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2:39:54

이고리 벨라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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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 벨라노프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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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FIFA 월드컵 브론즈슈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Player of the Year 1986
수상
디에고 마라도나
2위
이고리 벨라노프
3위
게리 리네커
}}} ||
우크라이나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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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373a3c> 이름 <colcolor=black,#e5e5e5><colbgcolor=#ffffff,#191919> 이고리 벨라노프[1]
Igor Belanov
본명 이호르 이바노비치 벨라노우
Ігор Іванович Беланов[2]
출생 1960년 9월 25일 ([age(1960-09-25)]세)
소련 우크라이나 SSR 오데사
국적
[[우크라이나|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우크라이나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4cm
직업 축구 선수 (세컨드 스트라이커 / 은퇴)
<rowcolor=#373a3c> 소속팀 CKA 오데사 (1979~1980)
FC 초르노모레츠 오데사 (1981~1984)
FC 디나모 키예프 (1985~1989)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9~1990)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991~1995)
FC 초르노모레츠 오데사 (1995~1996)
메탈루르흐 마리우폴 (1996~1997)
국가대표 33경기 8골 (소련 / 1985~1990)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2.1.1. 소련의 탁월한 공격수2.1.2. 1986년의 영광2.1.3. 먹튀로 전락하다2.1.4. 말년
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의 삶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clearfix]

1. 개요

"1986년 플라티니의 자리를 계승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위대한 선수였다는 증거입니다."
우크라이나축구 선수 출신 경영인, 정치인.

1986년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미셸 플라티니의 4연속 수상을 저지한 선수였지만, 이후 급속도로 몰락한 비운의 선수. 그는 선수 시절 소련 축구 리그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소련 내에서 명망이 높았지만 국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게 된 시기는 바로 1986년이었다. 이때 그는 발롱도르를 수상해 소련 국민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해외 진출을 해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기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고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가는 비운의 선수로 전락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2.1.1. 소련의 탁월한 공격수

1960년 9월 25일 당시 소련의 지역 도시이자 현 우크라이나의 도시인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1963년 13살의 나이로 오데사의 지역 축구 클럽인 FC 초르노모레츠 오데사에 입단하면서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여 이후 5년간 유스 클럽에서 활동하던 벨라노프는 1978년 군에 입대해 군 소속 축구팀인 CKA 오데사에 합류했다. 이후 군대에서 2년간 복무한 뒤 1981년 FC 초르노모레츠 오데사로 복귀해 본격적으로 프로 축구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벨라노프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와 중원 사이에 위치해 드리블을 하며 공격 전개를 이끌어가는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전방의 스트라이커와 호흡을 맞추며 상대 수비진을 교란해 골을 만들어내는 세컨 스트라이커였다. 그는 초르노모레츠 오데사에서 매시즌 27~29경기를 출장하며 5골 이상을 득점하는 등 기량을 꾸준히 키웠다. 그러던 1984년, 리그 33경기 11골, 컵 대회 5경기 3골을 기록해 총합 38경기 14골을 기록하며 소련 리그 최고의 세컨톱으로 우뚝 섰다.

이러한 그의 눈부신 활약을 주목한 소련의 명문 클럽 FC 디나모 키이우는 1985년 그를 영입해 팀의 핵심 공격수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디나모 키이우로 이적한 이후에도 리그 최강의 공미로 군림했다. 첫 시즌에 리그 31경기 10골에 국내 컵 4경기 2골, 유럽 대회에서 4경기 1골을 기록하며 총합 39경기 13골을 거두며 디나모 키예프의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다.

2.1.2. 1986년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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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를 수상한 벨라노프
1986년, 그의 축구 인생 최고의 시기가 찾아왔다. 1985-86 시즌 UEFA 컵위너스컵에서 8경기에 출전해 4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는 듯 눈부신 활약을 선보이며 FC 디나모 키예프의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FIFA 월드컵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 연이은 맹활약을 선보인 그에 대한 갈채가 쏟아졌다. 또한 리그에서도 10골을 기록하며 디나모 키예프의 리그 2연패에 크게 공헌했다. 벨라노프는 이러한 활약상에 힘입어 198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등 영광을 누렸다.

