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16:30:29

이븐 루시드

이븐 루슈드에서 넘어옴
서양 철학사
중세 철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iki style="margin:-16px -11px;"<tablewidth=100%>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 }}}
<colbgcolor=#545454><colcolor=#ffffff> 교부 철학
이단설 영지주의 · 마르키온 · 마니교 · 펠라기우스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스 · 오리게네스
아프리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라틴 교부 암브로시우스 · 보에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신플라톤-신비주의 위 디오니시우스 · 프셀로스 · 피치노 · 뵈메
스콜라 철학
에리우게나 · 안셀무스 · 알퀸
보편논쟁 실재론 · 온건 실재론 · 유명론
아랍 철학 알 파라비 · 이븐 시나 · 알가잘리 · 이븐 루시드 · 이븐 할둔
유대 철학 마이모니데스
초기 프란치스코 학파
보나벤투라
도미니코 학파
대 알베르투스
아퀴나스
후기 프란치스코 학파
스코투스
오컴
신비주의 에크하르트
근세 및 근대신학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븐 루시드
ابن رشد | Averroës | Ibn Rushd
파일:Statue_of_Averroes_in_Córdoba,_Spain.jpg
본명 아불 왈리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이븐 루시드
أبو الوليد محمد ابن احمد ابن رشد
Abū l-Walīd Muḥammad Ibn ʾAḥmad Ibn Rušd
출생 1126년 4월 14일
에스파냐 코르도바
사망 1198년 12월 10일 (향년 72세)
모로코 마라케시
직업 철학자, 법률가, 의사, 신학자
성향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종교 이슬람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우리는 이 연구 영역, 즉 종교와 철학 간의 조화를 도모하고 종교에서의 우의적(友誼的) 해석의 규칙을 확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해석에 정통한 학자들에게 변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을 논의하는 적당한 장소는 논증적인 저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1]
-이븐 루시드, 『결정적 논고 - 종교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해결책』 제2장 중

Commentator(주석가)[2]

라틴 스콜라학 세계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안달루스의 대학자. 라틴어 이름인 아베로에스(Averroes)로 잘 알려져있다.

아베로에스 본인은 어떤 학파도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에 호소하는 아베로에스주의(Averroismus)는 파리 대학의 일부 학자들에게 영향을 줬으며 스콜라학에 큰 자극을 주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극찬을 받았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무슬림 학자.

2. 생애

알 안달루스 (무슬림 지배 하의 이베리아 반도)의 학자 (1126 ~ 1198년). 신학, 철학, 의학, 법학에 출중하였으며 무와히드 왕조 시대 세비아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루시드는 그리스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이븐 시나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저술 주해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에 최소 한번 이상 주석을 다는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아랍어 외에도 중세 스페인어로도 저술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덕분에 그의 저작들은 곧바로 라틴어로 번역되어 보급되었고, 아예 서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자라고 하면 이븐 시나보다 아베로에스[3]를 더 쳐 주었고, 1470년대 베네치아에서 이븐 루시드의 저술이 50여 종이나 통용되었으며, 르네상스 철학을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부를 정도였다. [4]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주석을 3번 이상이나 더 책으로 출판해야 할 정도로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그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어렵다고[5] 한다.

그는 중세 이슬람의 후기 팔사파[6]의 거두로서, 수피즘의 대부이자 팔사파와 대립했던 알 가잘리의 저서 Tahafut alfalasifat(철학자들의 파괴)[7]을 반박하는 Tahafut al - Tahafut(파괴의 파괴)[8]을 집필하였다. 다만 그는 '모든 인간은 질료적 속성을 지닌다'는 전기 팔사파의 주장과는 달리, 질료적 속성은 보편적 완벽함으로서 인간은 노력을 통해 질료적 지성을 인식할 수는 있으나 그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는 차이를 보였다.

