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도영 李道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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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4년 3월 7일 |
한성부 동부 연화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933년 9월 21일 |
경기도 경성부 원남동 자택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 | |
본관 | 연안 이씨(延安 李氏) |
자 | 중일(仲一) |
호 | 관재(貫齋), 면소(芇巢), 벽허자(碧虛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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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1[1] |
대국(大局)의 간형(肝衡) 한혼(韓魂)의 단취(團聚) 민성(民聲)의 기관(機關) 보도(報道)의 이채(異彩) |
1. 개요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은 일제강점기의 화가이며 최초의 한국 만화가이다. 본관은 연안[2]으로 예조판서 이세재의 손자로, 양근군수 이인승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2. 생애
이도영은 18살이 되었을 때 조선시대 화가였던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생이 되어 전통적인 기법에 다양한 소재를 접목시켜 자유로운 화법을 펼쳤다. 그의 화가로서의 기여뿐만 아니라 1918년에는 "고희동, 조석진, 안중식" 등 13인 발기인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립하며 민족 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도영의 활동은 근대기 교과서 삽화와 잡지 표지 등을 통해 활발했으며, 1910년대 딱지본 소설책의 표지뿐만 아니라 『홍도화』, 『옥중가인』, 『옥중화』 등 다양한 작품을 그려냈다. 그의 표지 작품은 근대 초기의 고급스러운 문화상품으로 꼽히며, 한국 출판사의 근대 표지 디자인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2.1. 대한민보 만평
- 볼드체로 쓰인 한자를 이어서 읽으면 '이병무(利柄武)'가 되는데 이는 당시 유명한 친일파 군인이었던 이병무(李秉武)를 조롱한 것이다.
1909년 9월 2일자 《대한민보》 이검일병무사의(利劒一柄武士儀)
벌거벗고 환도 찼군...
- 통감부 깃발을 든 일본 관료 양 옆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만평을 그린 화가 이도영은 "한쪽에서 울며 청하고, 한쪽에서 애걸하는 상황이 참 가관이다"라고 적어두었다.
1910년 6월 23일 자 《대한민보》 일변(一邊)에는 읍청(泣請)이고
일변(一邊)에는 애걸(哀乞)하는
상황(狀況) 참 가관(可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