2.1.3. 먹튀로 전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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묀헨글라트바흐 시절의 벨라노프
그러던 1989년, 독일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했다. 그는 첫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기분좋게 출발했으나 이후 부상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아 불화를 빚으면서 좋지 못한 경기력을 일관했다. 그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 2시즌을 뛰었으나 27경기 5골에 그쳤고 그나마도 1990-91 시즌엔 리그에서 고작 10경기만 출전해서 아무런 공격 포인트도 거두지 못했다. 묀헨글라트바흐 팬들은 발롱도르 수상자인 그가 팀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며 기대했지만 영 좋지 못한 경기력으로 일관하자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던 1990-91 시즌 1월에 쫓겨나다시피하며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로 이적한 벨라노프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9경기 3골을 기록했지만 그의 명성과 걸맞은 활약은 아니었고 결국 브라운슈바이크가 2부리그로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벨라노프는 1991-92 시즌에 30경기 11골을 기록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1992-93 시즌에 큰 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되고 말았고 1993-94 시즌에 총합 34경기 8골을 기록한 후 모국인 우크라이나로 귀환하며 발롱도르 수상자 치곤 참으로 씁쓸한 결말을 맺었다.

사실 그가 이토록 부진한 것은 예견된 일이었는데, 1989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할 즈음 29세로 이미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고, 슬라브 문화권는 상당히 다른 게르만 문화권인 독일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독일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해 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게다가 허구한 날 잔부상에 시달려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했고 감독과는 전술 문제로 불화를 빛었다. 이러니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다.

2.1.4. 말년

독일에서 실패의 쓴맛을 안은 채 모국으로 귀환한 1995년 자신의 친정팀인 초르노모레츠 오데사에 복귀해 한 시즌을 치르며 3경기 1골을 기록하다가 큰 부상을 입어 잔여 시즌을 뛰지 못했다. 그후 소속 클럽과 맺은 계약을 해지하고 메탈루르흐 마리우폴에서 한 시즌을 더 뛴 뒤 1997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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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덴마크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 이후 꾸준히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86 멕시코 월드컵 소련 대표팀 스쿼드에 포함되었다. 그는 조별 예선에서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소련을 16강에 진출시키는 데 기여했고 16강전에서 벨기에와 맞붙어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소련은 불행히도 벨기에에게 4:3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벨라노프는 소련 선수들 중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한 경기에 세 골을 몰아넣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1988년에는 UEFA 유로 1988에 참가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문제는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실축해버렸고, 결국 소련은 루드 굴리트마르코 판바스턴에게 골을 허용해, 2:0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탁월한 드리블 기술로 공격을 이끌어나갔으며 파워풀한 슈팅과 뛰어난 득점력, 감각적인 패스를 가진 세컨드 스트라이커였다.

4. 은퇴 이후의 삶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사업가로 변신해 크게 성공해 우크라이나에서 알아주는 갑부가 되었다. 그러던 2003년 8월, 스위스의 축구 클럽인 FC Wil을 5100만 스위스 프랑(4000만 달러)에 인수하고 클럽 회장으로 부임했다. 허나 감독을 자주 교체하고 주급 문제로 주전 선수들을 모조리 내보내 팀 전력을 악화시키는 등 무능한 행보를 보인 끝에 결국 팬과 선수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구단을 팔아야 했다.

2010년 12월, 그의 이름을 딴 학교가 오데사에 세워지며 오데사 시의 체육 교육 겸 스포츠 장관으로 부임하고 2013년 2월 7일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이 일나고 본인도 우크라이나 방위군으로 합류한 것이 확인되었다. #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1] 보통 '이고르'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이고리'가 올바른 표기이다.[2] 러시아어 표기 : Игорь Иванович Белано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