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7 03:56:30

이겸호(1895)

파일:이겸호(1895).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석(李石)
자 / 호 익경(益卿) / 해강(海岡)
본관 재령 이씨[1]
출생 1895년 8월 12일
안동부 영해군 오서면 오촌동
(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9번지[2])
사망 1942년 8월 29일[3] (향년 47세)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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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5년 8월 12일 안동부 영해군 오서면 오촌동(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9번지)에서 아버지 이규발(李逵發, 1874 ~ 1945. 3. 7)과 어머니 의성 김씨(1872 ~ 1946. 5. 22)[4]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중화민국 봉천성으로 건너가 이상룡·이시영·김동삼 등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9년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 삼원보(三源堡)[5]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인 1920년 4월 졸업했으며, 졸업 직후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조선 국내에 입국했다. 1920년 10월 신흥무관학교 동창생이자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5중대 제1소대원이던 이덕숙(李德淑)·신형섭(申亨燮)을 만나 이덕숙으로부터 대한통의부 경고문 4통과 권고문 3통을 비롯한 기타 대한통의부 관련 문서류를 보았고, 그로부터 대한통의부의 실상을 듣고 군자금 모집에 협조해줄 것을 권고받았다. 이후 이 문서들과 무기를 숨기고 이덕숙을 숨겨 주기도 했다. 그 뒤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됐으나 1921년 3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받고 출옥했다.

1923년 이덕숙과 신형섭을 다시 만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함께 전개했고, 1924년 4월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이덕숙, 권동호(權東鎬)를 만나 영덕군 영해면 방면에서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해 6월 창수면 오촌동에서 일본 제국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자 총격을 가하고 도피했고,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은신하다가 1924년 9월 18일 경기도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4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이른 바 협박·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4년 9월 19일, 1924년 12월 16일, 1925년 3월 17일 세 차례에 걸쳐 대구복심법원에서 구류갱신이 이뤄졌고 1925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돼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중화민국 봉천성으로 건너가 이상촌 건설을 위해 노력하다가 재차 체포돼 1년 7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1942년 8월 29일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영해파(寧海派)-호군공파(護軍公派) 24세 호(浩) 항렬.[2] 이 지번에는 현재 면운재고택 및 별묘(眠雲齋古宅 및 別廟)가 위치해 있다. 이겸호는 면운재(眠雲齋) 이주원(李周遠, 초명 이정배李正培, 1714 ~ 1796. 12. 17)의 7대 주손(胄孫)이다. 현재 9대 주손이자 이겸호의 장손자 이인희(李寅熙, 1953 ~ )가 이 고택을 소유 및 관리 중에 있다.[3] 재령이씨영해파보 권3 369쪽에는 1972년 7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4] 김진헌(金鎭巘)의 딸이다.[5]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