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하야마 쇼코(巴山相浩) |
본관 | 함안 이씨[1] |
출생 | 1922년[2] 7월 8일 |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정촌마을 302번지 | |
사망 | 2010년 12월 4일 (향년 88세) |
일본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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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2. 생애
1922년 7월 8일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정촌마을 302번지에서 아버지 이정수(李貞洙, 1889. 3. 5 ~ 1981. 11. 5)[3]와 어머니 성산 이씨(1892. 1. 7 ~ 1973. 12. 20)[4]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일본 시마네현립 마스다(益田) 농림학교(島根縣立農林學校)[5]에 재학 중이던 1939년 2월, 도쿄도에 있던 같은 마을 친구인 이재관(李在官)[6]의 하숙집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재일학생동지회(在日學生同志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뒤 동지들과 함께 다른 동지를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던 1940년 4월,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에서 이재관을 통해 알던 심재인(沈載仁)이 자신이 재학 중이던 이사하야 농업학교의 신입생 입학 자축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 이재관을 비롯해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박응구(朴應九)·이호(李虎)·김상훈(金相勳)·김민남(金敏男)·고연하(高蓮河)·정진근(鄭鎭根)·송병홍(宋柄虹)·손병주(孫炳柱)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때 이들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7]이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당분간은 스스로의 자질을 향상하도록 하고 각자의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해 조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재일학생단은 국내에서도 조직활동에 들어갔고, 80여 명의 동지를 모으는 데 이르러 각 지역에 조직망을 갖추기도 했다. 또한 일본 제국의 교육정책 및 농업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40년 8월 도쿄도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동지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부서를 정하였는데 이때 경상도 책임자를 맡게 되었고, 도쿄도 및 우츠노미야시에 있던 재일학생단의 본부 및 도쿄도에 있던 이재관의 하숙집, 우에노 공원 등을 거점으로 활용하며 심재인·박응구·김상만·박근철·이재관·정덕수(丁德秀) 등과 함께 국내와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였다.
이후 조선으로 귀국해 고성군 농회(農會) 기수(技手)로 재직하는 동시에 고성군에 거점을 잡아 국내에서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42년 2월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몇몇 동지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던 중 심부름을 시켰던 아이의 실수로 도중에 동지들간의 연락 관련 문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필 이를 당시 예천경찰서 고등계에 조선인 형사로 있던 타카마츠(高松)가 입수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후 국내와 일본에 있던 동지 80여 명이 모두 잡혀 예천경찰서 등 각 경찰서의 유치장에 구금된 뒤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그 뒤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42년 11월 13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43년 4월 7일[8]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야마다 하루코(山田晴子)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2010년 12월 4일 일본에서 사망했다.
[1] 운포공파(雲圃公派) 25세손 상○(相○) 항렬.(족보)[2] 함안이씨대동보 권6 997쪽에는 192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자는 자화(子和).[4] 이시식(李時植)의 딸이다.[5] 1948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농림고등학교, 1949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고등학교 농업부, 1967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농림고등학교 등의 이름을 거쳐 1996년 시마네현립 마스다 산업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가 2008년 폐교되었다. 한편, 1953년 분리된 시마네현립 마스다(益田) 쇼요(翔陽) 고등학교는 지금까지 존재한다.[6] 같은 마을에 같은 함안 이씨 집안 사람이다. 다만 족보상 이재관은 판사공파(判事公派) 23세 재(在) 항렬로, 운포공파(雲圃公派) 25세 상(相) 항렬인 이상호와는 32촌 지간이며 이재관이 이상호에게 할아버지 뻘이 된다.[7] 1939년 11월 심재인과 박근철·이상만·이재관 등이 조직한 삼삼인단(三三人團)의 점조직이다.[8]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4월 8일 또는 5월 7일로 기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