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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마리 데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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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장성. 마일부아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엔 제 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7년 전쟁 시기엔 똥별이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마일부아 백작은 1715년 8월 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투렌 보병대 대령이었고 왕립 군 여단장이었던 장 바티스트 프랑수아 데 마레의 아들이었으며 루이 14세의 명재상 콜베르의 후손이다. 1730년, 마일부아 백작은 15살의 나이에 근위 기병대에 입대했고 1733년 5월 28일 보위 대대 포병 부대의 중위로 전출되었다. 이후 벌어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마일부아 백작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중장으로서 활약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갔다. 1733년, 그는 밀라노 성에서 복무했고 1734년 1월과 2월 사라바에, 노바레, 그리고 토르토네 성 포위전에 참가했다. 1734년 3월 10일, 그는 불과 19살의 나이에 라 사르 보병연대 대령이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29일 라 사르 보병연대를 이끌고 콜로르노 전투에 참가했고 9월 19일에 구아스탈라 전투에 참가했다. 1734년 11월 25일 도핀 보병대 중령으로 승진한 그는 1735년 곤자그, 레조, 리비어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1736년 6월 프랑스로 돌아온 마일부아 백작은 11월 5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실 근위 경기병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1738년 코르시카 섬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군 지휘관 부아시외 백작이 사망하자, 마일부아 백작은 후임자로 기용된 아버지를 따라 코르시카 섬으로 갔다. 아버지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그는 1741년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투입된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8월 1일, 마일부아 백작은 하부 라인강 방면군 참모로 부임했다. 그는 1사단과 함께 베스트팔렌으로 진군하여 노이스에 주둔했다. 1742년, 마일부아 백작은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포위된 그림 벨 아일 공작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의 프랑스군을 구원하기 위해 1사단과 함께 보헤미아 국경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엘렌보겐을 공략하고 브로노를 구원했다. 이후 1743년 1월 프랑스로 돌아온 마일부아 백작은 1743년 2월 20일 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노아유 원수의 지휘 아래 라인강 방면 육군에서 근무했고 도핀 여단 5개 대대를 이끌고 밀텐베르크 마을을 점령하여 적군의 물자를 차단했으나, 곧 적군의 강력한 역습에 직면하자 라인강 우측 둑을 따라 후퇴했다. 노아유 원수는 데팅겐 전투에서 그와 합세하여 연합군을 공격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

1744년 2월 1일, 마일부아 백작은 콘티 공작 루이 프랑수아의 지휘하에 놓여진 이탈리아 육군 소장에 취임했다. 그는 니스, 빌프랑슈, 몬탈반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5월 2일, 그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7월에는 스투레 계곡을 통해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작전을 성사시켰다. 또한 9월 30일 마돈나 델루모 전투에 참가해 샤르데나 왕국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745년, 마일부아 백작은 아버지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육군에 다시 고용되어 알프스 산맥 통과, 아퀴 시 점령, 피아첸차, 파르마 지방 공략, 리바론느 전투, 알레산드리아 포위전, 카잘과 몽페라 공략전 등에 참가했다. 또한 그는 같은 해에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던 다르장송 후작의 딸 마리 마델렌느와 결혼했다.

1746년 초, 마일부아 백작은 샤르데나와의 평화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했고, 그는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에 다시 합류하여 아퀴, 폰조네, 트레조, 몬타보니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고 6월 16일 피아첸차 전투에서 싸웠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함께 포 강을 통과한 후 로토프레도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11월에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1747년 5월 1일 플랑드르에 있는 왕립 군대에 배속되어 7월 2일 라우펠드 전투에 참가했다. 1748년 4월 15일, 마일부아 백작은 마스트레히트 포위에 참가한 육군에 배속되었고 5월 10일 중장으로 승진했다.

1753년 아버지가 드웨 총독직을 사임하자, 6월 15일 마일부아 백작이 그의 뒤를 이었고 1754년 9월에는 알자스에 있는 프롭쉐임에서 군사 훈련을 지휘했다. 1755년 12월, 마일부아 백작은 프로방스 해안에 파견되어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와 함께 메노르카 원정을 준비했다.

2.3. 7년 전쟁

1756년 4월 12일, 마일부아 백작은 메노르카 원정대 중장으로 취임한 후 4월 18일 시아두델라 인근에 상륙한 뒤 곧바로 점령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3개의 군단 중 하나를 이끌고 마혼 요새를 공략에 참여했으며, 이어 세인트 요새 공성전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메노르카 섬이 프랑스군에게 귀속된 뒤, 그는 다시 프로방스로 파견되었다. 1757년 2월 2일, 마일부아 백작은 슈발리에 데 오르드레 뒤 루이에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흠잡을 데 없는 군 경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42세의 젊은 장성은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지휘관으로 인정받았고, 하노버 침공 작전에 투입될 프랑스군에 배속되어 데스트레 백작 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에의 보좌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이때부터 군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을 찍을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다.