이미 이븐 루시드 생전에 바그다드에서는 팔사파들이 몰락하는 시점이었다.[9] 그의 저작은 철학서는 이슬람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나 기독교권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수많은 그의 저서 중에 상당수가 유럽과 중동의 유서깊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븐 루시드는 단테신곡에서도 칭송받았으며, 르네상스의 대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아랍계 인물이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근본주의 신학자들의 비판을 받아 감금당하는 박해를 받다가 안달루스를 떠났고 모로코마라케시에서 사망하였다. 이븐 루시디는 기독교인처럼 와인과 돼지고기를 즐겨먹었는데,[10] 이슬람 대법관이 솔선수범은 커녕 와인을 마신다는 점이 트집 잡혀서 숙청당했던 것.

이후 서유럽에서 번역된 그의 저서들은 1270년대 파리 대학의 주요 연구 주제였으며 1271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베로에스 비판을 위한 지성 단일성'을 저술하여 아베로에스 철학을 반박하기도 하였다.[11]

철학 이외에 법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을 이단으로 혐오하는 와하브파에서도 그의 저서 중 마드하브간의 차이를 분류한 그의 저서를 아직도 교재로 활용하고 살라프파 계열 출판사에서 그의 마드하브 분류 서적을 영어로 번역해서 배포하고 있다.

3. 대중매체에서

코에이 역사시뮬레이션 게임 징기스칸 4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정발판에는 '이븐 루슈드'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됨. 능력치는 정치 75, 전투 21, 지모 41로 좀 짜다. 전반적으로 문관들에 대한 대우가 짠 게임이니 어쩔 수 없을지도.

4. 관련 문서



[1] 아베로에스 지음, 이재경 옮김, 『결정적 논고』, 제3쇄, 서울, 책세상, 2015, p.47.[2] 12~14세기 서양 문헌에서 아무런 맥락없이 Commentator라고 언급하면 이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Philosophus(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칭하는 단어였다는 것과 같은 맥락.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라는 의미이다. 주희[3] 이븐 루시드의 이름을 라틴어로 읽은 것이다.[4] 요셉 피퍼Josef Pieper, 김진태 옮김,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 150-154쪽[5] 당장 이븐 시나도 20살이 되기 전에 형이상학을 40번이나 정독하고, 우연한 기회에 시장에서 구한 주석서를 읽고 형이상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거리에서 춤추고 돌아다녔다고 한다.[6] 주의 : 마지막 '파'는 한자어로 파派가 아니며 '팔사파'자체로 한 단어다. 아랍어로 فَلْسَفَ‎라 쓰고 영어로는 falsafa로 읽으며,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philosophy, 철학)의 아랍어 음차다. 비슷하게 '철학자'는 faylasuf(파일라수프)라 표현한다.[7] تهافت الفلاسفة[8] تهافت التهافت[9] 호라즘 지역에 무타질라 학파 세력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중앙아시아 내륙 한 가운데 호라즘과 이베리아 반도의 이븐 루시디 사이에 빠른 소통이 이루어지는데는 한계가 있었다.[10] 지금도 독실하지 않은 무슬림들은 술과 돼지고기를 가끔 먹기도 한다.[11]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베로에스는 각각 중세 서구와 아랍권의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권위자이다. 아베로에스의 저술은 유럽 지성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유럽의 대학들에서 유행하던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같이 맹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주석을 맹신하는데 반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초로 하면서도, 토마스와 아베로에스는 서로 다른 견해차를 보였는데, 인간 개체의 지성은 개별적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일성을 이루는가에 대한 쟁점 외에도 아베로에스는 철학적 합리주의가 신앙적 견해보다 진리로의 인도 과정에서 단계적 우선성을 지닌다고 주장한 반면, 토마스는 철학적 진리는 어디까지나 신앙의 신비를 따르는 위치로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븐 루시드를 어느 정도 존경했는데, 신학대전에서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의미하며, '주석가'는 아베로에스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