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444><colcolor=#fff> 이균상 李均相 | |
호 | 인곡(仁谷) |
출생 | 1903년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85년 6월 9일 (향년 82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본관 | 정읍 이씨(井邑) |
학력 | 경성고등보통학교[1] 경성고등공업학교[2] 건축과 |
경력 |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성고등공업학교 [3] 교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학장, 명예교수 제1대-제3대 대한민국 학술원(건축 공학) 회원 및 원로회원 고등고시 위원 제7대-제12대 대한건축학회 회장 및 명예회장 건축표준용어 제정위원회 위원장 서울시 문화재 보존 위원장 서울시 도시 계획 위원 |
대표 작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본관 [4] (현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본관 (철거) |
수상 | 국민훈장모란장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 |
배우자 | 조희정 여사 [5] |
자녀 | 4남 3녀 아들 이승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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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복 전 후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건축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 서울대학교 공대 학장, 서울대공대명예교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대표작품으로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본관(현 혜화동 서울대의대 본관) 이 있다.
2. 생애
서울 출신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 (現 경기고등학교)를 졸업(1920)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現 서울대학교 공과대학)를 졸업(1925)하였다. 경성전수학교(법학)와 경성고등공업학교 두 곳의 입학시험에 모두 합격하였을 때 장연채(張然采)의 영향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택하게 되었다.재학 중 오가와(小河弘道)의 도움을 받아 조선총독부에 들어갔다(1925).박길룡(朴吉龍)과 함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본관 [6] (현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본관(철거) 설계에 참여하여 주로 구조설계를 담당하였다.
박길룡·김세연(金世演)·장연채·박동진(朴東鎭)과 함께 그룹을 이루다가 역시 오가와의 추천으로 25살 때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가 되었다(1927). 그 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강사(1940) ㆍ경성고등공업학교 [7] 교수(1945)ㆍ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1946~1985)를 지냈다.
그는 일제강점기하의 유일한 한국인 건축과 교수가 되었고,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의 구심체로 남게 되었다.
43년간 서울공대 건축과 교수 및 학장으로 재직하며 대한민국 학술원(건축 공학) 회원(1954)이 되고 고등고시 위원(1955)ㆍ서울시 문화상을 수상(1956)했다. 대한건축학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여, 제7대~제12대 학회회장(1956-1968)을 12년간 맡았다.
조선건축기술단(朝鮮建築技術團)의 건축표준용어 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건축용어를 제정하고(1958), 일본식 용어를 우리의 용어로 바꾸는 일을 장기인(張起仁) 등과 함께 하였다.
서울대 공대 학장(1960)이 되었으며 서울시 문화재 보존위원장(1961)ㆍ서울시 도시 계획 위원(1961)ㆍ서울대 명예 교수(1968)ㆍ대한 건축학회 명예회장(1968)을 역임했다.
또한 과학기술처로부터 과학기술 유공자로 인정되어 국민훈장모란장(1982)을 수여 받았다.
사후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추서받았다(1985). 그는 숭덕광업(崇德廣業) 정신으로 고고한 건축학자의 길을 걸어온 몇 안 되는 한국근대건축가의 한 사람이었다.
해방되기전 일제의 감시속에서도 우리말로 강의할만큼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제자들은 말하고있다. 학생들은 학문적 자세만을 가져야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간혹 제자들에겐 잡담없고 곧은 교수란 말을 들어왔다.
청년들과 어울려온 평생이었기에 그는 제자를 길러낸 소감에 대해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건 당연한일』이 아니냐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1·2·3대에 걸쳐 줄곧 학술원 회원을 지낸 이교수의 취미는 여행이었다.
3. 참고
인곡 이균상 명예회장님의 10주기를 맞이하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균상(李均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