데스트레 백작의 부관으로서 하노버 침공 작전을 수행하던 마일부아 백작은 곧 그와 마찰을 빛기 시작했다. 그는 데스트레 백작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공세에 임하며 패배를 너무 두려워한다고 여겼다. 그는 시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의 머리는 뜨겁고 고통받고 있다. 그는 식량과 사료, 포탄들이 부족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에게 이 부분들을 보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때, 그는 내가 모든 것을 장미빛 안경을 통해 본다고 말한다. 그는 오직 검은색 안경으로만 보고, 대부분의 경우엔 아예 보지도 않는다.

1757년 6월 1일, 프랑스군은 베젤에서 84km 떨어진 뮌스터까지 진격했다. 한편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는 연합군을 이끌고 비엘펠트로 진군했다. 6월 18일 프랑스군은 비엘펠트로 진군했지만 컴벌랜드 공작은 이미 퇴각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물자 부족이 만연했기에 병사들이 비엘펠트를 약탈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베이저 강으로 진군했고 7월 10일 코르베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데스트레 백작과 마일부아 백작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고, 데스트레 백작은 작전의 세부 상황을 마일부아 백작 대신 보귀에 후작 샤를 프랑수아 엘라자르에게 맡겼다. 베이저 강을 건넌 프랑스군의 행보는 빨라졌다. 데스트레 백작은 카셀을 점령한 뒤 베이저 강의 좌측과 우측 둑을 따라 컴벌랜드 공작을 추격했다. 그의 주력은 우측 둑에 있었고,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의 예비군이 좌측을 맡았다.

7월 21일, 데스트레 백작은 할레에서 연합군과 맞닥뜨렸다. 마일부아 백작은 즉시 공격하기를 원했지만 데스트레 백작은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7월 23일, 연합군의 전의가 떨어진 걸 확인한 데스트레 백작은 공격을 결심했다. 그는 세 방향에 정찰대를 보냈는데, 그 중 좌익엔 마일부아 백작의 군단을 파견했다. 이후 마일부아 백작은 적과 교전하며 하스텐벡으로 진군했지만 데스트레 백작으로부터 복귀 명령을 받고 귀환했다. 7월 26일, 데스트레 백작은 하스텐벡 전투에서 연합군과 맞붙어 승세를 잡았지만 전투 도중에 아군이 패했다고 오판하고 후방으로 물러서는 바람에 후퇴하는 적을 놓치는 실책을 저질렀다.

마일부아 백작은 그의 이같은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해 본국에 데스트레 백작을 성토하는 보고서를 보냈다. 이에 가뜩이나 데스트레 백작과 갈등을 빚고 있던 퐁파두르 부인 등이 루이 15세에게 데스트레 백작을 참소했고, 결국 루이 15세는 데스트레 백작을 경질하고 마일부아 백작과 가까운 사이인 리슐리외 공작을 신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리슐리외 공작은 부대 관리를 개판으로 해 병사들이 하노버를 철저하게 약탈하는 걸 방치해 둬 하노버 국민들의 적의를 샀고, 하노버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의 4분의 3을 횡령하고 병사들에게 나눠줘야 할 급료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이때 마일부아 백작은 이를 말리기는 커녕 리슐리외 공작의 곁에서 한 몫 거들며 상당한 재물을 모았다.

1757년 11월 5일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패한 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연합군이 재결성되어 하노버 구원에 착수했다. 이때 리슐리외 공작은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하다가 결국 경질되었고, 마일부아 백작은 잔여 병력을 수습해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 후 그는 영국 침공 작전에 참가해 5월 9일 됭게르크로 가서 6월에 집결해야 할 군단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됭게르크로 떠나기 전에 국왕의 승인도 받지 않고 데스트레 백작의 하스텐벡 전투에서의 무능한 면모를 성토하는 보고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했고 국왕에게 데스트레 백작을 군사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루이 15세는 데스트레 백작에 대한 이같은 공격이 매우 수치스럽다고 판단하고 당시 전쟁장관을 맡고 있던 그림 벨 아일 공작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에게 마일부아 백작을 재판에 기소하라고 명령했다. 1758년 5월 19일, 재판소는 노아유 원수의 주재 하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마일부아 백작을 체포하고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며 국왕이 선택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가둔다.
2. 마일부아 백작은 형기를 채워 풀려난 뒤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더 오랜 시간 동안 추방될 것이다.
3. 그의 모든 군사 직위를 박탈한다.
4. 데스트레 원수는 자신의 입장을 담은 보고서를 공개할 수 있다.

5월 22일, 마일부아 백작은 됭게르크에서 긴급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760년 석방되어 법정에 출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모든 군사 직위를 상실했다. 이후 그는 인맥을 동원하여 군직에 복귀하려고 노력했지만 루이 15세는 그의 요청을 모조리 묵살했다.

2.4. 이후의 경력

루이 15세가 붕어하고 루이 16세가 즉위한 후인 1776년, 마일부아 백작은 마침내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에노 지역의 군단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재정적으로 곤궁했기에 1781년 2만 5천 리브르의 연금을 받는 대가로 드웨 주지사 직을 양도해야 했다. 그러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1790년 국왕파들의 음모에 가담하여 혁명 세력을 분쇄할 쿠데타를 꾸몄으나 조기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떨어지자 급히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도주했다. 이후 망명 생활을 보내던 그는 1791년 12월 14일 리에주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