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원수 李元秀 | |
출생 | 1501년(연산군 6년) |
사망 | 1561년(명종 16년) (향년 60세) |
본관 | 덕수 이씨[1] |
부모 | 부친 이천(李蕆), 모친 남양 홍씨[2] |
배우자 | 신사임당 |
자녀 | 4남 3녀 장남 - 이선(李璿, 1524 ~ 1570) 장녀 - 이매창[3] 차남 - 이번(李璠) 차녀 - 윤섭(尹渉)의 처 3남 - 이이(李珥, 1537 ~ 1584) 3녀 - 조대남(趙大男)의 처 4남 - 이우(李瑀, 1542 ~ 1609) |
관직 | 수운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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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덕형(德亨). 신사임당의 남편이자 율곡 이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상당한 공처가였다고 한다.2. 생애
덕수 이씨 집안 출신[4]으로, 신사임당과 혼인해 초기에는 데릴사위로 살았으며, 신사임당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을 두었다.이원수와 장남 이선[5] 부자(父子)는 과거에 여러 번 낙방했는데, 특히 이원수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간신히 급제했다. 과거를 보러 가다가도 풍악이 울리면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걸 보아 애초에 과거에 진지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선은 셋째 동생 율곡이 장원 급제한 과거 중 하나인 명종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41세로 합격했다. 둘째 이번은 급제하지 못했고, 넷째 이우는 선조 즉위년(15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26세로 합격한다.
참고로 명종 시절에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하도 과거 급제가 안 되자 이기에게 붙어 벼슬할 궁리를 했다가 신사임당에게 저지된 것. 이후 전개를 보면 이기에게 붙었다가는 아들의 벼슬길도 막힐 뻔했다. 이기는 윤원형 일파라서 문정왕후 사망 이후 권세를 잃었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과거 급제 후, 한양으로 오는 조운선을 감독하는 수운판관이라는 하급 관직을 역임했다. 율곡 덕분에 이원수는 훗날 좌찬성, 신사임당은 정경부인에 증직된다. 김장생이 쓴 율곡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부(父)의 이름은 이원수(李元秀)인데 벼슬은 감찰로서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그 부인은 의인(宜人) 신씨(申氏)로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감찰공(監察公)은 진실하고 정성스러워 꾸밈이 없고(無華),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신씨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신명화(申命和)의 딸로서 자질(資質)과 천품(天品)이 아주 뛰어나, 예(禮)에 익숙하고 시(詩)에 밝았으며, 옛날 여자의 법도(女範)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링크]
이원수가 이이를 낳은 것에 대해서 이런 야사가 전해진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에게 장가든 후, 평상시에는 파주의 집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가끔 짬을 내어 강릉의 처가를 방문해 아내와 지내곤 했다. 어느날 파주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는 길에 한 주막에 들러서 하룻밤을 묵어가는데, 그날 밤 주막의 과부 안주인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치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아내 신사임당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동침하자는 과부의 청을 거절하고 새벽같이 길을 나와서 강릉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아내와 며칠을 보내고 다시 파주 본가로 가던 이원수는 마음이 움직여, 자신을 유혹하던 과부의 주막을 찾아갔다. 그러나 과부는 이원수를 보자마자 온 얼굴에 노기를 띠고 이원수를 문전박대하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이원수는 과부에게 "지난번에는 나를 그리도 유혹하더니 오늘은 왜 문전박대하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과부는 노한 음성으로 "당신이 강릉으로 가던 날 당신의 씨를 받으면 하늘이 낸 큰 인물을 낳을 수 있었소. 하지만 그 씨는 지금 당신의 부인이 가지고 있소!"라며 이원수를 두들겨 내쫓았다. 그 때 신사임당이 잉태한 아기가 훗날의 율곡 이이이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너도밤나무 전설에서 호환을 예언하는 인물이 이 과부이기도 하다.
3. 아내와의 관계
신사임당은 살아 있을 때 이원수에게 공자, 증자, 주희의 고사를 들어가며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원수는 이미 신사임당 생전에 사임당보다 20살이나 어린 주막집 여자 권씨를 첩으로 삼았으며,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권씨를 서모(庶母) 자격으로 집에 들였다. 더욱이 권씨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장남인 이선과 나이가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엄연히 첩이었고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실부인을 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때문에 사임당의 당부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그럼에도 사임당의 자녀들은 새어머니 권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장남 이선은 매일 새어머니와 싸웠다고 한다. 3남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시묘를 마친 이듬해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이는 금강산에 간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는 이후로도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고, 아버지에 대한 회상도 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태도와는 딴판. 그래도 아버지가 죽은 뒤 재산 상속은 받았다. 사실 이원수의 재산 대부분이 사임당 신씨가 시집오면서 가져온 재산이어서, 이이 입장에선 그냥 원래 받을 어머니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다만 아내인 신사임당과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일부러 그런 성격에 그런 집안을 고르고 골라서 맞이한 데릴사위였다. 명문가에 부자 집안이었던 신사임당이 덕수 이씨 가문이라고 하지만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가난했던 이원수와 결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명화는 딸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데릴사위로 이원수를 지정했다. 다만 이원수가 평민 출신인 것은 아니고, 엄연히 양반 출신이다. 당시 이원수의 집안이 신사임당의 집안보다 급이 낮은 양반 집안이었을 뿐이다. 사실 이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조선 후기 이전까지는 사위가 장인의 집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흔했기 때문.
[1] (족보)[2] 홍귀손(洪貴孫)의 딸이다.[3]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여류시인 이매창과는 동명이인이다.[4] 충무공 이순신의 18촌 형이다.[5] 이원수의 장남, 율곡 이이의 맏형.