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19상 수상 소방공무원에 대한 내용은 이영환(소방공무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아사노 에이칸(朝野榮還)[1] |
본관 | 영천 이씨(永川) |
출생 | 1924년 9월 9일 |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면 교촌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156번지)[2] | |
사망 | 1964년 8월 9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1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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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이영환은 1924년 9월 9일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면(현 영천시) 교촌동 156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교촌동 157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고, 1945년 당시에는 교촌동 92번지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일제가 1937년과 1941년 각각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우리나라의 식량과 자원을 강제로 수탈하는 한편 징용·징병 등으로 조선인을 침략 전쟁의 일선으로 끌어가자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2년 김영길(金永吉)·박기수(朴基秀) 등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43년 4월 동지 10여명과 함께 자신의 집에 모여 영천의 일본 신사[3] 방화 계획을 모의하고 영천 신사에 불을 질렀으나 마침 순찰 중이던 일본 경찰들에 의해 조기 진화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 국왕 및 정부요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거사계획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잡히기 직전에 만주로 탈출하였다.
1944년에 다시 국내로 잠입하였고 그해 5월 항일선언문을 작성하여 경상도 일대에 비밀리에 배부한 뒤 7월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탑승한 열차를 급습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일본군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식수에 독약을 살포하고 일본군 병영을 방화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이어 11월에는 대구헌병대에 방화하려 하였으나, 거사 직전 밀고로 인해 12월 4일 영천읍 교촌동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1945년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방화 예비, 불경죄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신천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13-1번지[4]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1964년 8월 7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사후 1977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2년 5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2004년 10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에서 영천시 교촌동 마현산공원에 이영환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1] 1945년 5월 18일 판결문[2] 인근의 문외동·창구동·성내동·문내동·과전동과 함께 영천 이씨 집성촌이다.[3] 현 영천시 교촌동 영천향교 옆 야산 중턱에 있었다고 한다.[4] 현재 이 주소에는 동대구반도유보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