰서 자신의 시신이 아들 이응수에게 전해질 때 그 유서를 전하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사람이 그 누가 죽지 않겠는가마는 죽고자 하는 곳에서 죽기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죽어도 눈을 차마 감지 못할 일이다. 아아 응수(應洙)야! 너는 이 애비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 말고, 네 애비가 매국노를 주살(誅殺)하지 못하고 죽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네 애비가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애통해 해라. 지금 피를 토하고 죽음에 있어 몇자로 너와의 이별에 대하고자 한다. 내가 죽은 후에 너는 슬퍼함으로써 효도를 하지 말 것이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지 말고, 마땅히 내 뜻을 이어야만이 내 자식이 됨을 명심하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3월 1일 이건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1906년 별세 뒤 국내로 봉환되어 경기도 과천현 하북면 노량리(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이문화의 선영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이듬해인 1907년 충청북도 황간군 서면 연화동(현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 연화동마을)에 이장되었다. 그 뒤 1987년 5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선성군파-명산도정파 16세 화(和) 항렬.[2] 양력 1852년 1월 15일.[3] 음력 4월 17일.[4] 이승렬(李承烈)의 딸이다.[5]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송수만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