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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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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면상
李冕相| Ri Myun Sang
파일:리면상.jpg
<colbgcolor=#bc0021><colcolor=#ffffff> 출생 1908년 4월 8일
사망 1989년 6월 25일 (향년 81세)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생애3. 주요 수상 경력4. 북한의 평가5. 남한의 평가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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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친일반민족행위자, 해방 이후에는 월북북한의 작곡가, 정치인.

2. 생애

1908년 4월 8일, 함경남도 함흥군에서 태어났고[1] 1923년부터 1925년까지 함흥사범학교 특설과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원산 제2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바이올린과 풍금 등을 공부하며 음악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라남도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인근 벌교에서 열린 노동조합 총회에서 반일 관련 사상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했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음악학교 고등사범부에서 2년 동안 배웠고 이 시기에 사회주의 계열의 음악 단체인 일본무산계급음악동맹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의 조선 지사에서 '청춘을 찾아서' 등의 유행가와 '울산아가씨'[2]등의 신민요를 작곡해 취입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조선인임을 자각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노래를 작곡했는데, 중일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점차 맛이 가기 시작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일본 빅터 레코드 조선 지사 전속 작곡가가 되었고, 같은 해 '전장의 가을', '정의의 스승이여', '종군간호부의 노래'등의 친일가요를 작곡하면서 본격적인 일빠 인증을 했다. 1941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음악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관제 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에 들어가 국민가요(=친일가요) 작곡가로 활동했고, 같은 해 발표한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유행가가 큰 인기를 얻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뒤에는 다시 고향인 함경남도의 중심지인 함흥으로 돌아갔고, 1945년 10월,, 함경남도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에 임명, 1946년 3월,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 겸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라는 북한 문예계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훗날 이것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개편되면서 죽을 때까지 중앙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부터 '산업건국의 노래'와 '빛나는 조국'등 북한 체제 선전용 가요를 발표해 두각을 나타냈고, 비슷하게 친일 경력이 있던 극작가 조령출의 대본으로 춘향전 원작의 가극(오페라)을 작곡하고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초대 단장을 역임하는 등 초기 북한 음악계의 형성에 큰 몫을 차지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음악가동맹과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내 고향의 정든 집'(1952), '문경고개'(1950)같은 전시가요를 작곡했다. 휴전 후에도 계속 요직에 있으면서 김일성 우상화와 항일투쟁 미화 작업의 일환으로 '영광의 땅 보천보'(1955), '눈이 내린다'(1965),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1964), '어머니 당이여'(1964), '조국보위의 노래'(1950)등의 가요를 발표했다. 1955년 8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민족예술발전을 위한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으로 선정되어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1957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총장 자리에도 올랐고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 1958년 4월 16일에 50세 생일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으며 1959년 8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상수여위원회 결정 제2호에 따라서 밀림아 이야기하라 창작의 공을 인정받아 인민상을 받았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1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수훈,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만 재선되었다. 1971년 1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72년, 김일성상을 받았으며 12월에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다.

1960~70년대에는 갓 정치계에 들어온 김정일의 움직임에 호응해 가극이나 무용극 등의 집단 창작(문화어로는 집체 창작)에 동참하면서 창작 지도를 맡기도 했으며, 덕분에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 기간 동안 이루어진 문화예술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8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재선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요 곡들이 50~60년대에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창작 활동 보다는 기존 작품의 편곡이나 음악계 정치 활동 등에 주력했다.

1989년 6월 25일 22시 25분, 81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재능있는 작곡가 (...) 동지는 오랜 기간 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우리 당의 문예사상과 로선을 옹호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으며 주체적인 음악예술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크게 칭송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음악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인민예술가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주요 수상 경력

  • 북한 공훈예술가 (1955)
  • 인민상 (1959. 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로 수상)
  • 북한 인민예술가 (1961)
  • 김일성상 (1972)

4. 북한의 평가

친일 행적이 있었음에도 성공한 예술인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같은 친일 부역자라도 최승희처럼 김일성에게 안좋게 찍혀서 숙청된 이들과 달리 별 탈 없이 잘먹고 잘산 인물이라 사후에도 계속 평가가 매우 후한 편이다.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지금도 해방 후 작곡된 가요 대부분이 계속 애창되고 있고, 기악곡을 기존 노래로 2차 창작 하도록 의무화된 북한 음악계의 특성상 이런저런 노래들이 관현악이나 실내악, 무용음악 등으로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물론 친일 관련 행적은 철저히 입막음 또는 은폐되어 있다.

덕분에 자식들도 그 빽을 입어 소설가, 사회안전부 관료, 피아니스트 등이 되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김순남남로당계라는 이유로 숙청된 뒤 그 여파로 결핵을 앓다가 죽었고, 그와 동료였던 이건우도 김순남만큼은 아니었지만 월북 후에 존재감이 희미했다가 말년에 가서야 개인 작곡집이 나오는 등의 혜택을 입은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삶을 살았던 셈이다.

5. 남한의 평가

당연히 음악계의 심영 취급이다. 물론 친일파로 변절하기 전의 신민요나 유행가는 지금도 종종 리바이벌되고 있지만, 이후 작곡한 친일가요와 해방 후 월북해 지은 노래 대부분은 완벽한 빨갱이 인증으로 간주되어 친일파+빨갱이라는 이유로 나쁜 취급을 받는다. 물론 그의 지인이나 친족들 중에는 어떻게든 힘들었다는 초기의 개인사와 원만하고 올곧았다(고 하)는 성격 등을 내세우며 실드를 쳐주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원체 그 행적이 화려한 탓에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남북 문화예술 교류가 활발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조선국립교향악단 같은 공연 단체들이 리면상의 노래 중 '산으로 바다로 가자'와 '압록강 2천리'같이 정치적 문제가 없는 서정가요 혹은 '내 고향의 정든 집'같은 전시가요의 관현악곡 편곡을 공연하기도 했고, 동시에 리면상의 생애에 대한 재고찰도 이루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리면상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인 만큼, 남한에서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받을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6.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1]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함주군에 해당한다. 함흥부가 분리 승격되어 잔여지역이 함주군으로 개칭된 것은 그의 출생 이후인 1930년의 일이다.[2] 단 이경주가 작곡가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 전쟁 후 작곡가 불명의 울산 지방 민요처럼 불렸지만, 1990년대 후반에 전통 민요가 아닌 작곡자가 존재하는 신민요라는 사실이 다시 공표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곡을 남기기 위해서 작곡자를 숨겼을 것이다. 이 곡이 합창곡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김희조의 편곡 덕. 김희조는 자신의 책에서 이 곡의 작곡자가 있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적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