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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성(1872)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종무(宗茂)·건숙(健叔)
독산(篤山)
본관 경산 이씨[1]
출생 1872년 2월 25일
경상도 성주목 유동방 상포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 상포마을)[2]
사망 1922년 3월 20일[3] (향년 50세)
경상북도 성주군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보암2리 보동마을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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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이상경헌법재판소 재판관은 그의 손자이다.

2. 생애

1872년 2월 25일 경상도 성주목 유동방 상포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 상포마을)의 경산 이씨 대종가에서 경산 이씨 시조 이덕부(李德富)의 22대 대종손인 아버지 이기준(李驥埈, 1853. 7. 3 ~ 1916. 2. 29)과 어머니 인동 장씨(1847. 9. 27 ~ 1913. 5. 11) 황상파(凰顙派) 장극모(張極模)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장석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 중 한 명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할 목적으로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서명을 했다. 이 독립청원서는 이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시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의 각 향교에도 발송되었다.

그러다가 1919년 4월 12일 독립청원서 서명자 중 한 명인 송회근이 성주군의 만세운동 관련자로 체포되자 파리장서의 실체가 발각되었고, 이때 이만성 또한 체포되었다.

그 뒤 고초를 겪다가 1920년 3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3월 20일 성주군에서 사망하였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1] 백인당(百忍堂) 종중 24세 만(萬) 항렬.[2] 경산 이씨(京山 李氏) 집성촌이다.[3] 음력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